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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철이 돌아왔다. 어머님이 계실 때는 12월 첫째 주 토요일에 김장을 하곤 했다. 올해 1월에 어머님이 갑작스레 폐렴으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유명을 달리하셨다. 장례를 치른 후 정신을 차리고보니 설날이 돌아왔다. 어머님이 없이 맞는 첫 설이었다. 설 명절을 맞으면서도 막막했지만 더 걱정이 되었던 것은 어머님 없이 맞는 김장이었다.

절임배추도 김장양념도 내가 주문해서 들고가지만 어머님은 무와 갓, 미나리, 생새우 등의 건더기를 따로 준비해서 고춧가루, 액젓, 매실액기스 등을 추가해서 김칫소를 완성하셨다. 10월에 절임배추를 예약할 때만 해도 평소처럼 20킬로짜리 두 박스를 주문하고 김장양념도 2개 주문하면 되었으니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김장날로 못박아둔 날이 가까워오자 뭐 마려운 똥개마냥 안절부절 못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가만있자, 어머님이 무는 몇 개나 준비해 두셨더라? 그중에 몇 개를 채썰어서 김칫소에 넣고 몇 개는 큼직하게 썰어 배추김치 사이에 박아두셨더라? 그 푸성귀가 미나리랑 갓이 맞을까? 쪽파도 있었던가? 근데 생새우는 어디서 사야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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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이리 기억들이 흐리멍텅한지. 매번 조수석에 앉아서 시댁을 갔어도 막상 내가 운전대를 잡으니 언제 어느 차선으로 옮겨야 제대로 가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던 것과 같았다. 옆에서 100번을 봐도 그게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보는 것과 '어머님이 하시는 일, 나는 보조'라고 생각했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축적되어 있지 않았다.

재택근무라고는 해도 아침 저녁으로는 시장이 열려 있지 않거나 이미 닫을 시간이고 점심시간에도 재래시장까지 갔다 올 시간이 없고 너무 빨리 사놓아도 안 되고 딱 김장 전에 사야하는 것이다 보니 김장을 하기로 한 주의 평일에는 매일매일 쫓기는 느낌이었다. 시험 준비를 다 못했는데 '자 지금부터 시험시작!'이라고 하는 악몽처럼 김장날은 잡아놓았는데 재료가 제때 준비되지 않으면 어쩌지? 싶어 초조한 날들이었다.

그러다 구세주가 나타났다. 목요일마다 아파트에 오는 알뜰장터가 열린 것이다. 매주 열리는 장인데 기억도 못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알뜰장터 야채 가게를 찾았다. 무를 사야지 했는데 큰 무 하나가 5천 원이었다. 8개쯤 사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큰 무는 4개밖에 없었고 무청까지 달린 조금 작은 무 한 단이 1만2천 원이었다.

이를 어쩌나 싶어 고민하다 작은 무 한 단과 큰 무 네 개를 사려고 하니 옆에서 장을 보던 어르신이 작은 무로 두 단을 사면 된다고 일러주셨다. 사면서 무청은 어떻게 해야 하냐고 여쭈니 데쳐서 시래기로 먹으면 된다고 알려주시면서 "새댁이에요?" 하고 물으셨다. 아닌 것 같은데,라는 미심쩍음이 섞인 눈빛이었다. "아, 살림을 잘 몰라서요." 머쓱하게 대답했다. 절임배추양으로 김장 규모를 밝히고 물어물어서 갓도 사고, 생강도 샀다.

김장에 필요한데 사지 못한 것은 생새우와 미나리였다. 주말에 김장하러 갈 때 시댁 근처 재래시장에 가서 생새우와 미나리를 사면 될 텐데 아직 초보운전을 벗어나지 못한지라 가보지 않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쇼핑할 자신이 없다.

