메뉴 건너뛰기

close

[목판화]동학군, 언덕위의 일본군을 향하여 농민화가 박홍규 화백이 그린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의 목판화이다. 동학의병군, 우금티 고개마루 위를 향하여 일본군(관군포함)과 치열한 전투를 배경으로 하였다. 이 판화의 절정은 가로질러 총알 하나가 선을 그으며 지난간 흔적은 심장을 멈추게 할 정도의 적박함, 치열함, 생사의 기로에 선 동학군의 모습을 형상화 했다고 본다.
[목판화]동학군, 언덕위의 일본군을 향하여농민화가 박홍규 화백이 그린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의 목판화이다. 동학의병군, 우금티 고개마루 위를 향하여 일본군(관군포함)과 치열한 전투를 배경으로 하였다. 이 판화의 절정은 가로질러 총알 하나가 선을 그으며 지난간 흔적은 심장을 멈추게 할 정도의 적박함, 치열함, 생사의 기로에 선 동학군의 모습을 형상화 했다고 본다. ⓒ 박홍규

동학의병군의 패전과 후퇴

"전봉준의 절명시 「운명」 첫 번째 소절 '때가 오니 천지가 모두 힘을 같이 했건만'이다, 두 번째 소절은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이다. 정말 때가 왔을 때는 사람들이 바람처럼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가, 운이 다하면 천하의 영웅도 수많은 민중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우금티 혈전의 역사는 크게 패하였지만, 후손 된 우리의 가슴에는 크게 승리한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었다.

아! 우금티 대혈전, 그때 우리가 승리했더라면 일제강점기도 없었고, 6.25전쟁도 없었고, 지금처럼 밀정들이 판을 치지도 않았겠고, 친일사관의 정신 나간 인사들도 이렇듯 설치지 않았을 것이다. 아, 지금도 역사 전쟁은 계속되고 일본은 독도를 중심으로 다시 한반도를 노리고 있다. 그들에게 편승된 사람들도 적지 않는 현실에서 다시 독립운동을 펼쳐야 하는 기험한 아국운수가 걱정이다. 아니, 진정한 독립운동은 갈라진 조국을 통일시키는 일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독립국이 아니라 분단국이다. 통일조국을 위해 다시 보국안민 척양척왜이다."

우금티 혈전에서 1만여 명 순국

전봉준과 손병희의 동학의병연합군 지도부는 피를 토하는 울분을 삼키며, 전군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우금티의 최후 혈전이 끝난 뒤 노성까지 물러나 인원을 점검해 보니, 2만 명 중 잔여인원은 5천 명에 불과했다. 우금티전투에 투입된 동학의병은 전체 2만으로, 그중 5천여 명은 도주하였고, 5천 명이 남았으므로 1만 명 정도가 일본군과 관병연합군에게 사살되었다. 그때는 일본군과 관군이 동학군을 토벌하였다고 하였지만, 지금은 나라를 위해 순국한 선열님들이라는 역사적 재평가와 명예회복이 이뤄졌다.

전국각처에서 의병기포는 이어지고

공주전투와 우금티전투에서 동학의병군이 계획한, 일본군과 관군을 분산시키려 한 전략은 도리어 전략적 패착이 되었다. 특히 남접의 최대 강군 김개남 부대와 풍부한 전투 경험을 갖춘 손화중 부대가 전봉준 주력부대와 합류하지 못한 것도 패전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시 결정적인 것은 일본군의 최신식 무기들, 고도로 훈련된 신식 군대의 편제와 전술이었다. 지형과 악천후 등도 혁명군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전봉준과 손병희를 중심으로 동학의병 지도부는 11월 12일(양12.8) 노성에서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경군과 영병 그리고 백성들에게 보낼 의병창의에 동참하라는 공고문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전령의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지난번 홍천에서 패전한 차기석과 지도부가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포살되었다는 보고였다. 또한 한산과 김천의 동학의병이 전라도에서 넘어온 의병군과 연합하여 한산을 점령했다는 소식도 들어왔다.

