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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세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백록담
윗세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백록담 ⓒ 어혜란

"이게 꿈이야 생시야."
"우리가 정말 영실코스에 함께 오르다니!"

영실탐방로 입구에 서 있는 산악회 멤버의 얼굴을 보니 가슴이 울컥했다. 사실, 이곳에 가자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건 꽤 오래전 일이다. 4년 전, 우연히 남편의 30년지기 친구들과 결성된 '사계절 산악회'. 부지런히 산행을 다니며 건강과 우정을 동시에 챙기자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코로나가 점점 활개를 치며 첫 산행을 끝으로 수로가 막히듯 우리의 등산길도 완전히 막혀버렸다.

멤버 4명이 돌림노래하듯 돌아가면서 코로나에 걸렸다. 잡혀있던 산행은 줄줄이 취소됐다. 다행히 몇 년 후, 코로나는 잠잠해졌지만 이번에는 각자의 바쁜 스케줄이 문제였다. 흐지부지 시간은 흘렀고 3년이 훌쩍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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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산악회를 해체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우려스러움이 생길 만큼 다음 산행 일정은 묘연했다. 그럼에도 한마음이었을까. 만나기만 하면 '등산 등산'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한 술 더 떠 제주에서 만나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서로의 빠듯한 사정을 잘 알기에 제주는커녕 다음 산행을 언제 떠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지만.

하지만 간절한 마음은 바위도 뚫는다고 했던가. 모두들 아이유 못지않은 살인적인(?) 스케줄을 무릅쓰고 제주에 모인 것이다. 이번 만남이 얼마나 어렵게 성사된 일인지 잘 알 알고 있기에 그저 감격스러웠다.

 영실코스 탐방로 입구
영실코스 탐방로 입구 ⓒ 어혜란

드디어 지난 11월 15일, 사계절 산악회 4명의 멤버는 영실탐방로 입구에 서 있었다. 한라산을 오르는데는 크게 다섯 가지 코스가 있다. 가장 꼭대기인 백록담을 볼 수 있는 관음사와 성악판 탐방로, 그리고 남벽 분기점까지만 오를 수 있는 영실, 어리목, 돈내코 코스.

정상으로 향하는 성악판 코스가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지만 왕복 8시간 정도가 소요되고 힘들다. 초보자에게는 어리목이나 영실코스를 추천한다. 영실 탐방로는 비교적 짧은 거리에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하고 있어 현지인들에게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정상까지 약 2시간 정도면 윗세 오름에 갈 수 있다. 산행시간은 하산까지 총 4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영실 탐방로는 한라산 등반으로는 쉬운 코스에 속하지만 초보에게는 만만치 않은 산이다. 첫 산행은 아니지만 나에게 4시간이 넘는 등반은 처음이었다. 한라산을 등반한다는 생각에 설레면서도 '내가 과연 무사히 정상까지 오를 수 있을까' 긴장되고 설레는 마음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영실코스를 오르며...자욱한 안개가 낀 모습이 장관이다
영실코스를 오르며...자욱한 안개가 낀 모습이 장관이다 ⓒ 어혜란

우려했던 것과 달리 영실코스는 난이도가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평소 운동과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라면 조금은 버겁게 느껴질 수 있으나, 계단이 조금 많아서 힘들 뿐 길이 잘 다듬어져 있었다.

