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열기념관에서 찍은 나석주 의사 관련 게시물 ⓒ 김종훈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은 원부였다. 민중의 피와 땀을 빼앗는 흡혈귀였다. 1926년 12월 28일 오후 2시경, 중국인 복장을 한 청년이 서울 남대문 부근의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한 발씩을 던졌다. 먼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하자 재빨리 인근 동척 건물로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였다. 역시 불발이었다.
여기 저기서 일경이 뛰쳐나오자 나석주는 권총을 뽑아 총독부 경부보 등 일본인 7명에게 총탄을 퍼붓고, 운집한 군중에게 "우리 2천만 민중아! 나는 2천만 민중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희생한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분투하였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아라."는 말을 마친 나석주는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자결하였다.
서울의 한 복판에서 대낮에 일제의 조선수탈기관 두 곳에 폭탄을 던지고 일제경찰 등 7명에게 총격을 가한 후 스스로 복부에 총을 쏴 자결한 나석주 의사는 황해도 재령 출신의 의열단원으로 당년 35세였다.
나석주 의거는 이동녕·김구·신채호·김원봉·김창숙·유자명 등 독립운동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과, 임시정부와 의열단 그리고 유림독립운동계열이 연대한 거사였다. 우리 의열투쟁에 이렇게 다양한 인물과 단체가 연계한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을지로 나석주 의사 동상과 의거비 ⓒ 김종훈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192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항일투쟁이 점차 약화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모종의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같은 인식은 의열단도 일치하였다.
김창숙과 이회영은 1925년 봄 내몽골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부지 매입과 황무지 개간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김창숙이 은밀히 귀국하였다. 하지만 모금액이 3천 500원에 불과했다. 그래서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김창숙은 1926년 4월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건너와 김구 등과 만나 청년결사대를 국내로 보내어 친일파를 박멸하고 적의 심장부를 폭파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를 마다할 김구가 아니었다. 김구는 나석주와 의열단원 이화익을 추천하였다.
나석주는 당시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전역한 의열단원이었다. 김구가 국내에서 활동할 때에 황해도 안악에 세운 양산학교 학생으로, 두 사람은 학교설립자와 애제자의 사이였다. 나석주는 이 학교 졸업 후 3·1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에는 동지 5명과 비밀결사 '권총단'을 조직, 원성이 높은 은율군수 등을 처단한 의열청년이었다.
일경의 검거망을 피해 단신으로 탈출한 나석주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와 경무국장인 김구에게 군자금을 전달하고 임정 경호원으로 근무하였다. 얼마 후 김구의 주선으로 하남성 한단 소재 중국군관학교로 파견되어 군사교육을 받고, 중국군 장교로 입관되어 육군강무당에서 복무하다가 전역하였다. 그는 틈이 나면 김구를 찾아와 나라 찾는 일에 쓰임새가 되겠노라 다짐했다.
그리고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그가 의열단원인 유자명의 소개로 약산과 서로 만난 것은 그 이듬해, 곧 1926년 5월 - 천진에서다. 두 혁명가는 서로 만남이 너무 늦었음을 한탄하고, 앞으로 손을 맞잡아 운동에 종사하기를 굳게 언약하였다. 나석주가 의열단에 가맹한 것은 바로 이 때이다." (주석 1)

▲을지로 나석주 의사 동상과 의거비 ⓒ 김종훈
김구와 신채호·김창숙·김원봉이 합작한 거사에 천거된 나석주는 국내로 들어와 의거를 감행하고 순국하였다. 김창숙이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이 소액에 그치고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추진한 거사 준비 과정을 일제 정보문서는 치밀하게 기록하였다.
김창숙은 자금모집에 응하지 않는 부호의 암살을 계획하여 일단 중국에 건너갔다.
그러나 얼마 후 조선에 있는 동지가 검거되었다는 정보를 접하고 둔병제 등의 자구적인 독립운동방법이 바닥부터 무너진 데에 분개하여 중국에 건너간 후 그곳의 의열단원 한봉근과 류우근을 불러놓고 조선내의 유림으로부터 모은 3000여 원 중 1500원을 단의 활동자금으로 제공하기로 약속하고 우선 권총 구입비로 현금 400원을 그들에게 주었다.
한봉근은 이것으로 권총 7정·실탄 490발을 구입하여 정세로에게 보관하도록 하고, 폭탄은 신채호가 보관 중인 2개로 충당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26년 7월 21일 톈진에서 김창숙·류우근·한봉근·나석주·이승춘이 회합하여 흉행을 실행하기 위하여 류우근·한봉근·나석주 이승춘의 4명이 조선으로 가기를 결의하고, 김창숙은 휴대한 현금 1100원을 그들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 후 조선에 들어가는 방법에 관하여 날짜가 걸려 그들은 자금의 대부분을 소비하였기 때문에 나(羅)와 이(李) 만이 조선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우선 나석주가 단신으로 조선에 들어가 이를 거사하였음이 판명되었다. (주석 2)
자결을 시도한 나석주 의사는 거사 후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곧 순국하고, 거사에 큰 역할을 했던 김창숙은 1927년 2월에 밀정의 제보로 일경에 피체, 국내로 압송되어 14년형을 선고 받고 일제 패망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죄목은 나석주 의거 배후조종 혐의였다.
나석주 의사와 함께 거사하기로 했던 이승춘은 베이징에서 일경에 피체되어 15년 형을 받고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승춘을 통해 나 의사가 사용한 폭탄이 소련제이며, 압수한 10연발 권총과 탄환이 스페인제라는 것이 알려져 일경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하였다.
주석
1> 박태원, 앞의 책, 195쪽.
2> <고등경찰요사>, 42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