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1960년대 부산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집단 수용시설이자 인권유린의 현장인 영화숙·재생원. 1975년부터 1987년까지 국가 폭력이 자행된 형제복지원의 전신으로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는 폭행, 감금, 강제노역, 성폭행, 사망 등 각종 인권침해가 벌어졌고, 피해자는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망자의 날인 음력 9월 9일, 암매장 추정 지역에서 진행된 위령제는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 손석주 대표의 꿈이었다. 첫 위령제가 열린 2023년 10월 23일, 그는 "채 피지도 못하고 여기 이름 모를 야산에 묻혀있는 형제자매들에게 고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부모 형제의 따뜻한 사랑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아무 잘못도 없이 영문도 모른 채 이름마저 생소한 영화숙·재생원, 그 지옥 같은 곳에서 고통과 굶주림 그리고 폭력에 멀리 하늘나라로 가신 형제자매님. 겨우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60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이제 찾아왔습니다. 너무 늦어 죄송하고 미안합니다"라고 했다.
이제 그는 다른 꿈을 꾸고 있다. 영화숙·재생원뿐만 아니라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등 여러 수용시설에서 고통받았던 피해자들이 하나가 되어 먼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정부로부터 시설 수용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와 실효성 있는 구제를 받고 싶다.
지난 11월 21일 손석주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를 만났다.

▲손석주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참여연대 내부 ⓒ 참여연대
- 영화숙·재생원 사건은 50여 년 전에 발생한 사건이지만, 2022년에 이르러서야 손석주 님의 고발 덕분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영화숙·재생원이 어떤 곳이었고,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말씀해 주세요.
간단히 말하면 영화숙· 재생원은 형제복지원의 원조 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숙은 아동 보육시설이었고, 재생원은 부랑인 수용시설이었습니다. 영화숙은 아동 시설로 30년 정도 운영되던 곳이었고, 부랑인 시설 설립을 계획 중이던 부산시와 영화숙이 위탁 계약을 맺으면서 재생원이 추가로 만들어진 것이죠. 재생원의 경우 하루에 오직 한 시간만 방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자유시간이 주어졌어요. 재생원에는 화장실조차 없었고, 밤이 되면 방마다 배변통 두 개를 들여놓고 문을 잠가 버렸습니다. 아침에는 다시 배변통을 들고 나갔는데, 탈출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돼요. 당시 재생원에는 어르신이나 환자, 발달 장애인들도 많았는데 음식 공급도 원활하지 않고 치료도 전무하다 보니 사상자가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어요.
영화숙의 상황도 좋지는 않았습니다. 영화숙의 어린이들이 탈출을 시도했다가 다시 잡혀 오면 몽둥이로 발바닥을 40~50대 정도 맞습니다. 통증 때문에 걷지를 못하니 기어서라도 식당에 가면 식사 시간은 이미 끝나있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황에 치료도 받지 못하니 병이 악화하여 죽는 아이들이 태반이었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일이 있는데요. 식사량이 부족해 배고팠던 아이 셋이 다대포 바닷가에서 바짝 마른 물고기를 주워와 나눠 먹었는데 하필이면 그게 복어였던 겁니다. 결국에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세 아이가 모두 사망했죠. 안에서 일어나는 폭행도 형제복지원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영화숙·재생원이 운영되던 15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지만, 정확한 자료도 없으니 통계도 낼 수 없는 상황입니다.
