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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도교도원 제1회 입학기념 촬영(성균관 명륜당, 1949.3.8.). 앞줄 가운데부터 차례로 정인보·김구·김창숙 선생이다.
유도교도원 제1회 입학기념 촬영(성균관 명륜당, 1949.3.8.). 앞줄 가운데부터 차례로 정인보·김구·김창숙 선생이다. ⓒ 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정인보는 1945년 8월 꿈에도 그리던 조국광복을 맞아 <순국선열 추념문>을 발표하여 순국지사와 생존지사들을 추념하였다. 내용이 절절하여 전문을 싣는다.

우리 국조(國祖), 형극을 개제(開除)하시고 정교(政敎)를 베푸신 뒤로 면연(綿延)함이 거의 5천 년에 미치는 그 동안 흥패의 고(故)가 어찌 한두 번이리요마는, 실상은 한 족류(族類)로서의 대승(代承)이요, 혹 외구의 침탈함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지역이 일구에 그쳐 환(桓)·해(解)·고윤(古胤)의 내려오는 통서(統緖)는 언제나 엄연하였었나니, 우리 몸소 당한 바 변란이야말로 사상에서 보지 못하던 초유의 참(慘)이라.

광무·을사를 비롯하여 정미를 지나 융희·경술에 와서 드디어 언어 끊이니, 그 참담은 오히려 둘째라, 기치(奇恥)와 대욕(大辱)이 이에 극함을 무엇으로 견딘다 하리오. 이러한 가운데 일도찬란(一道燦爛)한 국광(國光)을 일으켜 민중으로 하여금 치욕의 일에 긍부(矜負)와 비참의 기(期)에 분발을 끊임없이 가지게 함이 과연 누구의 주심이뇨. 우리는 이에서 을사 이후 순국하신 선열 제위를 오매간(寤寐間) 잊지 못하나이다.

그 동안 일구(日寇)가 이 땅에 육량(陸梁)함이 오래라. 감이라 독이라 하여, 패퇴하던 날까지 강산민인을 저들은 저의 점제하(占制下)에 두었던 듯이 알았을 줄 아나, 우리 선열의 피로써 적과 싸워온 거룩한 진세(陣勢), 41년의 1월을 관철하여 몸은 쓰러져도 혼은 나라를 놓지 않고, 숨은 끊어져도 뜻은 겨레와 얽매이어, 그 장하고 매움을 말할진대 어느 분이 최후 천읍지애(天泣地哀)할 거적(巨迹)이 아니시리오.

인(刃)에 절(絶)하였거나, 약에 운(殞)하였거나 다같은 국가독립의 발발(勃勃)한 탱주(橕柱)요, 척수(隻手)의 거(擧)이나 일려(一旅)의 전(戰)이나, 모두가 광복 달성의 열렬한 매진이요, 역중(域中)에서 기구하다가 맹지(猛志)를 뇌옥(牢獄)에 묻거나 해외에 전표하면서 고심을 노봉(虜鋒)에 끝마치었거나, 다 항적필사(抗敵必死)의 강과(剛果)한 결정이니, 개인과 단체, 자살과 피해가, 불일(不一)한 대로 내어뿜는 민족적 망릉(芒稜)은 일찍 간헐(間歇)됨을 보지 못한즉, 이 피가 마르지 아니함에 적과 싸움이 쉬인 적 없고 이 싸움이 쉬지 아니함에 이 땅에 마침내 적의 전거(全擧)로 돌아갔다고 이르지 못할 것이라.
1935년 동학과 함께  1935년 8월 동학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 왼쪽부터 손진태, 이훈구, 정인보, 유진오다. 유진오는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설립에 관여하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이 초대 관장 손진태 앞에 '보전관장'으로 유진오를 표기하는 건 이 때문이다. 유진오가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건립 과정에 관여했지만, 초대 도서관장은 손진태가 맡았다.
1935년 동학과 함께 1935년 8월 동학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 왼쪽부터 손진태, 이훈구, 정인보, 유진오다. 유진오는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설립에 관여하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이 초대 관장 손진태 앞에 '보전관장'으로 유진오를 표기하는 건 이 때문이다. 유진오가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건립 과정에 관여했지만, 초대 도서관장은 손진태가 맡았다. ⓒ 민속원

그러므로 우리 41년을 통하여 일구의 역(役)이라 할지언정 하루라도 피의 시대라 일컬을 수 없음은 오직 순국선열들의 끼치신 피향내가 이곳의 주기(主氣)되어 온 연고니, 이 여러분 선열이 아니었던들 우리가 무엇으로써 원구상(圓球上)에 서리오. 삼천리 토양 알알 그대로가 이 여러분 열혈의 응체(凝體)임을 생각하매 구한신감(舊恨新感)이 가슴에 막혀 어찌할 줄을 모르겠나이다.

