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케이팝 팬덤은 바빠진다. 음악방송 연말 무대, 시상식, 콘서트까지 곳곳에서 응원봉을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12월 3일,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자 팬들은 국회로 향했다. "소중한 빛으로 세상을 지키자"는 포부로 형형색색의 응원봉들이 거리를 물들였고, 그들은 흥겨우면서 질서 있는 시위 문화를 이끌어가고 있다.
12월 14일 오후 4시에 시작된 국회 본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표결이 진행되었고 케이팝 팬덤은 다시 이곳으로 나섰다. 발광력을 자랑하는 응원봉과 함께 '윤석열 퇴진'을 외쳤고, 몇몇 팬들은 "밥 먹으면서 응원하라"고 푸드 트럭을 보냈다. 아티스트들도 시위에 나선 팬덤을 위해 식당 선결제에 나섰다. 사랑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말을 몸소 실천한 그들, '악'을 드러낸 건 케이팝 팬덤이었다.
우리는 '아이돌 팬덤'이자 '한국 여성'이다

▲케이팝 팬들이 응원봉을 꾸민 모습 ⓒ 이진민

▲어느 '몬베베(몬스타엑스 팬클럽명)'가 준비한 푸드트럭 현장 ⓒ 이진민
시위 현장에서 만난 팬들은 "우리들은 언제나 사회에 목소리를 냈다"며 "단지 이번 기회에 사회적으로 주목받게 된 것"이라 입을 모았다. 특히 케이팝 팬덤이 비단 아이돌을 응원하는 사람들로만 분석되는 것이 아닌 젊은 여성들의 정치적 움직임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기 안성에서 온 20대 '멜로디(비투비 팬클럽명)' A씨는 "지난주부터 평일, 주말 모두 시위에 나오고 있다"며 "한 명의 국민으로서 대통령이 국민의 안위와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경제까지 박살내고 있다"며 분개했다.
케이팝 팬덤이 시위 참여로 주목받는 상황에 대해 그는 "케이팝 팬덤으로만 주목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여성'이란 점도 강조되어야 한다. 이런 젊은 여성들이 정치적 참여에 나선 것과 더불어 2030 남성들의 저조한 참여율이 함께 주목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20대 '시즈니(엔시티 팬클럽명)' B씨는 "대통령이 잘못한 행동을 했기에 당연히 나와야 했다"라며 "케이팝 팬덤이 이번 시위에서 여러모로 주목받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팬들은 언제나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응원봉'이란 물건을 들고 나옴으로써 더 주목 받게 된 것 뿐이다. 우리들은 언제나 이 자리에 있었다"고 답했다.
이번 시위에서는 아이돌 팬들이 또 다른 팬을 위해 준비한 푸드 트럭이 즐비했다.
세븐틴, 보이넥스트도어, 몬스타엑스 등 여러 개인 팬들이 직접 사비를 들여 시위 참여자를 위한 푸드트럭을 보냈다. 그 중 '몬베베(몬스타엑스 팬클럽명)'가 준비한 푸드트럭에서 팬들을 만날 수 있었다.
20대 '몬베베' C씨는 "X를 통해 푸드트럭이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며 "아직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함께 나왔으면 좋겠다"고 독려했다.
아티스트가 응원하는 팬덤의 시위

▲가수 아이유의 집회 서포트를 기다리는 시민들 ⓒ 이진민

▲'아이크(아이유 팬클럽 응원봉명)'를 들고 집회에 나선 시민 ⓒ 이진민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팬들의 물결에 아티스트도 움직였다. 아이유, 소녀시대 유리, 뉴진스 등 여러 아티스트들이 시위에 나간 팬들을 응원하기 위해 미리 식당에 선결제한 것이다. 그중 아이유는 지난 13일 팬카페 공지를 통해 "추운 날씨에 아이크(아이유 팬클럽 응원봉 명칭)를 들고 집회에 참석해 주변을 환히 밝히고 있는 유애나들의 언 손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지길 바라며, 먹거리들과 핫팩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아이유가 선결제한 식당들은 아침 10시부터 대부분의 음식이 소진될 만큼 팬들로 북적였다. 한 식당에서는 오후 12시부터 수령이 가능했음에도 11시부터 수십 명이 대기했다. 그들은 응원봉을 들거나 아티스트 캐릭터가 담긴 열쇠고리를 매달고 있었고, 그중에는 "아이유가 집회를 위해 나눔을 준비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시민들도 있었다.
30대 '유애나(아이유 팬클럽명)' D씨는 "덕후가 세상을 구한다는 말이 빛을 발하고 있는 요즘"이라며 "더 바른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집회에 나왔다. 지난주에 투표 불참했던 국회의원들이 오늘은 좋은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아이유의 서포트 소식을 듣고 "팬들을 생각해 주는 게 느껴져서 좋았다"며 "콘서트에서 항상 아이유는 유애나의 오랜 팬이라고 말한다. 그 마음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서 너무 고맙다. 아이유와 유애나의 관계는 좋은 관계의 가수와 팬을 보여주는 표본"이라며 아티스트를 향한 애틋한 마음과 함께 눈물을 글썽였다.
아이유 덕분에 집회에 방문한 외국인 팬도 있었다. 한국으로 여행 온 대만 출신 20대 유애나 E씨는 "소식을 듣고 아이유가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팬으로서 자랑스러운 기분"이라며 또 현 상황에 대해 "대만 사람으로서 한국인들이 정치적 상황에 더 참여율이 높은 거 같다"고 덧붙였다.
케이팝 팬덤은 항상 '정치적'이었다
시위에 나선 케이팝 팬덤을 두고 "이제 아이돌 말고 사회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빠순이'에서 응원봉 연대로 진화한 것이 아니다. 늘 정치적이었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 직접 행동하는 행위 주체였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 김진태 위원(현 강원도지사)이 "촛불은 바람을 불면 다 꺼지게 되었다"고 발언하자 팬들은 "가장 소중한 빛으로 세상을 지키겠다"며 시위에 참석했다. 2022년, 아이돌 그룹 세븐틴의 유튜브 채널에 베스킨라빈스의 간접광고가 등장하자 팬들은 "임금 차별과 부당 노동 행위를 저지른 회사의 제품을 광고하지 말라"며 SNS상에서 보이콧 시위를 벌였다.
그 밖에도 음반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중복 구매를 유도하는 소속사들에 대해 "이러한 마케팅은 심각한 기후 위기 속에서 플라스틱 생산과 폐기를 유발한다"며 꾸준히 불매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몇몇 팬들은 책임감 있는 기후 행동을 요구하고자 환경 단체 '케이팝포플래닛'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2024년, 케이팝 팬덤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해치는 권력자를 끌어 내리고자 함께 모였다. 국내 언론은 'MZ 세대의 새로운 시위 방법'이라 해석했고, 외신(로이터 통신)은 "응원봉이 비폭력과 연대의 상징이 되었다"고 보도했으며, 정치인들도 한 손에 응원봉을 들기 시작했다. 케이팝 팬덤을 '빠순이'라 멸칭하던 사회가 이제야 응원봉의 숨은 빛을 발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