- 영화숙·재생원 사건을 고발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처음 영화숙·재생원 피해 사실을 알리게 된 것은 선감학원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모습을 보며 느낀 억울한 감정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똑같은 일을 당했는데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피해보상을 떠나 이런 일은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하는 문제라고 느꼈습니다. 무작정 양산시청 기자실을 찾아가 영화숙·재생원의 피해 사실을 알렸고, 그렇게 2022년 10월 31일에 국제신문에서 첫 기사가 나오자마자 두 번째 피해자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신기하게도 기사가 나올 때마다 연락해 오는 피해자들이 한 명씩 늘어나면서 기획 기사가 이어졌고, 그렇게 4명의 피해자가 모인 것을 계기로 함께 더 많은 피해자를 모아보자고 의기투합해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 현재 대표직을 맡아 활동하고 계신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이하 협의회)는 2022년 12월 15일에 만들어졌어요. 영화숙·재생원에 대한 기사가 나간 후 연락해 온 피해자들이 3명 있었는데, 그분들과 함께 더 많은 피해자를 모아보자고 의기투합해 협의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후 피해자를 찾으러 전국을 누비고 다녔어요. 피해자 한 명을 찾으면 그 피해자와 연결된 또 다른 피해자들을 소개받는 방식으로 피해자들을 모았는데, 현재 부산시에 등록된 인원만 150여 명에 달합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에서는 영화숙·재생원의 피해자를 7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는데요. 영화숙·재생원 피해자 중에서 부산 소년의집으로 이동해간 피해자분들이 500명 정도 있고, 어릴 적 이름, 생년월일과 현재의 인적 사항이 일치하지 않아 소재 파악이 되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협의회는 1년 간의 활동 이후 2023년 8월에 비영리단체로 등록했는데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올해 4월에도 인천, 포천, 남양주, 천안을 돌면서 십여 명의 피해자들을 만났고, 이분들이 진화위의 조사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영화숙·재생원 피해사망자를 위한 위령제2024년 10월 11일 (금) 부산 사하구에서 진행한 위령제의 모습이다. ⓒ 손석주
-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에서는 매년 피해자 들을 기리는 위령제를 진행하고 계시는데요. 전국의 피해자들을 처음으로 직접 만났을 때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을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거나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첫 번째 위령제에서 피해자들이 80~90명 정도 모였고, 올해 위령제에는 150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위령제에서 만난 피해자들은 50년 만에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것인데도 몇 마디 나누고 나면 '까불이', '토까이', '4번' 등등 서로의 별명을 다 기억하더라고요. 참 신기했죠. 다들 옛날 얘기를 하면서 추억도 나눴고요.
한 분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이분은 7세에 집 근처에 있던 경주역에서 놀다가 타고 있던 열차가 출발해 부산역에 도착했고,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영화숙에 실려와 가족들과 이별하게 된 경우였습니다. 그런데 영화숙을 나온 뒤로 가족을 찾고자 거리에서 몇십 년을 헤매며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가족을 찾지 못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동생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경찰이 전해주었다는 겁니다. 굉장히 의아하죠. 그렇게 가족을 찾아달라고 할 때는 못 찾다가 동생이 죽었다며 연락이 온 것이니까요.
현재 협의회에는 딱 두 명의 여성 피해자가 있는데요. 올해 연락을 해오신 분의 이야기에 따르면 여아 소대에서 함께 생활하던 피해자 중 몇몇과 계속 연락을 이어오고 있지만, 피해 사실을 밝히는 것을 꺼리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신 분들의 경우 피해 사실이 널리 알려지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시는 것으로 보여요. 하지만 피해자들에게도 항상 하는 이야기이지만, 저희가 죄를 지어 이런 일을 겪은 것도 아니고, 절대 창피해할 일이 아니죠. 물론 피해자분들이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해가 돼요. 아픈 상처지만 묻어두겠다는 분들이 많고, 그분들의 의견을 존중해 그 이상의 설득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 손석주 님은 총 두 번 영화숙·재생원에 갇혀있었다고 하셨는데요. 자세한 내용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1971년 거리에서 신문을 팔다가 처음 잡혀갔어요. 그때 제 나이가 9살이었고, 두 달 만에 산속으로 도망을 쳐 탈출했습니다. 그 당시 제 이름부터 집 주소, 학교명, 부모님 성함, 담임 선생님 성함까지 정확히 이야기했고 연락을 취해달라고도 요청했지만, 나중에 확인을 해보니 아무도 연락받은 적이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이후 1973년도에 다시 영화숙으로 잡혀갔을 때에는 1년 가까이 거기서 지내야 했어요. 결국 출석 미달로 퇴학 처리가 되었고, 그 경험이 저에게 큰 타격을 주었죠.
