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색과 붉은 색의 공존
자정을 넘기며 한강 작가의 노벨수상식 생중계를 보았다. 한강 작가가 한국인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난 한 주 비상계엄 여파로 초조와 불안이 가득했던 마음 속에 한강 작가의 나즈막한 목소리가 스며드는 듯했다.
"아, 세상은 왜 이토록 잔인하며 동시에 이토록 아름다운가..."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하고 있다 ⓒ 연합뉴스TV 갈무리
"한강의 글에선 흰색과 빨간색이 만납니다. 흰색은 화자와 세상 사이의 보호막인 동시에 슬픔과 죽음의 색이기도 합니다. 붉은 색은 생명을 상징하지만 고통과 피, 칼로 깊게 베인 상처를 의미합니다."
"한강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상처받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한 걸음 내딛거나 다른 질문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힘도 갖고 있습니다. 빛이 사라져도 죽은 자의 그림자가 벽 위를 계속해서 움직이고 아무것도 그대로 지나가거나, 끝나버리지 않습니다."
스웨덴 한림원 종신위원이며 노벨문학상 심사위원이기도 한 엘렌 맛손은 한강을 위한 시상 연설에서 한강의 작품이 가진 힘은 무엇인지 말했다. '매혹적인 부드러움을 가졌지만, 형언할 수 없는 잔인함과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이야기하는 작가'라고 했다.
비상계엄과 노벨상의 공존
이 나이되도록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다. 유독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탓일까, '왜 우리나라 정치는 이토록 후진적일까'라는 수치심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 잠시 치유된 듯 했지만 뿌리깊게 또아리 튼 수구세력의 저질스러움이 언제나 발목을 잡았다.
오히려 자존감을 세워준 것은 문화였다.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미국을 뒤집어 놨을 때, BTS가 전세계 젊은이의 우상이 되었을 때, K-Pop, K-Drama, K-Food에 세계가 열광할 때였고, 특히 이름도 생소한 우리 아이돌 그룹의 공연에 외국 젊은이들이 한국가사를 따라 부르며 열광하는 모습을 볼 때 자랑스럽고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의 화려하면서도 품격있는 무대가 TV화면을 가득 채우고 오케스트라의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노벨수상자들의 입장을 기다리는 동안 '살아있으니 이 모습을 보는구나'라는 뿌듯함과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움'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순간, '붉은 색과 흰 색'으로 씌어진 '내란혐의 김용현 구속영장 발부' 자막이 TV하단을 채웠다.

▲노벨수상자 입장 직전 '김용현 구속영장 발부' 자막이 떴다 ⓒ MBC-TV 갈무리
아,'비상계엄'과 '노벨상'의 공존이라니. 참으로 절묘한 조합이다. 콘서트홀의 블루카펫과 붉은자막위 흰 글자가 묘한 콜라보를 이룬다. 세계 최고의 화학·생리의학·문학·경제, 그 영예로움과 극동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이 하나의 화면 속에서 대비를 이룬다.
우리는 이 행복한 순간에도 여전히 '형언할 수 없는 잔인함'과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운명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것인가.. 그런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들 만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대신 머리 속에 채워지는 단어가 있다.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다.
어떤 상황이 오든 '다이내믹 코리아!'다
광주의 딸, 한강 작가는 제주와 광주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상처를 내면에 담아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녀는 그 고통을 견디며 글을 써야 했고, 그 글 속에서 그날의 아픔과 고통 속에 죽어간 소년과 민중들이 한강 작가의 글이 어떻게 쓰였는지, 그 고통이 여전히 진행중임을 역설적으로 대변하고 있지 않는가.
이번 비상계엄사태가 빠르게 진정될 수 있었던 것은, 국회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젊은 군인들 가슴 한 구석에 '1980 광주의 아픔과 고통'이 여전히 살아있었기 때문이고, 역사가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그것을 초래한 집단들이 어떻게 처벌받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K-Pop, K-Drama, K-Food'에 더해 이제 'K-Book'과 'K-Politics'가 추가되게 생겼다.
붉은색과 흰색은 한강 작가가 자신의 소설 속에서 반복적으로 다루는 역사적 경험을 상징한다. 한강 작가는 "인간은 때때로 본인이 보고 목격하는 것으로 인해 좌절하기도 하며 매번 마음의 평화가 무너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충분한 힘을 가졌다"고 했다.
이번 사태의 수습과정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들이 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으니 '비상계엄'이 부끄럽지만은 않은 이유다.
이제 오랜 세월 우리 사회 깊숙이 뿌리내린 패악한 수구집단들을 철저히 '처단'(처단이라는 용어는 이럴 때 쓰는 거다)해야 하는 과제를 안았다. 그것을 합리적으로 이뤄가는 과정을 통해 전 세계에 'K-Politics'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상황이 오든, 무엇을 하든,'Dynamic Korea!'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언론 진실의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