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산성동학의병군이 그토록 점령하려했던 공주의 공산성이다. 이 사진은 30여년 전(동학혁명1백주년) 삼암 표영삼 선생께서 촬영한 것으로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다. ⓒ 동학혁명기념관
공주, 우금티 전투의 서막
"동학농민혁명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였고 가장 큰 피해를 본 통한의 전투가 공주 우금티 대회전이다. 공주는 충청감영이 있는 곳이며, 지리적으로 금강이 서쪽과 북쪽으로 흐르고 동쪽과 남쪽에는 험준한 산이 둘러져 있어 천연의 도성(都城)이었다. 동학의병군 지도부가 공주를 선택한 이유는, 일본군과 관군연합군(아래 관병연합군)을 방어하기에 좋은 천연의 요새였으며, 한양으로 진격하는 중간 거점의 전략적인 선택의 여지가 없던 곳이었다.
일본군을 쳐서 물리치고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보국안민, 척왜창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금티를 기어코 넘어야 했다. 아,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는 우금티 혈전!"
천연의 요새 공주를 점령하라
공주·우금치 전투는 동학농민혁명 1차, 2차 기포에서 최대의 전투지이자 최대의 피해지이다. 현재 과거의 우금치라는 지역 명칭에서 우금티라는 지역 명칭으로 확정되었다. 그래서 우금치(牛禁峙) 전투라는 용어보다는 우금치를 '우금티'라하고, 우금티를 포함해서 공주대회전(公州大會戰, 필자주)이라는 전체를 아우르는 지역 명칭을 사용한다. 공주대회전은 크게 나눠 이인전투, 효포전주, 우금치(아래 우금티)전투로 구분된다.
공주는 충청감영이 있는 곳이다. 공주는 지리적으로 금강이 서쪽과 북쪽으로 흐르고 동쪽과 남쪽에는 험준한 산이 둘러져 있어 천연의 도성(都城)을 이룬 곳이다. 전봉준과 손병희가 공주를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일본군과 관병연합군을 방어하기에 좋은 천연의 요새였다. 두 번째는 한양으로 진격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전략상의 교두보였기 때문이다.

▲논산 소토산 전경이 사진은 드론으로 촬영한 하늘에서 바라본 논산 소토산 전경이다. 전봉준과 손병희의 동학의병군은 소토산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려는 출정식을 갖고 공주를 점령하고 한양으로 직격하려했다. 본 사진은 김선덕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이 제공하였다. ⓒ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산과 들은 동학군으로 가득 차다
전봉준과 손병희의 동학의병연합군은 10월 21일(양11.18) 논산 소토산을 뒤로 하고 거센 폭풍처럼 진격을 거듭하여 노성에 도착하여 공주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때 동학의병군의 모습은 참으로 대단하였다. 우군과 좌군으로 나누어 진군하는 의병들로 논산에서 공주까지 산과 들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이 먼저 공주성을 점유하였고, 이들은 우금티와 공주 일대까지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전략적 시기를 놓친 의병연합군에게 점차 불운이 다가오고 있었다. 초겨울인데도 칼바람 날씨에 비와 눈이 번갈아 내리는 바람에 춥고 길은 질척거리는 악조건이었다.
동학의병군은 10월 23일부터 일본군과 관병연합군을 상대로 공주성을 함락하기 위한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에 앞서 각지의 동학의병군의 잇따른 패배 소식이 전해 오면서 의병연합군 전략에 차질이 빚어졌다.

▲목천 세성산목천 세성산 전경이다. 이 사진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동학군 세성산 전투에서 크게 패하다
동학의병연합군 본대가 논산을 출발할 때와 맞추어, 김용휘, 김성지, 김화성 삼로(三老)가 지휘하는 동학의병군 1500명은 목천을 먼저 장악해야만 했다. 이는 일본군과 관병연합군을 견제하고 분산시켜 동학의병군의 행보를 가볍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동학의병군은 일본군과 이두황이 이끄는 토벌군의 공격을 받고 목천 세성산전투에서 10월 21일 크게 패하고 말았다. 세성산전투에서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이두황의 토벌군과 청주의 관군이 세성산에 웅거한 의병군을 포위 공격하였다.
동학의병군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본군과 관군의 신식 무기에 의한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일본군의 개틀링 기관포와 쿠르프 대포, 스나이더 자동소총, 무라타 자동소총 등 각종 최신식 무기들이 불을 뿜었다. 이들 최신식 무기들은 폭발력과 파괴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었으며, 1~2천 미터를 날아가 한꺼번에 많은 의병들을 살상하였다.