노성 면사무소 이 사진은 노성면에서 지역 행정 안내와 홍보를 위하여 공개한 사진이다.
노성 면사무소이 사진은 노성면에서 지역 행정 안내와 홍보를 위하여 공개한 사진이다. ⓒ 노성면

고종이 반포한 칙유는 백성을 배신한 행위

전봉준 대장은 11월 12일 의병에 동참하라는 동도상서문(東道上書文)을 서울주둔군사 경군(京軍), 감영 소속 군사 영병(營秉), 하급 벼슬아치 이교(吏校)와 시민(市民) 즉 백성들에게 보내 공고하였다. 동도상서문은 지난 11월 4일 국왕 고종이 동학의병은 물론 전국에 포고한 칙유(勅諭)을 읽고 그에 대한 답신 성격의 글이다. 먼저 고종의 칙유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칙유(勅諭)<조종실록 32권 국역본>

『지난번 우리 정부는 일본의 군사에게 원조를 요청하였다. 일본군은 세 방면으로 진격하여 동학도들을 초멸하려 하였다. 일본군들은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적은 수로 많은 적을 격퇴시킨 결과, 그들을 쓸어 없앨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일본으로서는 절대로 다른 생각이 없고 순전히 우리를 도와서 난리를 평정하고 정치를 개혁하며, 백성들을 안정시켜 이웃 국가와 우호관계를 돈독하게 하려는 호의라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칙유의 요지를 살펴보면 동학의병을 쓸어버리라는 지시의 내용이 나온다. 이는 백성을 배신한 행위이며 또 다른 짐작으로는 고종이 일본의 강압과 개화정부의 강요에 따라 포고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전봉준은 울분을 삼키지 못하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를 반박하는 글을 적어 내려갔다. 전봉준이 경군과 영병에게 공고하여 알리고, 백성들에게 가르쳐 보이는 동도상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봉준, 동학상서문은 민관일치로 일본군을 물리치자는 것

(동도상서문은 '국사편찬위원회, 동학난기록(하)「고시 경군여영병이 교시민」'의 원본과 도올 김용옥의 강연 해석본을 참고하였으며, 필자가 다시 정리하였다.)

동도상서문(東道上書文)
『다른 까닭이 아니다. 일본과 조선이 개국(開國) 이후로, 비록 이웃 국가이기는 하지만, 지난 여러 대를 걸쳐서 적국(敵國)이었다. 그러나 우리 임금의 어질고 너그러움에 힘입어, 조선 3개의 항구를 열어주어 서로 통상을 하게 되었다. 이후, 갑신(1884년) 10월에 '박영효·서광범·홍영식·김옥균' 네 명의 몹시 흉학한 자들이 일본의 적들과 내통하여, 아침저녁으로 임금과 백성들이 위태로움에 놓였다.

그리하여 종묘사직(宗廟社稷_왕실과 나라 등)의 강해진 힘으로 이런 간사한 갑신정변의 도당들을 3일 만에 소멸시켰다. 그러나 또다시 금년 시월의 개화간당(開化奸黨)이 일본 군대와 함께 야밤을 틈타 (1894년)6월 21일(음) 경복궁을 점령하여, 고종을 핍박하고, 조선 군대를 해산시켜서, 우리 나라 국권을 왜놈들 멋대로 휘두르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주요 관직을 가진 이들도 모두가 일본 개화당의 소속이 되어,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인민들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지 않고, 살육을 좋아하며, 우리 백성의 생령(生靈)을 도탄(塗炭)에 빠지게 하였다.

그래서 우리 동학 도인들이 다시 의병을 일으켜서 왜적을 소멸하고, 간사한 개화를 제어하며, 조정을 맑고 평화롭게 하여, 국가의 기반을 안보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의병을 일으킨 곳마다 의리를 지키지 않는 조선의 병정과 군병들이 의리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접전을 함으로써 비록 승패(勝敗)는 없지만, 피차간에 조선의 인명만 살상되니, 어찌 불쌍치 아니한가. 이것은 실재에 있어서 우리 조선 사람끼리 서로 전쟁을 하는 격이니, 이것이 바로 같은 민족끼리 치열하게 싸우는 골육상전(骨肉相戰)이라 어찌 애달프지 아니하리오.

또한 공주(公州)와 대전(大田)의 일로 논하여 따지더라도 비록 지난 봄 사이 동학군 이 전라감영을 함락한 앙갚음이라 하더라도, 일이 너무 참혹하여 후회가 심하며, 지금 일본의 대군(大軍)이 서울을 점령함으로써 팔방이 술렁거리고 매우 어수선 하건데, 조선 관료들이 편벽된 생각으로 일본 편을 들어 접전을 하는 것은 같은 혈족끼리 치열하게 싸우는 것과 다름없다. 생각건대 동학과 유학이 서로 믿음이 다르더라도, 우리 조선 사람들끼리 일본침략자 왜놈들을 몰아내는 것은 그 의로움이 피차 매일반일 것이다.

