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재 신채호 선생 ⓒ 단재신채호기념관
봉건군주체제인 조선왕조 시대에도 "정승 셋이 대제학(大提學) 하나를 못 당하고, 대제학 셋이 처사(處事) 하나를 못 당한다"고 할 정도로 재야의 올곧은 선비의 위상이 높았다. 조선의 퇴계 이황이나 남명 조식의 위상은 조정의 어느 대신보다 돋보였다. 고려의 화담 서경덕도 이들에 못지 않는 처사이고, 한말·일제강점기의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도 그러하다. 신채호는 충남 대덕군 정성면 익동에서 신광식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을사늑약을 앞둔 1905년 4월, 26세의 단재는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었다. 출세 길이 보장되는 감투였다. 어려서부터 하도 먹어서 진저리가 나는 콩죽 따위를 먹지 않아도 되고 평생 호의호식이 가능하는 '도깨비 방망이'였다. 선배들이 조정의 요로에 포진하고 있어서 얼마든지 요직이 가능했다.
단재는 1년 전(1904) 6월 일본의 간계로 '전국황무지개간허가약안'이 조인되자 학생의 신분으로 위당 정인보 등과 성균관에서 <성토문>을 작성하여 외부대신 이하영 등의 매국행위를 성토한 바 있었다. <성토문>은 조야에 화제가 되었다. 단재는 나라의 운명이 일제의 손아귀로 넘어가려는 위기 앞에 관직에 나아가 일신의 안일을 취하기보다 처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성균관 박사를 내던지고 황야로 나왔다.
<황성신문>의 논설기자가 되었다. 을사늑약을 당하여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을 쓰고 신문사는 문을 닫았다. <대한매일신보>로 옮겨 주필이 되었다. 자신을 성균관으로 이끌어 준 족친의 매국행적에 '충노'라 비판하고 친일의 길을 걷는 친구에게 절교하는 글을 신문에 썼다. 많은 계몽논설을 집필하고, 조정 안팎의 매국노들을 비판하고, 일본 침략주의를 매섭게 성토하였다. 안창호가 주도한 신민회에 참여하여 민주공화제의 세례를 받았다.
단재는 신민회의 결의에 따라 해외에 군사기지를 설치하고자 망명길에 나섰다. 안창호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의 길이 있었으나 학문보다 조국이 먼저였다. 출국 전 안정복의 후손에게서 <동사강목>을 빌려 며칠 밤을 새워 필사하였다.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를 다룬 최초의 통사였다. 망명객이 제 나라 역사책 필사본을 봇짐에 싸들고 나간 사례는 일찍이 듣지 못하였다. 베이징 도서관에서 중국의 <사고전서>를 읽으면서 이 책과 대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단재의 고대사 연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해삼위에서 국치 소식을 듣고, 교민들과 <해조신문>을 발행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펴다가 만주로 건너갔다. 고조선을 비롯하여 고구려와 발해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본격적인 고대사연구에 나섰다. 돈이 없어서 유적·유물을 목측으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단재의 고대사연구를 일부 학자들은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사> 등의 통계·수치·연대 등을 들면서 '실증'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의 저서가 형식상 각주가 없을 뿐이지 각종 문헌과 유적 답사에 의한 실증위에 기초하고 있음을 외면한 것이다.

▲신채호 선생 동상 제막식이 12월 8일 오후 2시 서대전공원에서 진행됐다. ⓒ 임재근
국내에서 3·1혁명에 이어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단재는 충청지역 의정원의원으로 선임되었다.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관직'이었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의정원의원들이 이승만을 임정의 최고 수반인 국무총리로 선임하였다. 그는 1919년 연초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장본인이다.
단재는 강력히 반대한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인데, 이승만은 아직 있지도 않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매국노이다."
이렇게 비판하고 의정원을 뛰쳐나와 임정과는 연을 끊었다. 얼마 후 <이승만 성토문>을 지었다.
임정과 결별한 단재는 신문을 만들어 임시정부를 계도하고 일제와 언론투쟁을 벌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1919년 10월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한다. 신규식·이회영 등이 지원했지만, 거의 혼자 힘으로 신문을 간행했다. "2천만의 해골을 태백산 같이 쌓을지라도 싸우자"는 창간사가 말해주듯 신문의 논조는 격렬했다.
거처를 베이징으로 옮겼다. 이회영·박용만 등 임정의 무장투쟁 주창자들이 대부분 베이징에서 활동하였다. 단재의 본령은 언론인이었다. <황성신문> ⟶ <대한매일신보> ⟶ <해조신문> ⟶ <신대한>으로 이어진다. 국민(교포)을 계몽하고 민족정신을 고취하여 일제와 싸우기 위해서는 신문의 역할만한 것이 없다고 믿었다. 생각 같아서는 베이징에서도 신문을 발행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고 인력도 없었다. 그래서 혼자라도 할 수 있는 잡지를 펴내기로 한다. 1921년 1월 '하늘 북'을 뜻하는 <천고(天鼓)>를 발간했다.
1922년 겨울 의열단장 김원봉의 요청으로 이듬해 1월 상하이로 내려가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을 집필한다. 일제강점기 대일선언문 중 으뜸으로 꼽히는 이 선언문은 단재가 아나키즘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씌여졌다.
언론과 역사연구를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직접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독립운동가들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일제의 밀정이 우글거렸다. 베이징 역시 다르지 않았다. 중국의 수도인지라 밀정 중에서도 고급밀정이 파견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김달하였다. 국내에서 서우학회에 참여하는 등 한 때 민족주의자였으나 변절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북양군벌 단기서(段祺瑞)의 부관직에 있으면서 총독부의 밀정으로 암약한다.
심산 김창숙을 회유하려다 의열단원과 다물단원의 합동작전으로 처형되었다. 다물단은 단재·이회영·김창숙·유자명 등이 조직한 폭렬지하 조직이다. 단재는 다물단 창단 때에 <다물단 선언문>을 지었는데, 아쉽게도 현존하지 않는다.
1920년대 중반기부터 아나키즘에 더욱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일본과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팽창을 지켜보면서 세계관의 변화를 갖게 된다. 그것이 아나키즘이었다.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무련)에 참여하면서 자본·공산주의가 모두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제도라 단정하고 민중직접혁명론을 제시한다.
단재는 민중의 직접행동과 아나키즘을 널리 인식시키고자 잡지 발행의 기금 마련에 나섰다가 대만에서 일경에 피체되고, 대련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일제는 단재를 감옥에 가둬놓고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특별관리 대상인 것이다. 투옥 8년여 동안 그는 성깔만큼이나 매서운 인고와 자제력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노역중 잠간 쉬는 시간에도 차입된 에스페란토문전(사전)을 펴들고 공부하였다. 출감하여 다시 아나키스트운동을 하려면 국제공용어가 될 에스페란토어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출감을 1년 8개월 앞둔 1936년 2월 18일 뤼순형무소는 서울의 부인에게 "신채호 뇌일혈로 위독"이라는 전문을 보냈다. 당시 그는 57세로 태어날 때부터 약골이고 힘겨운 망명생활과 긴 옥고로 많이 쇠약해지긴 했으나 큰 질병을 앓지는 않았다. 질병이 있었으면 부인이나 지인들에게 필요한 약의 차입을 부탁했겠지만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감옥 당국에서 "뇌일혈, 의식불명·생명위독"이라는 전보를 보내고, 며칠 후 유언 한마디 없이 운명하였다. 살해되었을 것이다. 안중근·이회영에 이어 뤼순감옥에서 세 번째 죽음이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