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교사로서, 대구에 천착하게 된 건 몇 해 전 대구 아이들과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외부 체험활동의 일환으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알고 싶다며 부러 광주를 찾아온 대견한 고등학생들이었다.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배우고 느낀 것을 가랑비에 옷 젖듯 친구들에게 전해줄 일당백의 소중한 이들이다.
사적지 답사에 앞서 광주를 찾아온 외지인들을 인솔하기 전 당시의 역사를 개괄하는 건 필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다. 대개 1979년 부마 민주항쟁부터 1987년 6월 민주항쟁까지를 다루게 된다. 5.18 전후의 역사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터다.
그리 길지 않은 강의인데도 아이들은 대부분 심드렁한 표정이다. 학교 수업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는 거다. 모의평가 때도 자주 출제되는 내용이어서 식상하다고 한다. 지문이나 삽화에 5.18이 등장하면, 다섯 개 선지 중 신군부와 시민군이 거론되는 게 무조건 정답이라고 웃는다. 5.18과 그들의 첫 대면은 늘 시험을 통해서다.
5.18을 단지 '수험용 지식'으로 공부한 그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적지는 단연 국립 5.18 민주 묘지다. 당시 계엄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시신들을 쓰레기차에 실어와 묻었다는 것과, 앳된 학생들과 여성들의 희생도 컸다는 사실에 무척 놀라워한다. 총검으로 난도질당해 훼손된 시신도 적지 않다는 이야기에는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무엇보다 묘지에 빼곡히 줄지어 있는 봉분의 숫자에 기겁한다. 물론, 이곳엔 5.18 당시 희생된 분들만 모셔진 건 아니다. 당시의 부상자와 폭도로 몰려 고문당한 사람들, 이후 진상규명을 위해 헌신한 이들이 포함되어 있다. 신원 파악이 안 되어 '무명 열사의 묘'로 남아 있는 곳도 있고, 시신을 찾지 못한 희생자들은 별도의 묘역을 조성해 봉분 없이 묘비만 세워두었다.
입이라도 맞춘 듯 똑같은 질문을 쏟아낸 사람들

▲기념식이 진행되던 같은 시간, 5.18 구묘역은 참배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 서부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요? 이걸 어떻게 믿나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이 검증 차원에서 희생자와 유가족의 명단을 공개하라고 요구하는 게 아닐까요? 공개하지 못할 이유가 하등 없잖아요."
지난 주말, 수능을 치른 대구의 고3 4명을 묘지에서 만났다. 그들조차 전가의 보도처럼 5.18 희생자 명단 공개를 요구했다. 공개하지 못하고 감추는 건 사실과 달라서 아니냐는 거다. 오랫동안 5.18 사적지 답사 가이드를 해온 개인적인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유독 대구와 경북 지역에서 온 분들이면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질문하는 내용이었다.
이번에도 내 답변은 똑같았다. 국립 5.18 민주 묘지에 가나다순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궁금하면 직접 방문해서 확인하라고. 여느 국가 유공자와 마찬가지로 5.18 민주화 유공자 역시 국가보훈부의 엄격한 심사와 검증을 거치게 된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그들은 당최 믿으려 하지 않는다. 정보 공개는 사생활 침해 가능성이 커서 적절치 않다는 법원의 판결에도 막무가내다.
5.18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인식이 아이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듯해 적이 놀랐다. 이미 오래전 역사적, 사법적 평가가 끝났는데도 어르신들이고 아이들이고 입이라도 맞춘 듯 똑같은 질문을 쏟아냈다.
좀체 사라질 기미가 안 보이는 지역감정
"광주로 체험활동을 떠난다고 들었는데, 거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가느냐?"
한 아이는 떠나오기 전 할아버지로부터 느닷없는 핀잔까지 들었다고 했다. 광주에 가면 행동거지를 각별히 조심하라며 신신당부했단다. 광주 사람들 앞에서 사투리를 함부로 썼다간 해코지당하기 십상이라는 거다. 자동차 번호판에 지역명을 없앤 것도 영호남 지역감정 때문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이셨다고 한다.
지역감정을 부추겨 통치 수단으로 활용했던 무도한 군사독재정권이 끝난 지도 30년도 더 지났지만, 해묵은 지역감정은 좀체 사라질 기미가 없다. 특히 광주와 호남 사람들에 대한 편견은 고래 심줄보다 질기다. 특정 정당에 팔 할이 넘는 몰표를 주는 게 과연 정상이냐는 질문이 여전히 사람들에게 먹히고, '뒤통수를 친다'는 낭설이 진실인 양 회자된다.
압권은 호남 사람들이 6.25 전쟁 때 북한 인민군 편에 섰다는 이야기를 어릴 적부터 들었다는 한 아이의 전언이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교착되어 경상도 지역은 적들에게 빼앗기지 않았다는 걸 근거랍시고 제시했다. 반면, 호남 지역은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북한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았느냐며 반문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아전인수격 주장이다.
그렇듯 호남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북한 편이고, 그 중심에 그들이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은 '빨갱이' 김대중이 있으며, 5.18은 남한을 전복하려는 그들의 반란이자 이적행위라는 논리 구조다. 결국 호남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정당은 '종북 좌파'이며 '반국가 세력'이라는 거다.
죽음을 무릅쓰고 불의에 항거한 대구의 역사
아이들과 5.18 관련 대화를 나누며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 그들의 왜곡된 역사 인식은 그들이 사는 대구의 '핏빛' 역사에 대해 무지하다는 데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사실상 대구 역사의 시원을 박정희에 두고,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장구한 기득권 집단과 자신들의 이해를 동일시하고 있었다. 대구를 대표하는 인물을 대라면, 열이면 열 모두 그들을 꼽았다.
그들은 대구와 경북 지역이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의 본산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해방 후 대구가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렸다고 했더니, 다들 설마 하는 표정이었다. 미군정의 실정에 맞서 대규모 항쟁을 벌인 곳도, 6.25 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이 가장 광범위하게 자행된 곳도 대구였다는 사실에 그들은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박정희를 마치 대구와 동의어인 양 여기지만, 폭압적 유신 정권에 가장 거세게 저항한 곳도 다름 아닌 대구였다. 이른바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당시 사형이 선고된 지 불과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8명 중 3명이 대구 출신이고, 나머지 5명의 고향도 인근 경북과 경남이다. 항일 독립운동의 정신이 독재에 맞선 민주항쟁으로 전승된 것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불의에 항거한 대구의 역사에 숙연해진다면, 신군부의 군홧발에 짓밟힌 5.18에 대해 함부로 왜곡과 폄훼를 일삼지는 못할 것이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5.18의 금언도 대구 등지에서 자행된 숱한 민간인 학살을 감추고 외면해 온 후과임을 지적한 것이다. 시공간을 조금만 넓히면, 대구와 광주의 '핏빛' 역사는 별반 다르지 않다.
대구 아이들이 5.18을 배우기 위해 광주를 찾아온다면 버선발로 나가 반길 일이지만, 그보다 앞서 해야 할 일은 그들이 사는 대구의 역사를 자세히 공부하는 것이다. 그들이 어두운 등잔 밑부터 살피도록 해야 한다. 그런 후라야 최소한 연민의 마음으로라도 5.18의 진실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 외람되지만, 대구 교사들의 역할이 막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