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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열단원 김지섭(1884~1928) 의사 초상
의열단원 김지섭(1884~1928) 의사 초상 ⓒ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시즈오카·야마나시 지방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다. 간토대진재로 알려진다. 12만 가구의 집이 무너지고 43만 가구가 불탔으며 사망·행불자가 45만 명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태수습에 나섰으나 혼란이 더욱 심해져가자 국민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을 조직적으로 퍼뜨렸다.

이에 격분한 일본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하여 경찰과 함께 조선인을 닥치는대로 체포·구타·학살했다. 이때 희생된 한인이 6천 명 또는 7천 명 등의 설이 있지만, 아직까지도 그 정확한 숫자가 밝혀지지 않았다.

한민족 누구할 것 없이 분개하지 않을 수 없는 일제의 만행이었다. 의열단에서는 즉각 보복응징을 결정하였다.

이때, 왜적의 손에 학살 당한 우리 동포가, 실로 수천 명에 이르는 것이다.
이, 하늘이 또한 크게 성낼 일에, 어찌 사람이 홀로 관대할 수 있겠느냐? 이 소식이 한 번 전하여지자, 민족의 진노는 컸다. 더욱이, 조선의 혁명을 위하여 살고, 조선의 혁명을 위하여 죽기로 맹세한 의열단 동지들의 가슴은 타고, 피는 끓었다.

약산이 바야흐로 보복할 방도를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들리는 소문에 신년벽두, 동경에 의회가 열리고, 조선총독 이하 각 대관이 모두 이에 참석하리라 한다.

도저히 그대로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절호의 기회다. (주석 1)
의열단원 김지섭의 위임장과 순국 전보지.  안동이 고향인 김지섭(金祉燮)은 1924년 일본천황을 폭살할 목적으로 도쿄[東京] 궁성에서 폭탄을 투척했다가 체포되어 1928년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의열단원 김지섭의 위임장과 순국 전보지. 안동이 고향인 김지섭(金祉燮)은 1924년 일본천황을 폭살할 목적으로 도쿄[東京] 궁성에서 폭탄을 투척했다가 체포되어 1928년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 최장문

의열단은 행동에 착수했다.

39세의 안동출신 단원 김지섭(金祉燮)이 지원하였다. 여러 명의 단원을 밀파하여 왕궁과 도쿄시내를 불바다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경비가 없었다. 김지섭은 한 해 전 김시현·황옥 등과 국내 거사에 참가했다가 용케 피신하여 중국 본부로 건너왔다가 이번 거사에 다시 나선 것이다.

1923년 12월 20일, 그는 권총과 폭탄 3개를 품고 상하이 건너 포동부두에서 일본 이쓰이물산 소속 석탄운반선 텐조오산마루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일본으로 향하는 배밑의 석탄 무더기 속에서 12일간이나 악전고투한 후 1923년 12월 31일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일본인 고바야시란 사람의 주선으로 무사히 상륙하게 되자 야하타 본정(本町)에 있는 비젠야란 여관에서 3일을 묵었다. 그러나 곧 여비가 떨어져 회중시계와 담요를 전당포에 잡혀 근근히 여비를 장만하여 동경행 열차를 타게 되었다. 그의 호주머니 속에는 권총 한 자루와 폭탄 세 개가 들어 있었으므로 만약 일경에게 체포되면 자폭할 각오였다. (주석 2)
 의열단원 김지섭 의사의 의거현장인 '니주바시'
의열단원 김지섭 의사의 의거현장인 '니주바시' ⓒ 김경준

김지섭은 제국의회가 연기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왕궁에 폭탄을 던지기로 전략을 바꾸었다. 1924년 1월 5일 저녁, 그는 마침 관광을 온 일본 시골사람 두 명과 일행인 것처럼 가장하고 왕궁 앞 니쥬우바시(二重橋) 사쿠라다문(櫻田門)에 접근하여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니쥬우바시 한복판에 떨어졌으나 불발, 다시 니쥬우바 난간에 올라가 제2탄을 던졌으나 역시 불발, 세 번째 폭탄도 불발탄이 되고 말았다.

그러는 순간 순찰중이던 일경에 피체되었다. 폭탄이 터지지 않은 것은 일본으로 밀항하는 동안 12일간이나 습기찬 배밑에서 녹이 슬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목표에는 실패했지만, 일제가 당한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제국의 성지라는 왕궁 입구에까지 의열단원이 나타나 3차례나 폭탄을 던진 데 대해 경악한 것이다.

현장에서 피체되어 일제 법정에 선 김지섭은 당당하고 의연했다. 왜,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지고자 했는지, 일왕궁을 폭파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단호하고 정연하게 피력하였다.

그는,
"총독의 통치 아래서, 우리 조선 사람들은, 실로, 개나 도야지만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는 말로 위시하여, 중추원의 한갓 괴뢰기관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하고, '동양척식회사가 조선인을 경제적으로 파멸시키려는 횡포'며, '물가등귀의 모순'과, '교육, 사법, 경찰 등 모든 제도의 불합리'를 일일이 실례를 들어 통론하고,

"이 같은 사실은, 일본 안에 있는 일반 일본인들은, 전연, 아지 못하고 있는 일이오. 나는 이것을 한번 알려 주고 싶었소. 물론, 몇 개의 폭탄이 궁성부근에서 터졌다 하여, 일본의 위정자들이, 곧 반성하리라고 믿은 것은 아니오. 그러나 나는, 적어도 일본의 무산대중들이 크게 각성하는 바 있어, 다시는 관리배들에게 속는 일없이, 우리와 함께 손을 맞잡고, 세계평화를 위하여 싸와 주기를 기대하였소."

그리고 최후로,

"우리 조선인은 조선의 독립을 절대로 요구하오.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서는, 이미, 독립선언서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최후의 일인(一人)이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고야 말 것이오." (주석 3)

일제는 1924년 9월 9일 김지섭 의사에게 무기형을 선고하고 이듬해 8월 12일 공소심에서 이를 확정하였다. 김 의사는 당일부터 옥중단식을 벌여 저항하고, 극도로 쇠약해진 몸으로 극심한 고문을 당하여 1928년 2월 24일 지바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주석
1 >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137쪽, 깊은 샘, 2000.
2> 김창수, <항일의열투쟁사>, 155쪽, 독립기념관, 1991.
3> 박태원, 앞의 책, 15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의열사#의열사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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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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