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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사진이 이메일이라면 필름 사진은 손편지 정도로 여기며 천천히 세상을 담습니다. 여정 후 느린 사진 작업은 또 한 번의 여행이 됩니다. 수평 조절 등 최소한의 보정만으로 여행 당시의 공기와 필름의 질감을 소박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사진 하단에 사진기와 필름의 종류를 적었습니다.
대학 시절 일 년에 한두 번 집으로 내려가던 여정은 참 길었다. 기찻길 위에서만 다섯 시간 반을 보내야 했다. 그 시간이 지루하다거나 싫지는 않았다. 철로를 때리는 리드미컬한 소리, 가끔 규칙성을 깨며 심하게 덜컹거리는 차체, 책을 잠시 읽었다가 음악을 들었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그러다 문득 쓸데없는 의구심에 빠졌던 적이 있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에 대한 것이었다. 멈춰 있을 때는 그저 그런 풍경들이 기차가 출발하고 관자놀이 뒤편으로 사라지게 되면 갑자기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하염없이 바라보고 넋을 잃고 응시하며 그 이유에 대해 골몰했다.

당시 내렸던 결론은 '무의식적 그리움'이었다. 눈앞에 존재하던 것이 나의 시공간에서 사라져 갈 때 인간의 내면에서 본능적으로 발현되는 아쉬움으로 인하여, 순식간에 아름다운 광경으로 보정되고 왜곡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이었다.

사진을 취미로 갖게 되고 10여 년의 시간 동안 생긴 약간의 경향성에도 그러한 무의식적 그리움이 반영되었는지, 새로 생겨난 것들을 담기보단 사라질 것들에 좀 더 눈길이 갔다. 몇십 년 뒤면 사라질 것 같은 작은 마을 어귀에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인간 삶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흑백 필름에 담아 본 철거 예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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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다니던 식료품점을 다른 길로 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재개발을 앞둔 철거 예정 주택가를 관통하게 되었다. 현수막에는 8월까지 이주를 마치는 것으로 적혀 있었는데 12월이 다 지나가는 지금에도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무와 미나리, 작은 대구를 하나 사들고 집에 와 아침밥을 지어먹은 뒤, 주섬주섬 카메라를 챙겼다.

마침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필름이 단 한 통도 없었다. 오히려 잘 되었다 생각하며 냉동실에 쟁여놓은 흑백필름을 꺼냈다. 유통기한이 오래 지나면 지날수록 필름에 맺힌 상은 거칠어지고 왜곡된다. 일부러 이런 효과를 노리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이번에 사용한 BW400CN이라는 필름은 단종된 지 꽤 되어서 더 이상 구할 수도 없다. 해외 직구로 용케 살 수 있다 하더라도 유통기한이 남아있는 제품은 없을 것이다. 스무 개 정도 남아있는 것을 다 쓰면 앞으로 다시 사용하기 힘들 것이다. 몇 달 뒤면 없어질 골목을 찍기에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필름이 아닌가.

 철거 예정
철거 예정 ⓒ 안사을
 이사갈 때 내놓은 듯한 가구들
이사갈 때 내놓은 듯한 가구들 ⓒ 안사을

걷다 보니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인지, 사람이 살지 않는다면 저 개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 것일까. 소리가 이끄는 곳으로 가 보았다. 우렁차게 짖던 개는 하얀 털과 순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지 언제 짖었냐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작은 마당에는 아직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아직 이주가 완료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시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이 난 자리가 명확하지 않았다. 어떤 집은 진즉 폐허가 됐고 어떤 집은 아직도 대문이 종종 열리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집에 하나 이상의 사연이 있을 것이고 어떤 집은 행복하게 이사를 하고 어떤 집은 정든 터전을 억지로 떠나야 했을 것이다.

아직도 정갈하게 살고 있는 어떤 가족은 이 겨울과 함께 곧 이 골목에서 다른 곳으로 집을 옮길 것이다. 일반적인 이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만 옮기는 것이 아니라 집과 마당, 담장과 골목이 모두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다. 살던 곳이 사라진다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어느 날 진안 망향의 광장에서 용담호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던 어르신이 떠올랐다.

 뒤에 보이는 아파트도 얼마 전 재개발로 세워졌다.
뒤에 보이는 아파트도 얼마 전 재개발로 세워졌다. ⓒ 안사을
 '버림'이라는 두 글자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버림'이라는 두 글자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 안사을

이 마을의 소실을 위해 이곳 사람들이 나누었을 수많은 대화를 생각해 본다. 자극적인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고성과 폭력이 난무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보다는 오히려 애환과 그리움이 묻어나는 이야기가 많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아이는 이곳에서 어른이 되었고, 누군가는 젊음을 지나 백발의 노인이 되었을 것이다.

단층의 작은 집들이 헐리고 높다란 아파트가 들어선다 하더라도, 이곳에서 사람들이 나누었던 소박한 사랑과 따뜻한 나눔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양은 차가운 콘크리트 빌딩이라 할지라도 담장 너머로 넘쳐흐르던 웃음과 정이 끈끈한 땅의 기운으로 남아, 다시 들어올 사람들의 삶에 계속 좋은 영향을 주었으면 좋겠다.

 근처 다른 마을
근처 다른 마을 ⓒ 안사을

전주천을 넘어, 여전히 복작거리는 다른 마을을 잠시 거닐었다. 이곳도 언젠가는 변할 것이다. 인구 소멸로 텅 빈 마을이 될지, 재개발을 통해 다른 모습으로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단지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낮은 지붕 아래서도 참 행복하길, 쌓아 온 아름다운 마음들이 후대에도 잘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필름사진#흑백필름#재개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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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인 '고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필름카메라를 주력기로 사용하며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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