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위원장 김광동, 이하 진화위)는 12월 3일 제92차 위원회를 열고 한희철·김두황의 군의문사 사건을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결정했다. 두 사람이 보안사(현 방첩사)에 의해 '프락치 강요공작'을 받고 이 과정에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해 죽음에 이른 국가적 타살 사건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날은 마침 윤석열이 내란를 일으키고 이 과정에 방첩사가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나 진화위의 이번 결정은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김두황, 녹화 공작 강요 받아 심적 고통으로 사망"
고려대 학생운동을 이끌던 김두황(경제과 80학번)은 1983년 3월 7일 성북서 형사들에게 영장없이 체포된다. 그는 불법구금 상태에서 조사받다 3월 18일 강제로 군대에 끌려가 103보충대를 거쳐 22사단 55연대에 배치되었고 그로부터 90일 만인 6월 18일 밤 11시 넘어 의문의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22사단 헌병대는 "평소 내성적 성격… 소외감과 열등의식… 복무 중 염증을 느끼고"등의 이유로 자살했다며 서둘러 수사를 종결하고 가족에게는 화장을 강요했다.

▲김두황의 대학때 사진왼쪽에서 두번째가 김두황이다. ⓒ 김두황추모사업회제공
김두황의 유족은 당시 "김두황이 자신에게 M16 네 발을 쏘았다"는 헌병대의 수사발표를 믿을 수 없고 보안사가 김두황으로부터 고려대 학생운동 정보를 캐내기 위해 심문한 정황이 있기에 정확한 진상규명을 요구했지만 소용없었다. 서슬 퍼런 전두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후 2000년 발족한 의문사위원회는 보안사가 자료 협조를 거부해 조사를 제대로 할 수 없어 진실규명 불능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김두황의 유족은 2005년 출범한 진화위 1기에 다시 진실규명을 신청했으나 여기서도 조사가 부실하자 아예 신청을 취하해 버렸다.
진실규명의 기회가 사라지는 게 아닌가 안타까움만 쌓여가던 터에 김두황추모사업회의 양창욱 회장(고려대 사회학과 80)이 2020년 12월에 출범한 진화위 2기의 문을 두드려 2022년 진실규명 서류를 접수했다. 진화위는 이 신청을 받아들여 조사 개시를 결정했고 2년 만에
"김두황이 군 생활을 하면서 강제징집에 따른 부대 배치 및 보직에서 차별을 받았으며, 특히 보안부대로부터 군입대 전 학생운동을 함께한 동료들의 명단 제출을 강요받는 등 녹화공작을 받았고, 이에 대한 심적 고통으로 사망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울러 정부에 대해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사망했음을 인정하고 유가족에 대한 사과와 화해를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의문사 41년 만에 사건의 진실에 다가간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한희철, 고문으로 강요하는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사망"
한편 같은 날 내려진 한희철 의문사에 대해 진화위는 김두황 의문사보다 더욱 진전된 조사 결과를 내놨다. 보안사가 한희철에게 프락치 활동을 강요하면서 "매일 2시간 이상 구타를 자행하고 폭행 도구는 70~80cm의 곤봉 외에 스테인레스 줄자를 이용했다"고 밝힌 것이다.
한희철은 국립철도고등학교를 나와 1979년 서울대 기계설계학과에 입학한 후 서울대가톨릭학생회에서 활동한다. 아울러 그는 성남 지역에서 대학생연합회, YMCA ,수진동 성당의 가톨릭노동청년회(JOC)에서도 열심히 움직였다.
대학 졸업 후에는 사제가 되어 노동 사목을 하려던 한희철은 4학년인 1982년 12월에 입대한다. 보안사는 한희철의 학생운동 전력을 확인한 후 1983년 12월 5일 자대인 제5사단 사단본부에서 보안사령부 과천분실로 영장없이 끌고 갔다. 여기서 한희철은 12월 9일까지 5일간 프락치 강요 공작을 당하면서 진화위가 밝힌 고문을 당했는데 12월 10일 일단 자대로 복귀한 후 다음 날(11일) 보안사령부의 추가 조사를 앞두고 의문사를 하게 된다.
예비역 헌병 소령인 아버지 한상훈이 한희철의 사망 직후 "보안사에서 한희철을 조사한 적 있느냐"며 정확한 진상규명을 요구했으나 헌병대는 이를 부인하고 화장을 강권했다. 그 후 유가족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진실 규명을 신청했고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도 자체 조사를 벌여 양 기관 공히 한희철이 운동권 조직과 동료에 대한 진술을 고문으로 강요하는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사망했다고 인정했다.
이번 진화위는 기존 두 기관의 조사에 더해 보안사가 " 대공업무와 관련 적극 협조하겠습니다"와 같은 서약을 강요하면서 프락치 강요 공작을 벌였음을 새로 밝혀냈다. 또 유족의 진상규명 운동에 대처하기 위해 1984년 3월 28일부터 1989년까지 무려 6년 동안 가족을 사찰했음을 확인했다.

▲김두황, 한희철 추모사업회 회원들은 진화위의 진실 규명을 환영하면서도 불철저한 결정을 나무랐다. ⓒ 민병래
가해자를 밝혀야 한다
진화위의 이번 진실규명에 대해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대책위원회'는 10일 11시 진화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화위의 이번 진실규명을 환영하면서도 조사의 미흡성을 질타했다. 김두황추모사업회의 양창욱 회장은 보안사의 녹화공작 4인방 최경조·서의남·고영준·조창현, 김두황을 22사단으로 끌고 가 죽음으로 내몬 심사장교 여인국과 대대장 조금주에 대해 그 어떤 처벌도 없었다고 규탄하며 더 철저한 조사를 통한 가해자 책임을 명확히 해 법적 처벌의 근거를 마련하라고 주장했다.
또 한희철 추모사업회의 이은희 회장도 "한희철이 의문사한 5사단은 정성희(연대 영독불계열 81)가 82년 6월에, 이윤성(성대 사학과81)이 83년 5월에 사망했던 곳이기에 5사단 보안부대인 205부대의 책임자, 심사장교 유준남과 수사관이 어떤 가혹행위를 한희철에게 가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