교구(狡寇), 대로전승(對露戰勝)의 여위(餘威)를 가지고 오조의 협약을 떠는 것이 어젠 듯하오이다.

국보(國步)는 기울고 대세는 가, 앞길의 암흑이 그즈음을 알 수 없는 그때, 저 주근뉴유(周勤紐由)의 구원(久遠)한 정기 몇몇 분의 선혈로조차 다시 솟아나 안으로 폐부의 중망(重望)과, 원로(元老)의 수의고고(守義枯槁)하던 구신(舊臣)과 격앙한 위사(衛士)와 강개한 미관(微官)과 임하유문(林下儒門)의 기덕(耆德)들의 순열이 서로 이었고, 밖으로 주차사신(駐箚史臣)의 사절(死節)이 국문(國聞)을 용동(聳動)하였으며, 각 지방으로 의기(義旗) 곳곳에 날려 과혁(裹革)의 시(尸)와 냉산(冷山)의 혼과 피집불굴(被執不屈)의 장사, 다 적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며, 헤이그의 의성(義聲)이 내외를 흔들매 미쳐 국민마다 강혈이 끓는 중 - 양위의 핍(逼)을 뒤이어 군대의 해산을 보게 되던 날 굉렬한 대장의 자포(自砲)가 조국 광복의 활훈(活訓)이 되매 죽어도 겨누라는 명명(明命)이 되어 마침내 시가일전의 혈성(血腥)이 영구한 민지(民志)의 보람으로 빛나매, 무릇 군장을 신상에 걸은 이거의 의려(義旅)로써 결합되지 아니함이 없고 학사명환(學士名宦)이 함께 고기(鼓旗)를 잡아 비록 형세 단약(單弱)하나마 자못 운흥(雲興)함을 보았나니, 이에 창이 부러질수록 의(義) 더욱이 굳고 몸이 적에게 잡힐수록 정신은 갑절이나 활발하였거니 옥중에 황야에 어느 뉘 어귀찬 전망(戰亡)이 아니오리까.

난적을 치려다 오중(誤中)하여 의구(義舊)만이 상(喪)함을 애달파함도 그 어름이어니와 하얼빈에서 구적의 원흉을 사살하던 장거(狀擧)는 지금껏 남은 늠연(凜然)이 있나이다. 국변(國變) 당시 조야를 통하여 열절(烈節)이 계기(繼起)한지라, 수토(守土)의 장리(長吏)를 비롯하여 구원에서 간정(艱貞)을 지키던 이, 국교(國敎)로 민지를 뭉치려던 이, 석학문호 고사 단인(端人), 기근(畿近)으로 산반(散般) 중경(重卿)에 미쳐 선후하여 구명(軀命)을 버리어 사적의 열(烈)을 밝히셨나이다. 을사년부터 경술에 미쳐 국보 이미 기우는 것을, 대세 이미 가는 것을, 저렇듯이 주검으로 붙드시려 하였으니 기우는 것은 기울고 가는 것은 가, 최후에 이르게 된 일면(一面) 붙드신 그 힘은 그 속에서 강고하매 한 번 상난의 최후를 넘자 하경(下傾)하던 파도를 휘어돌려 다시 흉흉하기 시작하매 광복의 일로가 바로 전 민중의 분추(奔趨)하는 바 되었나이다.

이에 앞서부터 만주 남화(南華) 원(遠)으로 미(美), 근(近)으로 노(露)에 지사의 종적이 분포하더니 다시 그 규모를 굉활히 하매, 혹 단결하여 군려를 배진(倍振)하고 혹 규합하여 당륜(黨倫)을 증장(增長)하고 혹 단신으로 고행(孤行)하여 좌원우응(左援右應)하는 그 행사 또한 백난을 충모(衝冒)한 바라, 내외호류(內外互流)하는 기다의 열현(烈賢) 속에 전 민중의 지의(志意)가 불타듯이 뜨거워가다가 기미 3월에 와서 충일의 표로가 독립만세로 터지자, 여기서들 대한민국을 내세우고 임시정부를 만들어 오늘에 이름이 하나로부터 만억에 이르기 다 선열의 물려주신 바임은 천추하에도 유몌(濡袂)의 누(淚)를 자아낼 줄 아나이다.