동학의병군은 시천주 주문을 외우고 몸에 붙인 궁을부적에 의지하며 나흘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맞서 싸웠다. 그러나 토벌군에게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하면서 1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김복명 등이 이끈는 동학군은 대패하였다. 피가 성을 씻으며 흘렀고, 시체가 성안에 가득하여 '시성산'이라 할 정도로 처참한 항전이었다.

▲홍천 동학혁명군위령탑1977년 홍천 자작고개에 세워진 동학혁명군위령탑니다. 본 사진은 삼암 표영삼 선생께30여년 전(동학혁명1백주년)에 촬영한 것으로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다. ⓒ 동학혁명기념관
동학군 홍천 자작고개 전투에서 패하다
전봉준 대장과 손병희 통령은 21일 목천 세성산 전투 참패에 이어, 10월 22일 홍천 자작고개전투에서도 1천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는 보고를 받고 큰 충격에 빠졌다. 동학의병군 2천여 명이 며칠 사이에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는 급보는 동학의병군의 전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소식이었다.
전봉준 대장과 손병희 통령은 10월 23일 노성에서 비밀리에 만나 전략을 숙의했다. 불운한 소식을 전해 들은 전봉준 대장과 손병희 통령은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특히 손병희 통령은 세성산과 자작고개의 패배 소식을 듣고 가슴 아파했다. 그곳의 패배는 전략의 손실이기도 하지만 최시형 법헌의 제자이자 깊은 인연으로 맺어진 사이라 2천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는 사실이 해월 선생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었다.

▲동학군 유적지 이인10월 23일(음) 손병희 부대가 점령한 이인 전경이다. 이 사진은 삼암 표영삼 선생께서 30여년 전(동학혁명1백주년)에 촬영한 것으로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다. ⓒ 동학혁명기념관
손병희 통령, 이인을 점령하다
첫 번째 공주전투는 10월 23일(음) 전봉준 대장이 이끄는 우군과 손병희 통령이 이끄는 좌군의 동시다발적인 공격으로 시작된다. 전봉준 부대는 노성에서 경천을 경유하여 효포로 진격했다. 손병희 부대는 노성에서 이인으로 진격했다. 손병희 부대는 산천이 쩌렁하도록 함성을 지르고 주문을 외우면서 이인을 일거에 점령했다.
스즈키 아키라의 반격과 손병희의 승전
그러나 이인을 함락한 동학의병군은, 일본군 소위 스즈키 아키라(鈴木彰령목창)가 이끄는 1개 소대병력과, 성하영과 구완희가 이끄는 관병연합군에게 반격을 받고, 인근 취병산으로 후퇴했다. 이인과 취병산을 사이에 두고 손병희의 동학군과 일본군, 관병연합군은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수차례 펼쳤다. 결국 일본군은 재빠르게 후퇴했으며, 관병연합군은 백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동학의병군에게 쫓겨 도망쳤다. 이인전투에서 손병희 통령의 동학군은 첫 승리를 거두었다.

▲효포마을 전경우름티 전투의 서전이 벌어졌던 효포마을 전경이다. 이 사진은 30여년 전(동학혁명1백주년) 삼암 표영삼 선생께서 촬영한 것으로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다. ⓒ 동학혁명기념관
전봉준 대장, 효포에서 승리하다
전봉준 대장의 우군은 23일 효포를 기습하면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효포를 지키던 홍운섭과 구상조가 이끄는 관병연합군의 주력부대가 밤을 이용해 금강을 건너 대교리 일대의 동학의병군을 공격하러 출동한 틈을 놓치지 않고, 전봉준의 동학군이 급습을 하였다.
그 결과로 잔여 관병연합군을 섬멸하고 대포와 소총을 거두었다. 이때 전봉준의 전략은 일본군과 관군이 충청감영을 방어선으로 삼았던 공주시가지 외곽을 둘러싼 산줄기를 포위하는 전법이었다.
