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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射臺 활을 쏘는 자리)에 썼다.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고른다. 한국을 떠난 지 7일 째, 비로소 활을 낸다. 얼마 만에 당겨보는 활시위인가. 남편은 감개가 무량한지 조금은 비장한 마음으로 시위를 당겼다.

벼를 베어낸 빈 논을 활터인 양 쓴다. 논에는 벼 그루터기가 길게 남아 있고 풀도 나있다. 논 가운데에 과녁으로 쓸 흰 천을 막대 두 개에 묶어 세워 놓았지만 화살이 과녁에서 멀리 떨어지면 찾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니 과녁 근처로 떨어지게 활을 내야 한다.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화살을 날린다.

마침내 활을 내다

국궁을 시작한 지 올해로 4년, 남편은 활에 빠져 들었다. 일요일 하루만 쉴 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아침이면 활터로 갔다. 활은 심신을 모두 고양시키는 운동이라 했다. 신체적으로도 좋지만 정신 수양에도 활은 참 좋다며 지인들에게 활쏘기를 권하곤 했다.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활터로 간다.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활터로 간다. ⓒ 이승숙

취미로 시작한 활이었지만 점차 국궁의 매력에 빠져든 남편은 승단대회에도 참가하기 시작했다. 국궁도 태권도나 검도처럼 1단부터 9단까지 단 수가 있다. 1단이 되려면 45발을 쏴서 24발을 명중시켜야 한다. 평소에는 그 이상으로 활을 명중시키던 사람도 막상 승단대회에 참가하면 긴장이 되어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번의 실패 끝에 마침내 1단을 땄을 때 세상을 다 얻은 것 마냥 기뻐했다. 그러나 문제는 2단이었다. 2단은 45발 중 26발을 명중시키면 된다. 그 정도는 평소에도 늘 맞췄으니 당연히 될 줄 알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문제는 겨울동안 동남아에서 지내느라 석 달 가까이 활을 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숨을 고르고 활시위를 당긴다.
숨을 고르고 활시위를 당긴다. ⓒ 이승숙

활은 예민해서 외부 조건, 일테면 바람이나 안개 등의 기후 조건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에 더해 활을 쏘는 궁사의 몸과 정신 상태가 바르지 않아도 활은 잘 되지를 않는다. 평상시대로 해야 되는데 만약 그 흐름이 깨지면 활은 제대로 되지 않는다.

하루만 쉬어도 표가 나는데 석 달을 쉬니...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나 무용 등을 하는 사람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술을 갈고 닦으며 연습한다. 하루를 쉬면 내가 알고 이틀을 쉬면 남이 알고 사흘을 쉬면 세상 사람이 다 안다는 말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게 쉬지 않고 연습한 덕분에 평소의 실력대로 연주를 하고 공연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활 역시 마찬가지다. 하루만 쉬어도 표가 난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알 수 있으니, 활을 내는 사람들은 매일 활터에 가서 활을 낼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석 달을 활을 안 쏘면 어떻게 되겠는가.

 145m 떨어져 있는 과녁을 향해 화살을 날린다.
145m 떨어져 있는 과녁을 향해 화살을 날린다. ⓒ 이승숙

 당겼던 시위를 놓았다. 화살이 과녁을 향해 날아갔다.
당겼던 시위를 놓았다. 화살이 과녁을 향해 날아갔다. ⓒ 이승숙

겨울동안 동남아에서 지내다 봄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오면 바로 활터로 간다. 활에 고팠던지라 집에 오자말자 짐도 채 풀지 않고 활터로 달려가서 활을 쏜다. 얼마나 그리웠던 국궁장이고 활터였던가. 사대에 선 남편은 감개가 무량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만큼 되지 않는다. 시위를 당기는 힘도 부족하고 과녁을 조준하는 데도 흔들린다. 공부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다고 하더니 활 역시 마찬가지다. 쉬지 않고 노를 저어야 물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조금만 쉬어도 배는 뒤로 떠내려간다.

활 역시 마찬가지였다. 생각만큼 되지 않았다. 남편의 낙담은 컸다. 과연 원래대로 돌아오기는 할까. 얼마나 연습해야 그만큼의 실력을 다시 얻을 수 있을까. 날아갈 듯 활터로 간 사람이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 해를 보며 활을 내다

원래대로 돌아오기까지 각고의 노력을 했다. 그렇게 몇 달 연습해서 여름 쯤 원래 실력으로 돌아왔고 가을이 되자 비로소 실력 발휘를 할 만큼 되었는데 또 겨울이 되고 동남아로 떠난다. 그렇게 계속 도돌이표가 되었다. 태국 치앙라이로 겨울살이 여행을 떠나며 활을 챙겨온 까닭에는 그런 사연도 들어 있었다.

 화살을 찾으러 과녁을 향해 가는 길.
화살을 찾으러 과녁을 향해 가는 길. ⓒ 이승숙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며 활시위를 당긴다. 저 멀리 145m 너머에 있는 과녁을 목표로 화살을 날린다. 한 발 또 한 발, 그렇게 열 발을 날렸다. 한국의 국궁장에서는 과녁에 명중이 되면 "탁" 하는 소리가 들리고 경쾌한 알림 음이 울린다. 그러나 여기 치앙라이에서는 그런 호사를 누릴 여유가 없다. 활을 낼 수 있다는 그 사실만 으로도 충분하다.

화살을 찾으러 간다. 과연 몇 발이나 과녁 근처에 떨어졌을까? 혹시 멀리 날아가서 못 찾는 건 아닐까. 여러 마음을 안고 들판 가운데 세워놓은 과녁을 향해 걸어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국궁신문에도 실립니다.


#동남아겨울살이#태국치앙라이#치앙라이#국궁#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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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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