기미 이후는 우리의 운동이 가장 강하여지니만큼, 만세 소리에 응집하던 그때부터 농촌·시장·교회·부인·노년을 나눌 것 없이 앞에서 넘어진 채 뒤에서 밀고 나와 혈풍혈우(血風血雨)가 전토를 휩쌌었으니, 고선민(古先民) 임전무퇴의 계(誡) 이에 재흥함을 이를지라 피 헛되이 쌓이지 않고 하늘이 민충을 돌보아 금일 광복의 서색을 국토에서 맞이하게 되었나이다

언제나 순열의 선민은 유국(有國)의 정간(楨幹)이시라 그 가운데도 우리의 과거를 생각하건대, 선열은 곧 국명이시니 왕왕히 일인의 '피'로 인하여 민족의 조소함을 보게 됨이 어찌 도언(徒言)이리까. 저 강호(江戶) 추거(推擧)의 계속적 장도 고국의 사람 있음을 나타냄도 그러려니와 왕자(往著) 상해의 난해 왜구의 방자(方滋)하는 공세, 우방으로 하여금 지한(至恨)을 머금게 하던 때, 우리 의사의 일발이 군추(群酋)를 진섬(殄殲)하여 거국의 원사(援師)보다 오히려 지남이 있어 우리 독립의 대계 격랑같이 노사(怒寫)함을 얻게 되었나이다.

예로부터 지사는 일사(一死)를 가볍게 여기나니, 구태여 생을 사(捨)하고 의를 취하신 데 향하여 비애의 세정(細情)을 붙이고자 하니하며, 더욱이 모두 광복의 원공(元功)이신 바에 무슨 유한이 있으리까마는, 같은 선열이시면서도 혹 현저(顯著)하여 천양(天壤)에 혁혁하기도 하고, 혹 인멸하여 명자(名字)조차 물을 길이 없기도 하니, 전을 행이라 하면 후 어찌 불행이 아니리까, 하물며 무인궁도(無人窮途)에서 고훼(枯卉) 위에 촉루(髑髏)를 굴리어 귀화(鬼火) 번득이고 오작(烏鵲)이 난비할 뿐으로 생전을 차치(且置)하고 사후까지 소조(蕭條)한 이가 많음을 어찌하리오. 설사 이렇게까지는 아니할지라도 군행여진(軍行旅進)하다가 함몰한 이들은 누구며, 유칩역구(幽漐歷久)한 이들은 누구뇨. 다수를 인하여 특저(特箸)가 없는 거기에 일성(日星)과 병수(竝垂)할 열적(烈蹟)이 많으시려니 서자(逝者), 아무리 호연타 한들 살아 있는 우리야 어찌 돌아보아 슬프지 아니하리오.

다시 생각하면 순국선열은 순국으로 일체시니 명자를 가리켜 인아(人我)를 나누려 함은 오히려 사견인 양하여 자위코자 하나, 또 설워하는 바 있으니, 을사 이후 선령이 보고자 하심이 광복이라. 차신의 전전하는 동안 동지로서 간고에 제휴하던 이 가운데도 이미 선열을 따라가신 이 많거늘, 이 날을 어찌 우리만이 보며, 더욱이 만드시던 이는 멀리 아득하고 그 적(蹟)을 습(襲)한 우리, 이 서광을 바라니, 이 느낌을 또 어이하리오. 우리 국외에서 성상(星霜)을 지낸 지 오래라. 그때는 생자를 또한 사로(死路)를 밟아 의기(依寄)하는 바 요직 선열의 혼백이매, 거의 인귀(人鬼)의 격(隔)을 잊었더니 이제 고토(故土)에 들어와 동포 민중의 품에 안기니 와락 차신의 존류(存留)함이 어찌 그리 곽연(廓然)함을 느끼나이다.

들어서면서 곧 미침(微忱)을 드리려 한 것이 오늘에야 겨우 추념하는 대회를 거행하게 되니, 늦으나 오히려 우리의 정을 기탁함직하되 우리 선열게 형향(馨香)이 광복의 완성, 즉 독립의 고공(告功)에 있을 뿐이어늘 이제 여기까지 달함에는 아직 거리 없지 아니할새, 영전에 향하는 육니(衄怩) 자못 무거우나 몇십 년 전 암흑뿐이요, 누망(縷望)이 없던 그때에도 선열은 꺾이지 아니하셨으니, 우리 이제 수성(垂成)의 업에 헌신함을 맹세할 것은 물론이요, 시(時) 금석이 있다 할지라도 민시(民是)는 선열의 유서(遺緖)로부터 내려와 의연할 바니 우선 현하를 들어 선열게 고하려 하며, 여러분 재천하신 영령은 우리를 위하여 경경(耿耿)하실지니, 그 백절불굴하신 의기, 지순지결하신 고조(高操), 민아무간(民我無間)하신 성심, 웅탁맹특하신 용개는 전 민중으로 하여금 효칙(效則)하게 하사, 이로써 태운(泰運)을 맞이하여 위로 국조홍익의 성모(聖謀)를 중신(重新)하게 하시며, 아래로 3천만의 기망을 맞추어 이루게 하소서. (주석 1)

지금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주석
1> 김삼웅, <위당 정인보평전>, 320~330쪽, 채륜, 2016.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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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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