그러나 23일 손병희의 좌군에게 패주한 성하영의 부대와 백낙완의 관군이 전봉준 부대의 진격을 차단하고자 포와 소총을 쏘아대며 우수한 화력을 내세워 막아 나섰다. 동학의병군과 관병연합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해가 질 때까지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이규태 선봉장의 발 빠른 대응
전봉준과 손병희의 동학의병연합군이 본격적으로 공주 공격에 나서자, 이규태 관병연합군 선봉장은 납다리(납교) 뒷산에 올라가 양쪽의 전투를 세밀히 관찰하였다. 이규태는 수하 참모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동학군이 건너편 산봉우리에 깃발을 꽂고 병풍처럼 둘러 있는데 그 군세가 수십 리에 뻗쳐 있고, 또 해가 저물어 날이 어두워지므로 공격을 잘못하다간 크게 패할 수 있다. 전투의 형세를 보아하니, 우선 우금티, 금학동, 효포동, 납교후봉 등 여러 곳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여야 한다. 공주 일대를 철저히 수비하라!"
일본군과 관군의 전략
이규태 선봉장의 명령이 떨어지고, 전령들이 신속하게 움직이면서 10월 24일의 공주전투는 밤을 맞이하여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전봉준과 손병희의 동학의병군 역시 나흘간의 전투로 피로와 허기에 지쳐 하룻밤 휴전에 들어갔다.
동학의병군이 야밤에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일본군 독립후비보병 19대대 1중대(서로군) 모리오 마시카즈 중대장과 이규태 중군 선봉장이 극비리에 전략을 논의했다.
모리오 마사카즈 중대장은 '일본군 밀정에 의하면, 내일 새벽 전봉준 부대가 웅치를 공격한다. 나와 일본군은 구상조 영관과 합류하여 동학당을 공격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규태 선봉장은 '조선군 첩보원들도 그리한다고 보고했다. 내 작전은 조병완 대관이 북쪽에서 동학군 오른쪽을 공격하고, 구상조 영관이 남쪽에서 동학군 왼쪽을 공격하고, 성하영은 병력을 몰아 정면을 공격할 것이며, 곧 대교에서 돌아오는 홍운섭 부대가 가세하는 것으로 전략을 세웠으면 한다.'라고 하였다.
일본군의 하수인이 된 관군의 처지
모리오 마사카즈 중대장과 이규태 선봉장은 서로간의 주도권과 전략에 대해 마찰이 시작되었다. 이규태는 '전력이 우세한 일본군이 정면을 같이 공격해야지 왜 측면 공격을 하는가'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모리오 중대장은 '지금 일본군과 관병연합군의 최고사령부는 히로시마 대본영이다. 조선군은 이미 일본군 예하 부대로 편성되었으며, 작전 지휘권도 우리에게 있다. 이러한 군 체제는 일찍이 조선 임금도 인정하고 특명을 내린 상태다. 앞으로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면 즉각 체포하여 군법으로 다스리겠다'고 윽박질렀다.
모리오 마사카즈의 말을 듣던 이규태는 피눈물을 삼키며 '아, 조선국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내가 임금의 명령을 받은 조선군 선봉대장인데, 어찌 일본군 대위의 명령을 받게 되었단 말인가!'라고 비통해하였다.
모든 작전은 일본군의 명령으로
이규태와 모리오는 험악한 얼굴로 서로 쏘아보며 다투었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가 우리 백성을 죽이고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게 바치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이 아닌지, 이규태는 순간 망국의 서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어찌하랴, 결국 이규태가 모리오에게 고개를 숙이고, 웅치전투에서 우금티 대회전까지 일본군과 관병병합군의 방어 전략과 군부대 배치 등은 일본군의 주도로 작전계획을 마쳤다.
전봉준, 웅치를 공격하라
두 번째 공주전투는, 전봉준의 동학의병군이 10월 25일 새벽부터 비상식량으로 아침 끼니를 때우고, 구식 대포와 화승총 부대를 앞세워 웅치를 일제히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동학의병군의 공격에 대한 정보를 미리 파악한 일본군과 관군은 작전대로 동학군의 정면과 좌우 측면을 공격하는 전법으로 우수한 무기들을 앞세워 강력하게 맞서며 방어선을 지켰다.
일본군과 관병연합군은 동학의병연합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켜 동학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동학의병군은 곧 닥쳐올 엄동설한을 피하기 위해 가능한 한 공격을 서둘러야 하는 입장이었다. 동학군은 공주 공방전에서 처음에는 우세했으나 갈수록 불리한 상황을 맞아 타격을 입고 경천으로 후퇴하였다.