남편이 한국에 있다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지만 외국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이 연말을 맞아 한국에 들어오려면 아직 2주가 남았다. 그러다 아버님께 부탁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아버님이라면 누구보다 기쁘게 너끈히 그 일을 해주실 것이다.

아버님께 전화를 드렸다. 아버님은 구순이 넘으신 연세에 혼자 지내시면서 살림을 너무나 잘 하시고 아직도 총기와 건강이 좋으시다.

"아버님, 김장에 쓸 생새우 400그램이랑 미나리 한 단만 사다주세요."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맞는 첫 김장을 그렇게 아버님의 도움을 받아 겨우 준비를 마쳤다. 김장하는 날에는 중학생 아들을 데리고 시댁에 갔다. 40킬로그램 절임배추를 차에 싣고 내리고 김치통을 쌓고 옮길 일꾼이다. 아이에게는 몇 주 전부터 그날은 김장날이니 약속을 잡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계속 환기시켰다.

아버님은 절임배추의 물을 뺄 소쿠리, 양념을 섞을 대야, 김치를 담을 통을 깨끗하게 씻어서 물기 하나 없이 잘 말려 준비해 두셨다. 김장을 하는 내내 내가 하는 일을 보고 계시다가 필요할 때 필요한 도움을 주시곤 했다. "나 조수 잘하지?" 아버님이 자랑스레 물으셨다. "네, 아버님 최고예요." 주거니 받거니 죽이 척척이다.

 힘쓰는 채칼질은 구순의 아버님이.
힘쓰는 채칼질은 구순의 아버님이. ⓒ 최혜선

집에서 손질해간 무 10개 중 반은 배추김치를 통에 담을 때 찔러넣을 석박지용으로 자르고 나머지 반은 채썰어서 김칫소로 쓰기로 했다. 어머님이 지휘하시던 김장 프로젝트를 내가 지휘해야 해서 무서운 점이 이것이다. 내가 정하는 대로 흘러간다는 것. 이 방향이 맞는지 틀리는지 조수들은 말해주지 않는다. 석박지용 무는 중3 아들이 자르고 김칫소로 쓸 무채는 아버님이 채칼로 쓱쓱 밀어주셨다.

두 남자가 무를 담당하는 동안 나는 푸성귀들을 씻고 물기를 털어서 썰어두었다. 주문한 김치양념을 대야에 풀고 무채와 쪽파, 갓, 미나리, 생새우 다진 것을 넣고 다진마늘과 다진생강, 매실청과 멸치액젓, 고춧가루를 적당히 추가한 후 휘휘 저어 고루 섞이게 한 후 새끼손가락에 양념을 묻혀 '쫍' 하고 맛을 보았다.

'아, 어머님이 계실 때 고춧가루를, 액젓을, 매실청을 추가하실 때 어떤 맛이 날 때까지 조정을 한 거였는지 알아둘 것을, 어떤 맛이 났을 때 이제 됐다 하셨는지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아쉬워해봤자 만시지탄이다. 자신은 없지만 20여 년 살림을 해온 내공으로 가늠해보는 수밖에 없다. 절임배추가 제법 짭쪼름했으니까 김치양념의 짠맛 정도는 이 정도면 될 것 같고 매운맛과 단맛 밸런스도 이 정도면 되겠어.

 며느리는 버무리고 아버님은 덮고
며느리는 버무리고 아버님은 덮고 ⓒ 최혜선

내 기준에 따라 스스로 오케이한 김치 양념으로 버무리기 시작한다. 5통 분량의 김치가 나왔다. 실온에 이틀 두었다가 김치냉장고에 넣어주시면 된다고 알려드리면서 또 자신이 없다. '이틀 맞지? 맞겠지? 그랬었지?' 어머님 가신 후 담은 첫 김장김치, 맛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제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블로그나 브런치에 게재될 수 있습니다.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 70년대생 동년배들이 고민하는 이야기를 씁니다.
#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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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만드는 삶을 지향합니다. https://brunch.co.kr/@sword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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