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河回) 마을. 낙동강의 물줄기가 큰 ‘S자’ 모양으로 굽이쳐 돌아가는 안동의 핫 플레이스다. 마을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유산’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하회마을은 국보 2점, 보물 5점 등 25점의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 국가유산청
서기 676년 음력 11월. 비록 외세를 끌어들였지만 신라는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동맹국이었던 당나라까지 물리치면서 삼국을 통일했다. 그 후 약 200여 년 동안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며 평화와 번영을 누리던 통일국가 신라는 9세기 후반부터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세력이 강화되면서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이틈을 타고 지방 호족세력을 등에 업은 궁예, 왕건, 견훤 등 변방의 군웅(群雄)들이 할거하며 한반도를 둘러싼 또 다른 패권다툼을 벌인다. 이른바 '후삼국(後三國)'시대의 태동이다.
918년 왕건은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했다. 신라를 가운데 두고 본격적으로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치열한 패권 쟁탈전을 벌인다. 927년 견훤이 신라를 공격했다. 견훤은 서라벌 깊숙이 들어가 포석정에서 고려 편에 섰던 경애왕을 죽이고 그의 사촌동생 김부를 경순왕으로 내세웠다.
이에 왕건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고려군을 이끌고 왔으나 지금의 대구 팔공산 일대 '공산(公山) 전투'에서 견훤에게 대패하고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개경으로 돌아갔다.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견훤은 삼한 통일의 주도권을 잡는 듯했다.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초 한반도를 둘러싼 격동의 시기. 왕건, 견훤, 궁예 3명의 군웅들이 할거 했던 후삼국(後三國) 시대는 대하드라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경상북도 ‘안동(安東)’은 930년 고창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왕건이 지어준 이름이다. 2000년대 인기리에 방영됐던 KBS 드라마 <태조왕건>. 좌로부터 왕건, 견훤, 궁예 ⓒ KBS
그러나 3년이 지난 930년.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의 왕건이 고창(古昌)에서 다시 붙었다. 전투 초기에 왕건은 견훤에게 밀렸으나 고창 지역 신라 호족들의 지원을 받아 승기를 잡은 왕건은 복수혈전을 펼친다. 고창 전투에서 판세를 완전히 뒤집은 왕건은 후삼국 시대 최후의 승자가 되었고 후백제 견훤은 패망의 길을 걷게 된다.
고창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왕건은 비로소 '동쪽(東)을 평안(安)하게 했다'라는 의미로 고창(古昌)을 '안동(安東)'이라는 새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전까지 안동의 옛 이름은 고타야, 영가, 고창, 복주, 길주 등이었다.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高敞)과는 관계가 없다.
흔히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 일컫는 안동의 지명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후 안동은 고려 4경(四京) 다음 가는 '대도호부(大都護府)'지위를 하사 받았고 조선을 거쳐 1897년까지 무려 970여 년 동안 대도호부 지위를 유지했다. 최근 2016년에는 대구에 있던 경상북도청이 안동으로 이전하면서 경북 북부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안동의 시그니처 문화유산 '하회별신굿과 하회탈'

▲국가무형문화유산 하회 별신굿 탈놀이 ⓒ 국가유산청
역사와 전통의 도시 안동에는 우리나라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한 불교유산은 물론이며 '한국 유교문화의 본향' 답게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등 유교유산들이 가득하다. 국보 5점, 보물 49점을 포함하여 사적, 명승, 무형유산 등 총 342건의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천년고도 경주와 맞먹을 정도라고 하니 안동이야말로 우리 문화유산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河回)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낙동강의 물줄기가 큰 'S자' 모양으로 마을을 휘돌아 나가며 아름다운 경관을 만드는 안동의 대표적 핫 플레이스다. 마을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유서 깊은 곳이다.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말은 하회마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하회마을은 풍산류씨(豊山柳氏)들이 600여 년 동안 터를 지키며 살아온 씨족 마을이다. 특히 조선시대 대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謙菴 柳雲龍 1539~1601)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풍산류씨 대종가 양진당(養眞堂)과 서애의 종택인 충효당(忠孝堂) 등 수백 년 세월이 깃든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양반과 상민이 서로 공존했던 하회마을. 수백 년 세월이 깃든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다 ⓒ 국가유산청
한국적 정서와 전통을 원형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99년 4월에 엘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하회마을을 방문하여 별신굿 탈놀이를 관람했다. 그때 마침 73세 생일을 맞은 여왕이 한국식으로 생일상을 받는 모습이 영국 BBC 방송으로 송출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관람하며 즐거워했던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하회마을에 전래된 탈놀이의 일종으로 서민들을 위한 놀이다. 별신(別神)굿이란 3년, 5년 혹은 10년마다 마을의 수호신 성황님께 마을의 평화와 풍년을 기원하는 큰 굿이다. 하회마을에서는 800여 년 전부터 정월 보름날 성황님께 별신굿을 했으며 서낭신을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탈놀이를 하였다.
놀이는 강신·무동·주지·백정·할미·파계승·양반과 선비·당제·혼례·신방마당 등 전체 10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등장인물로는 각시·중·양반·선비·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 등 개성 넘치는 광대들이 각자의 탈을 쓰고 나온다. 민중들은 광대들의 신명 나는 춤과 익살스러운 연기를 보며 억눌렸던 감정을 해소했다.
하회마을에는 탈놀이와 함께 양반들이 즐기는 놀이로 '하회선유줄불놀이'가 함께 병존했다. 이 놀이는 배를 타고 노니는 '선유(船遊)'와 우리 전통 불놀이인 '줄불놀이'가 합쳐진 것으로 배 위에서 시회(詩會)를 열며 경관을 즐기는 일종의 불꽃놀이다. 양반들이 즐기던 놀이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다.