다른 피해자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갈대밭에서 사촌들과 놀다가 납치되어 영화숙·재생원에 들어오신 분이 있습니다. 가족들이 세 번이나 찾으러 갔지만 영화숙에서는 그런 아이는 없다며 발뺌했다고 합니다. 당시 가족들이 명단까지 확인했지만, 아예 다른 이름으로 등록을 해놔서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해요. 결국 4번째로 방문할 때 경찰을 대동해가니 그제야 여기 있다며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겁니다. 이런 민간기관에서는 부랑인들을 단속할 권한이 없음에도 부산시의 묵인하에 상시적인 단속과 납치, 감금 행위가 이루어진 겁니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과거의 경험과 트라우마로 인해 60~70대가 되어서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나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하고 행동을 제지당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아요.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피폐해졌는지를 밝히고 국가로부터 사과를 받고 싶어요.
- 최초로 기자를 찾아가 피해 사실을 고발했을 때와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를 구성하고 활동하고 있는 지금을 비교하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부나 사회에 바라는 내용도 달라졌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활동을 하며 생각의 변화는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지난해 7월 진화위 김광동 위원장이 부산에 내려와 만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우리는 가해자 처벌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진실을 밝혀달라고 이야기했었습니다. 가해자가 사망해 책임을 질 수 있는 당사자가 없는 상황에서 가해자에 대한 처벌 요구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죠. 대신 진화위 김광동 위원장에게 직권조사를 지속적으로 요구해왔고, 2023년 8월 18일 직권조사가 결정되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피해자가 등장할 때마다 곧바로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리고 저희 이외에도 알려지지만 않았을 뿐 악질적인 시설들이 많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른 수용시설의 경우에도 철저한 조사를 통해 진상규명을 하길 바라고 있어요.

▲제6차 유엔 고문방지위원회 심의제6차 유엔 고문방지위원회 심의에 참석한 손석주 대표는 유엔 고문방지위원회 대한민국 담당 국가보고관인 아나 라쿠(Ana Racu) 위원과 피터 베델 케싱(Peter Vedel Kessing) 위원을 만나 면담을 가졌다. ⓒ 손석주
- 지난 7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합(UN) 산하 고문방지위원회 심의에 참석해 고문 피해를 증언하셨는데요. 그 결과 의미 있는 권고도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관련 내용을 소개해 주시고, 정부가 이를 이행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유엔 고문방지위원회 제6차 최종 견해의 주요 권고로는 시설수용 및 과거사 피해자의 구제 보장, 구금 초기 단계부터의 변호인 조력권의 보장, 정신 보건 시설 강제 입원 및 입소 방지 등이 있습니다. 권고 내용에 만족하고,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제네바에 가기 전에 발표할 원고를 열심히 준비해 갔는데, 막상 도착하니 미리 써온 원고를 그대로 읽는 것은 만족스럽지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준비해 간 원고는 읽지 않고 정말 제 마음에서 우러나온,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옆에 누워 잠들었던 친구가 아침에 죽어있는 모습을 보며 나도 내일 아침에 해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공포, 언젠가는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매일 두려움을 느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행동하면 한 대라도 덜 맞을까,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먹을 수 있을까 궁리하고 두려움에 떠는 일이 신체적인 폭력보다도 훨씬 끔찍했다고 말했습니다. 저희와는 전혀 교류가 없는 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듣는 위원분들이 모두 눈물을 훔치시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며 저의 이야기에 공감을 해주시는구나 싶었죠.
하지만 유엔 고문방지위원회의 권고는 대한민국 정부가 이를 지킬 의지가 없으면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어떤 노력을 기울일지 지켜봐야죠. 저는 정부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피해자들이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못하고 명예회복도 되지 못한 채 돌아가시게 될 것 같아 걱정됩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기회는 지금밖에 없어요.
- 대구 희망원, 덕성원, 칠성원 등 영화숙·재생원과 유사한 수용시설이 많았지만 많은 피해자들이 지금도 본인의 피해 사실을 밝히며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대표님께서도 이들을 위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오셨는데요. 피해자들이 나서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세요.