그리하여 두어 자 글로 의혹을 풀어 알게 하노니, 여러분 각자가 돌려보아라. 당신들이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근심하고 염려하는 마음인 충군우국지심(忠君憂國之心)이 있어서 의리로 돌아기를 바란다. 우리 서로 상의하여 같이 일본과 개화를 배척하는 척왜척화(斥倭斥華)로 우리 조선이 일본국의 나라가 되지 않도록, 같은 마음으로 협력하여 대사를 이루게 하자는 것이다.』

갑오(甲午)11월 12일
충남노성, 동도창의소(東道倡義所)
고시 경군여영병이교시민(告示 京軍與營兵以敎示民) 선유방문병동도상서소지등서(宣諭榜文竝東道上書所志謄書)

위 동도상서문은 한글화한 내용이다. 백성들과 관군은 물론 조선정부에게 보낸 전봉준의 글은 끝 문장에서 무엇을 요구하고 이루려고 했는지 분명하게 나타난다.

『조선이 왜국(倭國, 일본국)의 나라가 되지 않도록, 같은 마음으로 협력하여 대사를 이루게 하자는 것이다.』

동도상서문, 동학군은 일본군에 대항하는 의병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동도상서문은 '동학군은 일본의 침략에 맞선 의병(義兵)이라는 것을 공식화한 귀중한 문헌이자 자료'이다. 3월 25일 백산대회에서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하였고, 11월 12일 노성에서 동도창의소(東道倡義所)의 명칭으로 정부 측에 보낸 공고문에 있어 '동학의병본영'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래서 전봉준 장군은 동학의병 대장이고, 손병희 장군은 동학의병 통령이 된다는 명분과 역사적 사실을 증명한다.

동학의병은 위기에 처한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자 꺼져 가는 희망을 안고 경군과 관군 즉 관병연합군에게 마지막 연대를 제안했다. 그러나 관병연합군은 일본군의 지휘를 받고 있었고 또한 승세를 잡은 상황에서 연대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김개남의 승전과 전봉준의 패전

한편 금산에 주둔해 있던 김개남은 동학의병군 5천여 명을 이끌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상하여, 10일 진잠을 점령하였으며, 11일 회덕과 신탄진을 점거하였다. 김개남이 이틀간 전공을 세우며 북상하던 때는, 전봉준과 손병희의 동학의병이 처참한 패배를 당하던 바로 그 시기였다. 이렇게 의병의 전략이 빗나간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김개남 부대는 시기를 놓쳤지만 원래의 계획대로 전봉준 부대가 공주를 공격하는 사이 청주 방면으로 진출하여 한양으로 가는 길을 열고자 하였다. 만약 김개남 부대가 조금 더 빨리 북상하였더라면 그 결과가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김개남 부대는 11월 13일 청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과 청주영병의 반격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전봉준과 손병희, 패전을 거듭하고

전봉준과 손병희가 이끄는 의병 5천여 명은 11월 14일 노성에서 추격해 온 일본군과 관군연합군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이두황 부대는 이규태의 경군에 합류하여 동학의병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때부터 일본군과 관병연합군이 일방적으로 의병연합군을 몰아붙이면서 이들은 조금이라도 의병에 협조한 민가를 찾아 약탈하며 무차별 보복을 자행했다. 특히 이두황의 경군과 모리오의 일본군은 의병군이 머물다 떠난 곳들에서는 이유 불문하고 방화와 학살을 저질렀다.

논산 황화대 이 사진은 지난 (2024) 10월 13일 논산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주최, 황화대 전투 희생자를 위한 추모제 모습이다.
논산 황화대이 사진은 지난 (2024) 10월 13일 논산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주최, 황화대 전투 희생자를 위한 추모제 모습이다. ⓒ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논산 황화대에서 1천명의 희생자를 내고

동학의병은 14일 논산으로 밀려났다. 15일에는 논산 황화대(봉화산)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가 1천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 논산 황화대는 부안 백산과 같이 그 형세가 방어하기에 위치적으로 좋은 곳이다. 사방이 환하게 터졌고 적들의 움직임을 한눈에 알아보기에 전략상 어느 정도 요새(要塞)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포위당하여 협공을 받게 되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지형이다. 더구나 크게 패하여 후퇴하는 동학의병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일방적으로 학살당하고 만다. 이때의 참상은 "동학의병의 총과 창이 길가에 버려져 있고, 밭가에 널려 있는 시체들이 눈에 걸리고 발에 채였다"고 묘사될 정도로 참혹했다. 의병군은 다시 강경으로 다급하게 후퇴하였다.