▲하회별신굿 탈놀이. 타락한 중과 부네가 춤을 추고 있다 ⓒ 국가유산청
반면 별신굿탈놀이는 상민들이 '풍자와 해학'을 통하여 양반들의 위선과 불교의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놀이다. 이름 없는 민초들은 탈놀이를 즐기며 카타르시스와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하회 별신굿은 여느 탈놀이처럼 탈놀이가 끝난 뒤에 탈을 태우며 즐기는 뒤풀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 가면극의 발생과 기원을 밝히는데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58년 제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1980년 국가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또한 2022년에 하회별신굿을 포함한 한국의 탈춤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탈놀이 가면

▲1964년 국보로 지정된 안동하회탈과 병산탈. 하회탈 11점과 병산탈 2점을 합하여 13점이다. 1964년 국보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리하던 중 2017년 고향 안동민속박물관으로 돌아왔다 ⓒ 국가유산청
안동하회마을의 별신굿에 사용하던 하회탈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탈놀이 가면이다. 양반탈을 포함해 11점의 탈과 인근 병산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던 병산탈 2점을 합하여 13점이 1964년 국보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현재 하회탈은 각시·중·양반·선비·초랭이(머슴)·이매(하인)·부네(기녀)·백정·할미·주지 등 10종 11개가 전해지고 있지만 원래는 14점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총각·별체·떡달이탈 등 3점이 분실되어 11점이 전해지고 있다. 병산탈 2개는 대감탈과 양반탈로 불린다.
하회탈은 남성과 여성, 동물로 구분된다. 남성으로는 양반·선비·초랭이·이매·중·백정이 있고 여성으로는 각시·부네·할미가 있다. 동물은 사자를 닮은 상상의 동물 주지(암·수)가 있다. 이들은 각자의 성격에 맞춰 개성 있는 연기를 한다. 각시는 '사뿐사뿐' 걷고 초랭이는 '방정' 맞고 중은 '능청'스럽다.

▲한국인 웃는 얼굴의 대표 이미지로 통하는 양반탈 ⓒ 국가유산청
각시탈은 살구색 얼굴 위에 분(粉)을 발랐고 양볼과 이마에 연지와 곤지를 찍었다. 콧날은 펑퍼짐하고 붉게 칠한 입술을 꼭 다물고 있다. 하회마을 사람들은 각시탈이 성황신을 대신한다고 믿었기에 별신굿 할 때 외에는 각시탈을 볼 수 없었고 반드시 제사를 지낸 다음 꺼냈다고 한다.
하회탈 하면 환하게 웃고 있는 양반탈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한국인의 웃는 얼굴 대명사로 간주되는 양반탈은 얼굴을 위로 들면 웃는 얼굴이 되고 아래로 하면 화난 얼굴로 표정 변화가 가능하도록 인체공학적으로 만들어졌다. 얼굴은 좌우 비대칭이며 양반, 선비, 중, 백정탈은 턱이 분리되는 구조로 되어있어 생동감 있는 표현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하회탈은 누가 언제 만들었을까. 하회탈의 기원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남겨진 바는 없다. 다만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허도령 전설'에서 그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하회탈이 만들어진 시기는 고려 중엽으로 추정한다.

▲하회마을 사람들이 성황신으로 여기는 각시탈과 양반과 선비 사이에서 첩 역할을 하는 부네탈 ⓒ 국가유산청

▲타락한 승려를 표현한 중탈과 양반의 하인 역할을 하는 초랭이탈 ⓒ 국가유산청
당시 하회마을에는 허씨 들이 집성을 이루고 살았는데 마을에 각종 재앙이 들어 마을사람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길이 없었다. 그때 마을에 살던 허도령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탈을 만들어 그것을 쓰고 굿을 하면 우환이 물러갈 것이라고 계시를 했다.
다만 탈을 다 만들 때까지 "누구도 보게 해서는 안 된다"라는 금기사항까지 알려주었다. 허도령은 외딴집에 금줄을 치고 두문불출하며 탈 만들기에 몰두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설이 그러하듯 금기사항은 깨어지기 마련이다. 마을에는 허도령을 사모하던 김씨 처녀가 있었는데 허도령이 보고 싶어 찾아가 차마 문을 열지는 못하고 문틈으로 엿보았다.
신의 계시가 깨어지는 순간, 허도령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 그때 허도령이 마지막으로 만들던 이매탈은 턱을 만들지 못해서 '턱이 없는 탈'이 되었다고 한다. 김씨 처녀는 슬픔을 견디다 못해 자결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김씨 처녀의 넋을 달래기 위해 서낭당을 지어 제사 지내고 그때부터 별신굿을 했다고 전한다.
하회 마을에서 관리하던 탈은 1964년 국보로 지정된 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가 2017년 고향 안동민속박물관으로 돌아왔다. 2022년 탈의 재료를 정밀 조사한 결과 주지탈 2점은 소나무로 확인되었고 나머지 하회탈과 병산탈은 기존에 오리나무로 알려졌던 것과 달리 '버드나무'를 사용한 것으로 확인 됐다. 하회탈은 보통의 탈처럼 바가지나 종이가 아닌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800여 년 동안 보존이 가능했다.

▲허도령이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탓에 턱이 없는 이매탈과 가난한 노인을 상징하는 할미탈 ⓒ 국가유산청

▲선비탈과 천민계층을 대변하는 백정탈 ⓒ 국가유산청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를 반영한다. 800여 년 전 이 땅의 민초들은 하회탈에 '풍자와 해학'을 담아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마음껏 비판하며 억눌렸던 감정을 해소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이 서로 이어지고 맺어지는 21세기 '초연결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얼굴에는 과연 어떤 시대상이 담겨있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격월간 문화매거진 <대동문화>146호(2025년 1, 2월)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