사회의 시선도 문제이고, 내가 나서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으니 선뜻 나서지 않는 분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작년에 피해자 6명이 모여 부산 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했을 때였어요. 그때 방송국에서 기자회견을 촬영해가서 피해자들이 애타게 8시 뉴스를 보고 있는데 나오지 않더라고요. 나중에 알아보니 그림이 너무 안 나와서 뉴스에 싣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언론도 진실을 밝히는 일보다 그림을 더 중요시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죠. 그래서 그 이후로는 그 '그림'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피해자들을 더 적극적으로 찾아다녔습니다. 부산시에 있는 13개의 인권 단체를 찾아다니며 도움도 요청했고요. 그렇게 연결된 단체들에 의지하며 지금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 협의회의 힘만으로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고 생각하고, 도와주시는 많은 분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임에도 신청 기간을 넘겨 조사를 받지 못한 분들이 400여 명이 되는데요.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길잡이의 역할을 맡아 부산시에서 구제 협의회를 만들어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대구 희망원 피해자와 서울시립아동보호소 피해자들도 모으고 있고요.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건 조사와 진상규명을 맡는 기관이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그런 면에서 진화위가 2025년 5월에 활동을 종료하는 것이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진화위의 운영 기간을 연장하기 위해 여러 의원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구하고 있고요. 수용시설 문제에 대해 조사를 할 수 있는 기관은 진화위뿐이고, 진화위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재판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진화위의 존속은 필수적입니다. 많은 단체와 시민들이 힘을 모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는 공영 장례 관련해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공영 장례 위임절차와 유언 공증 지원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특히 올해 초, 가족이 없는 무연고 생존자분들이 사후 국가소송 배상금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의사를 유언장에 담기도 했는데요. 이 같은 일을 하게 되신 계기는 무엇이고,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작년에 활동하면서 보니 형제복지원 소송 중에 돌아가신 피해자분들이 많더라고요. 피해자들이 모두 고령인 만큼 이런 일은 저희에게도 곧 닥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번도 사람답게 살지 못했던 분들이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외롭게 세상을 떠나지 않도록 협의회에서 직접 상을 치러줄 수 있는 방식을 찾다가 공영 장례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부산시는 무연고자가 사망하는 경우 부고를 띄워 공영 장례를 하고 있고, 부산 시민 공영 장례 조문단도 운영하고 있는데요. 현재 우리 협의회도 공영 장례 조문단에서 활동하며 무연고자 장례식에 찾아가 조문을 드리고 있습니다. 사회적 참사가 있었을 때마다 많은 시민들이 찾아가 함께 슬픔을 나눈 것처럼 장례식장 입구에서 공영 장례의 의미를 안내하고, 일반 장례 때문에 장례식장에 방문한 분들도 공영 장례를 찾아 추모할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을 추진하고 있어요.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우리 모두 이웃사촌이었던 거잖아요. 현재 피해 생존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무연고자분들의 공영 장례까지도 많은 관심을 두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특히 협의회 내에서는 유언장을 미리 작성해 무연고자인 피해 생존자의 재산이 국가에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곳에 기부될 수 있도록 하는 활동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국가로부터 배상금을 얻게 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이 돈이 다시 국가로 환원되는 것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 기부되기를 바라는 분들로부터 신청을 받고 있어요. 현재 유언장은 12명 정도 작성하셨고요.
-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의 대표로서 앞으로의 활동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현재 가장 중요한 목표는 피해자 한 분이라도 더 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영리단체이지만 후에는 재단법인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도 있어요. 재단법인을 설립해 저희가 다 죽고 없어지더라도 추모 사업과 위령제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부산시로부터 도움을 받아 형제복지원 피해자협의회와 공동으로 추모 공원을 만드는 것도 최종 목표 중 하나입니다. 가능하다면 건물을 구해 피해 생존자들이 한 곳에 모여서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고요.
또 수용시설 피해 생존자들이 하나가 되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영화숙·재생원 단체 이외에 연대하고 있는 단체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연대체들을 점차 늘려가고 싶어요. 지금도 협의회 안에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요. 명절이 되면 다 함께 모여 윷놀이도 하고, 점심 한 그릇 먹고 바람도 쐬고 오고 그럽니다. 이런 식으로 공동체가 계속 유지되면서 서로 아픔을 나누고 의지하다 보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피해자들이 사회에 안전하게 복귀하고 적응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제대로 만들어지도록 돕는 것도 목표 중 하나입니다. 지금 여러 단체에서 도움을 주고 있는 것처럼 다른 단체들이 저희와 함께해줄 때마다 큰 원동력이 됩니다.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복지동향> 12월호에 실린 인터뷰를 축약한 글입니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전은경, 장지희 활동가가 인터뷰하고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