전봉준과 김개남의 때늦은 만남

전봉준과 손병희는 강경에서 김개남과 만났으나, 이미 의병의 기세가 꺾여 전세를 돌이키기는 힘든 상태였다. 전봉준과 손병희는 잔여 의병을 재정비하여 11월 19일(양12.15)에 전주성을 재점령하고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주력부대가 바짝 추격하고, 전의를 상실한 상태여서 전주성을 내주고 후퇴하게 된다.

동학의병은 22일 밤 전주성을 빠져나와, 전봉준과 손병희는 원평 방향으로, 김개남은 남원 방향으로 갈라졌다. 전봉준과 함께 원평으로 향했던 손병희는 원평 최후 전투후 전봉준과 헤어지고 해월 최시형 스승이 계신 임실 새목재로 향한다. 임실 길에는 손병희 측근인 김영원, 이병춘과 함께 했다.

[목판화] 해월신사(최보따리) 최시형의 모습 농민화가 박홍규가 그린 목판화 해월신사 최시형의 모습니다. 해월신사는 동학 2세 교주로서 30여년의 도피생활과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동학의 마당 포덕 등을 통하여 동학도인 1백만명을 육성하였다. 해월신사는 그런 와중에 가는곳마다 감나무를 심고 꽃나무를 가꾸는 등 생명평화사상을 실천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 목판화는 그런 해월신사의 삶을 반영시킨 그림이다.
[목판화] 해월신사(최보따리) 최시형의 모습농민화가 박홍규가 그린 목판화 해월신사 최시형의 모습니다. 해월신사는 동학 2세 교주로서 30여년의 도피생활과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동학의 마당 포덕 등을 통하여 동학도인 1백만명을 육성하였다. 해월신사는 그런 와중에 가는곳마다 감나무를 심고 꽃나무를 가꾸는 등 생명평화사상을 실천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 목판화는 그런 해월신사의 삶을 반영시킨 그림이다. ⓒ 박홍규

해월, 거룩한 성자가 총을 들기까지

초목의 새싹도 하늘이라 했던 해월 최시형 법헌이 동학군은 손에 무기를 들고 모두 궐기하라는 결단은 성자의 고뇌와 보국의 결심이라는 두 측면이 작용했다. 최시형 법헌은 청산총기포령 이후 손병희 통령의 부대가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믿을 만한 제자의 집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유숙하며 수시로 동학의병의 상황을 보고받아 왔다.
최 법헌은 지난 삼례 신원운동 때 참석하려다 낙마하여 그 후 거동이 불편하였다. 최시형 법헌은 동학의병의 희생과 참혹한 학살 등의 보고를 들을 때마다, 괴로움과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피울음을 토해 내곤 하였다.

전봉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전봉준이 공포한 '동도상서문, 고시 경군여영병이교시민'을 자세히 살펴보면 조선의 국왕, 경군, 관군, 백성들에게 공고한 명문장이다. 글의 요지에는 관병연합군에게 일본축출을 위한 연대와 연합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분명하게 밝힌 "우리 동학 도인들이 다시 의병을 일으켜서 왜적을 소멸하고, 간사한 개화를 제어하며, 조정을 맑고 평화롭게 하여, 국가의 기반을 안보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당신들이 나라를 위한 충군(忠君)과 우국지심(憂國之心)이 있어서 의리로 돌아온다면, 서로 상의하여 같이 척왜척화(斥倭斥華)로 우리 조선이 왜국(倭國)의 나라가 되지 않도록, 같은 마음으로 협력하여 대사를 이루게 하자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분명 조선의 관군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조선이 왜국 즉 일본의 나라가 되지 않도록 같이 협력하여 큰 뜻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전봉준은 동도상서문에서 관군과 동학군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조선이 일본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동학#천도교#동학혁명#동학농민혁명130주년#수운최제우선생탄신200주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윤영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또 현(現)천도교선도사·직접도훈, 전(前)전주녹색연합 공동대표, 전(前)전주민예총 고문, 전(前)세계종교평화협의회 이사 등 종교·환경단체에서 임원을 엮임 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