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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현충원의 기산도 지사 묘소. 왼쪽은 의열단 최수봉 지사의 묘소이다.
서울 현충원의 기산도 지사 묘소. 왼쪽은 의열단 최수봉 지사의 묘소이다. ⓒ 정만진

의열단은 부산경찰서 폭파 후 다시 의거의 대상으로 밀양경찰서를 택하였다. 이유는 김원봉 등 다수 단원들의 고향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청소년기 고향에서 일제 경찰의 만행을 지켜보고 들으면서 성장하였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시기에 일본인 경찰간부는 물론 조선인 출신 하급 경찰관의 대민 학대와 일제에 부역하는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분개가 충천하였을 것이다.

또한 총독부 폭파미수 사건으로 밀양출신 의열단원들이 다수 피체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어서, 동지들에 대한 복수심도 작용하였을 터였다.

이 같은 인간적인 감정과 함께, 국내에서 3·1혁명 열기가 점차 식어가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일제에는 여전히 조선민족의 의기가 살아 있음을, 동포들에게는 움츠리지 말고 항쟁의 투지를 불러일으키고자 하여 밀양경찰서 폭파를 시도한 것이다.

1920년 12월 27일 오전 10시 40분경, 경남 밀양경찰서에서는 서장 와다나베 스에지로가 간부 19명을 청사 안 사무실에 모아놓고 연말 특별경계를 당부하는 훈시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폭탄이 터졌다. 첫 폭탄은 순사부장 오른팔에 맞고, 두 번째 던진 폭탄은 골마루바닥에 떨어졌으나 폭발의 위력이 약해서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었다.

폭탄을 던진 사람은 일경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경찰서를 빠져나와 피신하다가 경찰의 추적을 받고 근처 민가에 들어가 부엌의 식도를 꺼내 자기 목을 찔렀다. 뒤쫓던 일본 순사 2명이 쓰러진 투탄자를 붙잡았다. 투탄자는 많은 피를 흘려 실신상태였다.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은 투탄자는 2주 후 간신히 회생하였다.

폭탄을 던진 사람은 밀양출신 의열단원 최수봉(崔壽鳳)이었다. 1894년 3월 3일 밀양군 삼남면에서 태어나 마을에 있던 서당에서 한문과 신지식을 배우고, 1910년 사립 동화학교에 편입하였다. 이 학교에 다니던 2년 동안 전홍표 선생으로부터 나라사랑 정신과 역사 교육을 받았다.
최수봉 의거지 이곳에서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파 의거가 있었다. 현재는 밀양교회 주차장이다. 안내판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최수봉 의거지이곳에서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파 의거가 있었다. 현재는 밀양교회 주차장이다. 안내판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 홍윤호

최수봉은 1913년 평양으로 가서 숭실학교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자주독립의 정신이 강한 고인덕을 만나 사귀고 민족의식을 발양하였다. 고인덕이 7년이나 연상이었지만 나이 차이를 넘어 동지관계를 맺었다.

최수봉은 숭실학교 4년 과정 중 3년만 다니고 중퇴하였다. 더 이상 일본의 식민지 교육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중퇴한 후 평양과 정주에서 광부와 집배원으로 생계를 꾸리면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찾았다. 1918년 만주로 건너가 평티엔(奉天)과 단둥(安東)을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함께할 동지를 찾았으나 여의치 않았다.

1919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밀양에서도 3·1독립만세 시위가 여러 차례 전개되었다. 최수봉도 장터에 나가서 만세를 불렀다. 그 무렵 의열단원 김상윤을 만났다. 이듬해에는 역시 의열단원인 이종암을 만나, 셋이서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기로 뜻을 모았다.

최수봉은 1919년 12월 26일 이종암으로부터 폭탄 2개를 건네 받았다. 그리고 다음날 경찰서장이 직원을 상대로 훈사를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최수봉은 현장에 침투하여 폭탄을 던졌고, 뒤 쫓는 왜경에게 피체되었다.

일제는 최수봉의 재판을 속전속결로 처리하였다. 경찰서 폭발이라는 사건을 가급적 빨리 처리하고자 해서였다. 1921년 2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으나 4월에 열린 2심에서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최수봉은 재판과정에서 당당하게 진술하였다. 왜적의 경찰서를 폭파하지도 못 하고, 자결도 실패한 채 왜적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음이 분하다고 설파하면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거사했음을 거침없이 말하였다. 이런 이유로 1심의 무기형이 2심에서 사형으로 나타났다.

최수봉 의사는 1921년 7월 8일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독립제단에 생명을 바쳤다. 밀양청년회가 준비한 장례식을 일제는 막았고, 장례식을 준비한 관계자들을 잡아들여 조사하였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 막은 것이다. 정부는 1963년 고인의 애국정신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 연구자는 최수봉 의사의 밀양경찰서 폭파의거의 역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밀양경찰서 투탄거사는 돌발적인 것이 아니었고, 혼자만의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때와 곳에서 단신으로 감행된 것임은 맞지만, 그렇더라도 일회성의 개인의거로만 보기보다는 더 큰 시·공간적 및 운동사적 맥락 속에 위치시켜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랬을 때 밀양 지역사의 어떤 단면, 즉 멀게는 사명대사 유정의 의병충렬정신을 이어받는 민족운동 전통과 가까이는 일합사(一合社) 및 (대한)광복회 조직을 통해 은밀히 이어져 온 1910년대 항일독립운동의 기맥, 그리고 그 속에서 움직여간 전홍표·김대지·황상규 등 청년지사들의 동향과 그 좌표들이 의미를 갖고 중요해진다.

또한 그 의거는 석 달 전의 밀양주민 경찰서 습격사건과 연접되는 것이었고, 밀양출신 청년들이 창립을 주도하고 대거 참여한 의열단의 초기 투쟁사, 그리고 그것이 부산·경남의 항일운동사와 접속되던 부분, 즉 '밀양폭탄사건'과 박재혁 의거 역시 그 맥락의 한 부분으로서 중요한 것이다.

의열단의 제1차 국내총공격계획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검거망을 피해 잠행하던 김상윤과 이종암이 최수봉을 의열단원 동지로 만들고 폭탄거사를 추동했으니, 실행은 혼자였으나 기획과 준비는 의열단 차원의 집단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최수봉 의거는 개인단독 거사로 보이지만 기실은 여러 단원이 직접 관여한 '의열단 거사'였던 것이다. (주석 1)

주석
1> 김영범, <1920년 밀양경찰서 폭탄의거의 배경과 전말>,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5호, 197~198쪽, 2015.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의열사#의열사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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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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