▲당진 승전곡전봉준 대장과 손병희 통령이 공주굥격에 맞추어 호서동학군은 운산 여미벌에 집결하였다. 일본군이 공격해오자 승전곡에서 싸워 대승하며 격퇴시켰다. 이 사진은 삼암 표영삼 선생께서 30여년 전(동학혁명1백주년) 촬영한 것으로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다. ⓒ 동학혁명기념관
박인호 대접주, 당진 승전곡에서 대승
불행 중 다행이라 할까, 10월 24일(양11.21) 박인호 대접주의 지휘하에 만여 명의 내포지역 동학의병군이 당진 승전곡(승전목)에서 일본군과 관군 수백 명을 크게 물리친 승전하였다. 또한 27일(양11.24)에 동학의병군이 관작리 전투에서도 관군과 민보군 등 수천 명을 크게 무찔러 동학의병군 사기 진작에 큰 영향을 주었다.
김개남, 금산을 점령하다
한편 전주에 머물던 김개남은 전봉준과 손병희의 공주전투 소식을 접하고 기병하여 북상(北上)을 시작하였다. 그는 청주로 진격하는 계획에 따라 10월 24일 금산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전봉준은 전령을 손화중에게 재빨리 보내어, 김개남 부대가 공주전투에 합류하면 후방이 불안해질 것을 대비하라 하였다.

▲손화중 장군이 도소(집강소)를 설치했던 고창 괴치리 마을 전경1894년 손화중 대접주가 집강소(도소)를 설치했던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마을 전경이다. 1894년 2차 동학농민혁명 즉 일본군에 맞서 10월 이후 고창 동학군들은 이곳 도소(집강소)에서 광주로 출동했으며, 나주 수성군과 싸운 침산전투에도 이곳에서 출동했다. 다시 말해 손화중 장군의 본거지라 할 수 있다. 손화중 집강소(도소)의 위치는 사진 좌편 검은 기와집 앞 비닐 하우스 자리이다. 본 사진은 오래 전에 삼암 표영삼 선생께서 촬영하였고 또 위와 같은 설명을 붙였다. 고창군과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전북특별자치도 '손화중 동학도소터(집강소터)기념물 고시 즉 기념물 지정과 복원에 나서 주었으면 한다. ⓒ 동학혁명기념관장
손화중, 고창 집강소에서 출발 최경선과 나주를 공격하다
전봉준은 손화중에게 동학의병연합군이 논산을 출발하면 나주를 먼저 공격해서 후방을 튼튼히 하라는 작전 지시를 내렸다. 손화중 장군은 고창 괴치리 동학도소(집강소)에서 출발 최경선 장군과 10월 21일 나주를 공격했다. 전봉준 대장과 손병희 통령은 11월 초 경천과 노성 일대에서 동학군을 재정비 하고 공주성 점령을 위한 진군 준비를 마쳤다. 이때 전봉준은 어느 유명한 점쟁이가 '전녹두는 경천을 조심하라는 점괘가 나왔다'고 조심하라는 말이 있었으나,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황해도 해주성동학군이 10월 25일(양11.22)부터 11월 4일까지 9일간 해주성(海州城)을 점령했다. 황해도 동학군은 임종현(林宗鉉) 대접주가 주도하였고 김구(본명 김창수)접주 등이 적극 동참하여 이뤄낸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대사건이다. 이 사진은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다. ⓒ 동학혁명기념관
김구, 황해도 동학군 해주성을 점령하다
공주지역에서 동학의병군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뜻밖의 사건이 일어난다. 황해도 동학의병군이 10월 25일(양11.22)부터 11월 4일까지 9일간 해주성(海州城)을 점령했다. 해주성 점령은 전라도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것에 못지않은 엄청난 사건이다.
황해도 동학군은 임종현(林宗鉉) 대접주가 주도하였고 김구(본명 김창수)접주 등이 적극 동참하여 이뤄낸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대사건이다. 황해감영의 행정문서를 모두 소각하고 감사와 수령 등을 새로 임명하였다. 이는 친일 조선정부에 대해서는 혁명적이었고, 일본에 대해서는 척왜항전의 독립운동성격이 강했다.
해미와 매현의 동학군 패전
그런데 11월 6일쯤 불운한 소식도 전해졌다. 해미에 주둔해 있던 내포 동학의병군이, 가야산 일락치 방향으로 진입한 이두황 부대의 기습 공격을 받고 패전하였으며, 매현의 동학의병군도 관병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패하였다.
전봉준과 손병희 주력군 총공격
전봉준의 동학의병군 1만여 명과 손병희의 동학의병군 1만여 명은 11월 8일 좌·우 2대의 임무로, 미시未時(1-3시)에 세 번째 공주 공략을 시작했다. 동학군은 일제히 시천주 주문을 외우고 산천이 울리는 함성과 함께 구식 대포를 쏘아대며 화살과 총탄을 퍼부었다.