한참을 볼을 후려치는 센바람과 싸움하며 해발 1400~1500m 지점까지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병풍바위'로 유명한 '영실기암'이 위풍당당한 자태를 드러냈다. 영실기암은 영주 십이경중 하나로 한라산을 대표하는 명승지 중 하나다. 산허리에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들의 모습이 조각 작품처럼 아름다웠다. 병풍처럼 펼쳐진 기암석의 모습은 신비롭다 못해 영험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구름에 둘러쌓인 영실기암
구름에 둘러쌓인 영실기암 ⓒ 어혜란

'와~ 너무 멋있다.'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영실(靈室)은 '신령한 영들의 거처'라는 의미다. 즉, 한라산 신령들의 집이라는 이야기. 그래서일까. 영실기암에 서서 발아래를 떠다니는 구름떼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마치 신들이 우리의 우정을 축복해 이 자리에 모이게 한듯한 신비스러운 기분도 들었다. 그만큼 오늘 산행은 우리에게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영실기암에서 바라본 제주풍경
영실기암에서 바라본 제주풍경 ⓒ 어혜란

수려한 경관을 감상하며 땀을 식힌 후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옥의 계단이 끝나고 한참을 걷다 보니 광활한 평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말로만 듣던 백록담이 우뚝 서 있있다. 내 눈으로 백록담을 보다니.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윗세오름에서 바라본 백록담
윗세오름에서 바라본 백록담 ⓒ 어혜란

'와! 너무 멋지다. 꼭 스위스에 온 것 같아.'

정말 그랬다. 등산로를 따라 죽 늘어선 빨간 깃발 때문에 영실코스는 유난히 알프스 산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깃발은 얼핏 보면 스위스 국기 같았다. 우리는 멋진 절경을 배경 삼아 다양한 포즈로 인증샷을 남긴 후, 윗세 오름의 정상인 대피소에서 챙겨온 간식을 먹었다.

아침을 두둑이 먹은 터라 라면을 챙겨오지 못했는데 대피소에 앉아 삼삼오오 챙겨온 라면을 먹는 사람들을 보니 무척 부러웠다. 찬바람을 반찬 삼아 먹는 라면 맛은 얼마나 꿀맛일까.

이제 멋진 절경을 열람했으니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지옥의 하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80% 이상 체력을 소진한 탓에 정말 하산이 쉽지 않았다. 다리가 완전히 풀리고 여러 번 미끄러질 뻔했다.

가도 가도 왜 이렇게 입구는 보이지 않는지 정말 미칠 뻔했다. 나는 등산보다도 하산이 몇 배는 힘들었다. 멤버들이 곁에 없었더라면 결코 쉽지 않았을 하산길. 결국 나는 산을 내려와 차에 오르자마자 흑흑 참았던 눈물을 왈칵 터트려버렸다. 절경을 열람한 대가는 실로 무시무시했다.

여러 번 포기하고 싶을 만큼 어려웠던 산행.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기억에 남는 올해의 사건이 아닐까. 이날의 산행은 단순히 한라산을 오른 경험이 아니라, 산악회 멤버들과 함께 새로운 도전을 하고 추억을 쌓은 특별한 날이었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낸 우리의 모습이 너무 대견했고, 큰 보람을 느꼈다. 어렵게 함께한 순간이었던 만큼 뿌듯함은 더 컸다.

'세상의 모든 일은 간절한 마음만큼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어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포기하는 대신 반드시 길을 찾고야 말겠다는 열망으로 다가선다면 반드시 길은 보이는 법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우리는 윗세 오름의 정상에서 이번에는 진짜 알프스산맥 정상에서 만나자며 또다시 무모한(?) 약속을 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결국 방법을 찾을 것이고, 알프스 정상에 우뚝 서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마음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한번 기적을 맛본 사람은 또 다른 기적을 만나는 법이니까. 앞으로도 산악회 멤버들과 지금처럼 소중한 추억을 더 많이 쌓고 행복한 순간을 만들어 가고 싶다. 멤버들과 함께 할 다음 산행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한라산은 특히 겨울이 아름답다고 한다. 새롭고 특별한 제주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이번만큼은 영실탐방로를 여행 코스에 넣어보는 것이 어떨까. 겨울왕국을 눈앞에서 직관하게 되는 행운을 누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한라산#영실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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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혜란 (wh2699wh) 내방

성장하고 꿈꾸며 독서하는 삶을 살고싶은 모카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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