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어제, 아이 중학교 학부모 익명 단톡방에서 한차례 폭풍이 지나갔다. 현 시국을 걱정하는 이야기가 올라오자 한 학부모가 날 선 대답으로 받은 탓이었다.
"(윤석열) 탄핵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는 상황에서 이런 글 올리지 마세요."
이어진 반박에 그는 단박에 거칠어졌다.
"거대 야당에 밀려 탄압을 받으면 (윤석열이) 계엄보다 더한 일을 할 수도 있다. 언론에 발표되는 것만 믿으면 큰일 난다"라고 이어 답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관리자는 게시물을 삭제했고, 곧 감정적 싸움을 금지한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계엄보다 더한 일"이라는 표현은 내게도 충격적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발표한 계엄 문서 속 논리와 비슷한 이야기를 내 주변에서 들을 줄 몰랐다.
두려움이 불신이 될 때
계엄령은 국가를 지키기 위한 가장 극단적인 조치로 꼽히며, 한국에선 군부가 이를 악용한 전례도 있다. 그런데도 이를 불가피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생텍쥐베리는 <인간의 대지>에서 "오직 알 수 없는 것만이 사람을 겁나게 한다" 라고 했다. 이 말은 두려움의 본질을 꿰뚫는다.
그 학부모의 발언 속에는 '알 수 없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은 누군가에게 두려움과 방어적 태도를 불러일으킨다.
단톡방의 갈등은 단지 개인적 의견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국가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두려워 "계엄보다 더한 일"이라는 과장된 시나리오를 꺼내 들었고, 또 다른 이는 이러한 두려움이 자신을 공격하는 칼날로 다가왔다고 느꼈다.
이 과정에서 두려움은 다른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본래는 미지에 대한 불안이었지만, 곧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과 불신으로 변질되었다. 그럴 일이 아닌데도 말이다.
나는 2016년 겨울 촛불 집회에 나갔다. 그때는 정말 '촛불'을 들고 나가던 시절이었다.
당시 7살이었던 큰 아이에게 손등에 떨어진 촛농의 따끔한 기억은 그 시위를 선명하게 새겼다. 아이는 그날 촛농을 닦아내며 묻던 질문으로, 나는 아이에게 설명하던 말로 그 겨울을 오래 기억했다.
인간의 대지를 읽으면서 '맞서는 자'에 대해 생각하다
그 기억도 점차 희미해져 갈 즈음, 나는 광장에서 새로운 모습을 목격했다. 한겨울 손을 시리게 했던 초와 촛농 대신 지금은 아이돌 콘서트 굿즈인 응원봉이 넘쳐난다. 고가의 애장품을 들고 거리로 나선 MZ세대의 모습을 보며 그들에게도 이 시국이 남의 일이 아니구나 싶었다.
왜 이들은 애장품을 들고 추운 겨울 길바닥을 지킬까? 다시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 한 구절이 떠오른다.
사람이란 일단 사건에 휘말리면 더는 겁을 먹지 않는다. 오직 알 수 없는 것만이 사람을 겁나게 한다. 하지만 누구든 거기에 맞서는 자에게는 그것은 이미 미지의 것이 아니다.
낯설고 두려운 사건도 맞서다 보면 점점 두려움이 사라지고, 오히려 용기가 생긴다. 응원봉은 아마도 그들에게 맞서게 하는 문턱을 낮춰준 도구였을 것이다.
중학생 아이와 계엄이니, 탄핵이니 같은 단어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게 처음에는 한탄스러운 현실로 느껴졌다.
그러나 인간의 대지와 응원봉을 연결해보니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계엄령을 직접 겪지 못한 나는(이전 계엄령이 내렸던 1979년 10월 당시 나는 뱃속의 태아였다) 단어만 들어도 무서웠다. 이제 내 아이들은 '일단 사건에 휘말려' 본 경험으로 인해, 더는 미지의 것이 아니기에 나만큼 겁을 먹지 않을 것이다.
아이에게 학부모 단톡방에서 벌어진 일을 말해줬다. 아이는 단번에 '이상한 사람이야'라고 한다. 나는 의견을 반대할 수는 있지만 사람 자체에게 적개심을 갖는 건 좋지 않다고 말했다.
아이는 삐죽거리면서도 더이상 반박하지는 않았다. 물론 나도 심정으로는 '이상한 사람' 쪽에 동의하지만, 아이랑 그렇게 남을 뒷담화 하는 건 어른의 자세가 아닌 거 같아서 위선을 택해본다.
기왕 벌어진 일, 계엄에 대해, 탄핵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 아이와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서 사람을 겁나게 하는 '알 수 없는 것'들을 줄여나가고 싶다.
안전을 지키되, 아이도 생각하고 참여해 볼 수 있게 사건에 '휘말리게' 해주는 응원봉 같은 아이템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다. 설사 위선일지라도 의견과 사람을 구분해서 사람에 대한 적개심을 줄이는 기술을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다. 그게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의 의무라고 믿는다.
오늘도 나는 광장과 단톡방 사이에서 질문을 품고 글을 쓴다. 이것은 내 방식의 응원봉이 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SNS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