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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이종암 지사가 의열단 창단 자금을 조달한 대구은행 구 본점 (오른쪽) 이종암 등 여러 지사님들의 모습
(왼쪽) 이종암 지사가 의열단 창단 자금을 조달한 대구은행 구 본점 (오른쪽) 이종암 등 여러 지사님들의 모습 ⓒ 정만진

해외의 독립운동단체가 하나같이 겪은 일이지만 특히 의열단의 경우 재정적인 어려움이 극심하였다. 거사를 준비하는 데는 자금이 필요했다. 폭탄 등 무기구입과 단원을 국내나 일본·중국 여러 지역으로 파견하려면 적지않은 자금이 소요되었다.

총독정치가 강화되면서 국내 거주 애국지사들에 대한 감시가 심해지고 일반 국민들도 차츰 체제순응적인 분위기로 변하여 가면서 여간해서 '군자금'의 마련이 쉽지 않았다.

독립운동가들의 투지는 길이 막히면 터널을 뚫고 적에게 포위되면 몸을 던져 활로를 찾는 것을 본질로 했다. 일제강점기 의열단은 항일투쟁의 전위들이었다. 대부분이 혁명가의 사명을 갖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아나키스트들이기도 했다. 이들은 죽으러 가는 길에 망설이지 않았고 서로 먼저 가겠다고 지원자가 많아 제비를 뽑아 순위를 결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즈음 의열단 본부에서는 일본 도쿄에 결사대를 보내 왕궁과 요로를 폭파하는 전략을 짰다. 그것이 조국해방투쟁에 가장 효과적이며, 폭렬투쟁의 비판론자들에게 암살과 파괴운동의 실효성을 보여주게 된다는 판단이었다.

도쿄 거사에 이종암이 지원하였다. 그는 먼저 국내로 들어와서 군자금을 마련하여 단독으로 일본에 건너가 거사를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1925년 7월 11일 단신으로 입국했다. 폭탄 2개와 권총 및 탄환 50발, 혁명선언서 100매를 가지고 자금만 여의하면 일본으로 직행할 결심으로 만반의 준비를 해가지고 잠입했다.(…) 밀양으로 가서 몇 동지를 만나봤다. 첫 번째 총공격 때 검속되었던 동지들은 대개 출옥되어 있었다.(…) (주석 1)
 밀양독립운동기념관 뜰에 있는 고인덕 선생 등 독립운동가의 흉상.
밀양독립운동기념관 뜰에 있는 고인덕 선생 등 독립운동가의 흉상. ⓒ 윤성효

이종암은 옛 동지들을 은밀히 만나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군자금의 모금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대구에 있는 본가에 들렸으나 아버지는 몇 해 전에 별세했다는 슬픈 소식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달성군의 배공세가 1만 원, 하동군의 박종원이 5천 원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비밀 라인을 통해 10월 15일 이들로부터 군자금을 받기로 한 이종암은 달성군 노곡동 동지 이기양의 별가에서 신병치료를 받았다. 그동안 국경을 넘고 수 백리를 걷느라 몸이 크게 쇠진해졌었다.

그러나 이종암의 은신처에 나타난 것은 군자금이 아닌 일제 경찰이었다. 11월 11일 경북경찰서 경찰관 수 명이 들이닥쳐 무기와 의열단선언문을 압수하고 이종암을 구속하였다. 이때 피검된 사람이 12명, 은밀히 접촉했던 사람 대부분이 붙잡혔다.
그리고 모두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종암은 의열단 활동을 하면서 양건호(梁建浩)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해서 재판기록에는 가명으로 나타난다.

주범자인 양(梁)은 의열단의 금후의 활동에 미칠만한 사항은 어디까지나 진술을 피하고, 겨우 국외에서의 행동과 오늘날까지의 범행으로 공판정에서 드러난 관계사건에 대해서만 마지못해 진술했을 뿐이었다. 특히 1920년 12월 최경학의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사건과 같은 것에 그가 관여했다는 것은 별도로 기술한 바와 같이 그때 그의 행동과 주위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거의 단정하기에 어려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이를 부인하고 있었다. (주석 2)
 이종암의사 어록비
이종암의사 어록비 ⓒ 이승철

검사는 이종암에게 무기형을 구형하면서 "피고 종암은 의열단 부장(副將)으로 대정 6년 국외로 탈출한 후 지금까지 독립운동에만 열중해 왔고 장래에도 할 터이니 이것 한가지만으로도 적어도 10년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것인즉 절대로 10년 이하로 내려오지 않도록 처형하시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구속된 11명 중 9명이 기소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926년 12월 21일 선고공판에서 이종암 13년, 배중세 1년, 한봉인 8개월(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었다. 이에 앞서 구속 중이던 고인덕은 고문에 저항하다가 자결을 기도한 끝에 1926년 12월 21일 옥사하였다.

이종암은 옥중에서 결핵을 앓게되고 1930년 5월에 가출옥 되었으나 한 달 뒤 숨을 거두었다. 사실상 옥사한 것이다. 이종암에 앞서 대구형무소에서 40세를 일기로 옥사한 의열단원 고인덕 지사에 관한 기록이다.

고인덕은 본래 밀양군 밀양면 내2동에서 출생하여, 22세 때,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한 후, 1918년 11월에, 세사의 그릇됨을 보고 개연히 고향을 떠나 만주로 가서, 길림과 상해 등지로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맹렬히 하다가,

기미년에 조선 내지에서 3·1운동이 일어남을 보고, 동지 이종암·김원봉과 모의한 후, 동년 3월경에 다수한 폭탄을 밀양으로 밀수입하여다가 폭파의 봉화를 밀양에서부터 들려 하였으나, 일이 중간에 발각되어, 그것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의 판결을 받고 복역하다가, 1년 6개월 만에 가출옥이 된 후, 얼마 아니되어, 그는 또한 ㅇㅇ사건으로 해외에 특파원을 보낼 때에, 그 여비가 없음을 보고, 가산을 방매하여 3천 원을 만들어 제공하였으며, 그 후, 또한 이번 의열단 사건이 발각되매, 그의 연루인 관계로 오랜 동안 영어의 고초를 받다가, 드디어, 옥중에서 심장마비를 일으키어 그와 같이 영면하였다는 바, 밀양 그의 본집에는, 그의 부인 이복수씨(39)와, 그의 장남 요한(要漢, 13)과 차남 종규(鍾圭, 3)와 딸 둘이 있다 한다.

그의 흉보가 한번 들리매 밀양에 있는 그의 가족은 물론이요, 밀양 청년 수십 명이 일부러 대구까지 와서 망인의 유해를 받아 가지고 돌아갔는데, 그 부인 이씨와 그의 친제 금식 군의 애처로운 울음소리는 멀리 구소(九宵〔편주:구천(九泉)〕)에 사무쳤으며, 유해를 영접하러 온 그의 친우들도 조루(吊淚)를 금치 못하였다더라. (주석 3)

주석
1> 이종범, 앞의 책, 128쪽.
2> <고등경찰요사>, <의열단원 양건호의 자금모집사건>, 413쪽.
3> 이종범, 앞의 책, 22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의열사#의열사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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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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