동학의병군은 바람에 휘날리는 오색기를 앞세우고 판치와 이인의 관군을 공주 쪽으로 거세게 몰아붙였다. 이때 동학군의 전략은 경천에서 판치를 향해 올라가며 공격하고, 노성의 뒤 봉우리를 타고 오르며 돌진하고, 오실산 쪽으로 이인의 후방을 포위하는 작전이었다.
전봉준이 지휘하는 동학의병군의 대대적인 진격과 공격으로, 판치를 방어하던 구상조의 관군은 일방적으로 밀리며 패하여 효포와 웅치로 후퇴하였다.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의병군은 이인을 방어하던 성하영의 경군을 일거에 포위하여 파상적 공격을 가했다. 성하영 부대는 제대로 반격도 못하고 밤이 돼서야 퇴로를 뚫어 10리쯤 떨어진 우금티까지 도망치며, 동학군의 끈질긴 추격과 공격으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과 관군의 후퇴전략
그런데 1, 2차 공주전투에서 일본군은 관군을 돕는 척만 하고 특히 3차 전투에서는 자취를 감추고 보이지도 않았다. 일본군은 모두 우금티 전투를 대비하여 철저한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관군 역시 시간을 끌면서 우금티 쪽으로 후퇴를 거듭하였다. 일본군과 관군의 이러한 비밀 전략은, 11월 9일 1차 우금티전투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일본군은 완벽한 작전을 세우고 우금티 일원에 서양식 군대 조직과 훈련을 받은 독립후비보병 19대대 2중대 모리오 부대를 배치했다. 당시 독립후비보명 1개 중대 병력의 숫자는 약 240 명이었는데 80여 명은 홍주(홍성)전투로 보냈고, 150여 명을 최신 무기로 무장하여 배치했다.
또한 일본군에게 무기를 공급받고 군사훈련을 받은 조선 경군의 정예 군사 8백여 명과 충청감영군 5백여 명, 민병·민보군 등 우금티 일대에 많은 병력이 집중 배치되었다.
동학군의 전략무기는 일본군에게 크게 밀렸다.
우금티 일대에 투입된 동학의병군의 병력은 전봉준·손병희의 주력부대 2만여 명 과 또 공주일대에서 광범위하게 참여한 숫자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 그러나 숫자에서는 우세하였으나 무기에서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동학의병의 무기는 관군에게서 노획한 회전식 기관총과 소총이 약간 있었고, 구식 대포 몇 대와 화승총 몇 백 자루가 전부였다.
더구나 대부분 동학의병은 죽창이나 농기구로 무장하였다. 동학의병군이 최신 무기를 갖춘 최강의 일본군과 조선의 정예 군사인 경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에는 애초부터 한계가 있었다.
크게 패하고 크게 승리하리라
최신식 무기로 무장하였고 서양식 군조직과 훈련을 받은 동아시아 최강의 일본군, 일본군에게 훈련을 받은 신식 무기로 무장한 경군 및 관군들(관병연합군), 동학의병군은 주로 농민들로 구성되었으며, 무기는 관군에게 빼앗은 구식 소총과 대포, 주로 죽창으로 무장하였다.
더구나 눈보라 치는 혹한의 겨울은 다가오고, 전략적 선택지 공주성은 일본군과 관군이 선점하여 동학의병군으로서는 최악의 상태였다. 그래도 어찌하랴! 목숨 걸고 싸워 일본군을 몰아내고 정부를 개혁하여 올바른 자주독립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큰 패배가 예상되지만 일본과의 대전쟁에 모든 것을 걸게 된다.
이러한 절대 불리한 상황을 예감하고도 일전을 불사한 동학군에게 후대 사람들은 '크게 패하고 크게 승리하였다'는 전사들의 용기를 높이 평가하였다.
일본군, 동학군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
동학군에게 불리한 상황이 생각지도 않는 곳에서 발생했다. 지난 황토현 대회전 뒤 일부 보부상과 민보군 출신이 관군에게 등을 돌리고 동학군 밀정 노릇을 하였다. 그런데 공주대회전 전후에 그들은 다시 동학군에게 등을 돌리고, 일본군과 관군의 밀정 노릇을 하였다. 대세가 기울면 밀정들도 이익에 따라 변절하는 모양이다. 이들 밀정들 때문에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의병군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 환히 알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