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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 전주입성도 동학농민혁명군은 갑오년 1894년 4월 27일(양5.31) 전주성 함락에 피를 흘리지 않은 무혈입성(無血入城)을 성취하였다.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의 격한 감정의 모습을 박홍규 화백이 실감나게 그림으로 재현시켰다.
동학군 전주입성도동학농민혁명군은 갑오년 1894년 4월 27일(양5.31) 전주성 함락에 피를 흘리지 않은 무혈입성(無血入城)을 성취하였다.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의 격한 감정의 모습을 박홍규 화백이 실감나게 그림으로 재현시켰다. ⓒ 박홍규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갑오년(1894) 일제의 총칼 앞에 좌절 또는 실패하였다고 말들을 한다. 물론 그때 동학혁명만을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동학혁명운동은 좌절을 넘어 의병혁명운동, 3.1만세혁명운동, 임시정부혁명운동, 독립혁명운동으로 끊임없이 계승되었다.

또 일제로부터 해방 후 3.1통일혁명운동, 4.19혁명운동, 5.18혁명운동, 6.10혁명운동, 10.29촛불혁명운동으로 끊임없이 계승되었다. 또한 최근 윤석열 정부의 불법계엄령에 맞선 12.3혁명운동으로 다시 승화되고 있다. 이번 12.3 혁명운동은 윤석열 정부가 완전 퇴진 및 탄핵될 때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그리고 남북평화통일이 달성될 때까지 동학혁명운동은 쉼없이 계승되고 재현될 것이다.

*동학 천도교 보국안민실천연대는 12월 4일, '윤석열 대통령은 즉각 퇴진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전주성점령, 사람이 하늘인 세상을 열다

[전주성 점령은 모두가 하늘인 세상을 열었다. 우리나라 역사 이래 처음 있는 일로 개벽, 즉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세상이었다. 이는 백성들의 억압과 탄압 그리고 계급과 차별을 한꺼번에 없애버리는 그야말로 해방이요 혁명이었다. 한번 양반이면 대를 이어 양반이고, 한번 노예이면 대를 이어 노예로서 개돼지 취급을 받던 민중들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사람이 하늘인 세상을 본격적으로 열어젖힌 것이다.]

갑오년 1894년 4월 27일(양.5.31) 역사적인 날이 밝았다. 동학군은 용머리고개에서 선봉대와 우군·좌군을 나눠 서문 밖 다가산과 남문 밖 곤지산으로 진격할 준비를 하였다.
또 이미 백성과 장사꾼으로 위장한 동학군 수백 명을 전주성 안팎에 잠복시켜 장꾼들과 섞이게 했다. 한편 김문현은 평민의 옷으로 변복한 감영 아전과 하인들을 총동원하여, 성 밖의 민가 수천 채에 불을 질러 동학군에게 협조하지 못하도록 천인공노할 짓을 벌였다.

전주성 점령의 총공격 신호는 관군에게 빼앗은 구식 대포를 용머리고개에서 크게 한 방 날리는 포성으로 하였다. 동학군이 진격할 준비가 완전히 갖추어진 오시(12시)에, 서문 방향에는 전봉준과 손화중의 중군과 우군, 남문 방향에는 김개남의 좌군과 김인배 부대를 중심으로 학익진을 폈다.

전주남문(풍남문) 현재 풍남문이라 불리는 옛 전주남문의 모습니다. 전봉준 사진 한 장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대변해주듯 전주남문 사진 한 장이 동학군의 전주성 점령을 대변해준다. 본 사진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전주남문(풍남문)현재 풍남문이라 불리는 옛 전주남문의 모습니다. 전봉준 사진 한 장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대변해주듯 전주남문 사진 한 장이 동학군의 전주성 점령을 대변해준다. 본 사진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학익진과 용의 전법으로 단숨에

학익진(鶴翼陣)이란 처음에는 옆으로 일자진(一字陣)을 취하고 있다가 적군이 공격하면 중앙의 부대가 뒤로 물러나고, 좌우의 부대가 앞으로 달려 나가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형태로 적을 포위하면서 공격하는 전법이다. 학익진은 마치 용(龍)이 호랑이를 잡는 그런 전법과 같다.

동학농민군은 용머리고개에서 전주성에 발사한 대포 소리를 신호로 소총과 기관총을 허공에다 일제히 쏘아 대며 총공격을 시작했다. 또 최경선과 기마병들이 용의 전법으로 전주성 주위를 돌면서 요란한 함성, 말굽 소리와 먼지를 일으키며 질풍노도와 같이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백성들도 동학군과 함께하고

이때 미리 잠복한 서영도와 동학군들이 성안에 불을 놓아 관군을 혼란시켰으며, 무방비 상태인 서문과 남문을 재빨리 열어젖혔다. 동학군이 서문과 남문을 열자 전주성 밖에서는 총소리와 대포 소리에 놀란 장꾼들이 일부는 흩어져 도망갔고, 일부는 시장 사람들과 섞여서 성안으로 함께 밀려들어갔다.

전주성의 서문과 남문이 열리자, 전봉준과 손화중의 동학군들은 총과 활을 손에 쥐고 서문을 통해 용이 폭풍을 일으키듯이 단숨에 입성하였다. 김개남과 김인배의 동학군들은 총을 쏘고 도끼를 휘두르며 남문을 통해 입성하였다. 또 그 뒤를 이어 전주성 밖을 돌면서 위협의 공포탄을 쏘아대던 최경선의 선봉대와 기마군들도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입성하였다.

관군의 대포에서 물만 쏟아지고

동문과 북문을 지키던 지방군과 향군들은 대포 몇 방만 겨우 쏘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대포에서는 포탄이 날아가지 않고 물줄기만 뿜어져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동학군 여성들이 변장하고 성내로 들어가 몰래 대포에 물을 가득 부어넣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동학군은 하늘의 조화를 부렸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전라감영 관계자들은 난데없이 등 뒤의 서문과 남문 쪽에서 나는 포성과 총성, 우레와 같은 함성에 천둥 벼락을 맞은 사람들처럼 혼비백산하였다. 동학군들이 허공에다 쏘아대는 총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 요란하였고, 콧속을 파고드는 화약 냄새는 폐부까지 할퀴었다. 동학군이 전주성 안으로 밀려들자 지방군과 향군들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다가 넘어져 뒹굴거나, 얽히고설켜 성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전라감영 선화당 전라북도와 전주시에서 공개한 전라감영 선화당의 옛 모습니다.
전라감영 선화당전라북도와 전주시에서 공개한 전라감영 선화당의 옛 모습니다. ⓒ 전주시.전북특별자치도

김개남의 사자후는 산천을 떨게 하고

전봉준, 손화중이 이끄는 동학군은 서문에서 감영으로 진군하면서 '백성들은 안심하라. 동학군은 질서를 지켜라. 관군들을 찾아내어 포박하라!'는 재빠른 명령으로 전주성 함락 초기에 질서를 바로잡아나갔다.

김개남, 김인배가 이끄는 동학군은 남문에서 선화당으로 돌진했다. 김개남은 '관군들을 쫓아 죽여라. 탐관오리들을 잡아 처단하라. 관찰사를 찾아 포박하라!'고 사자가 우렁차게 외치듯이 혁명군의 위상을 천하에 떨쳤다.

김문현은 훗날 죽음을 맞이하고

전주성에 입성한 동학농민군의 구호들이 동서남북으로 메아리쳤다. 그때 판관, 영장, 관원들을 데리고 미리 준비한 해진 옷과 짚신으로 영락없는 거지 복장을 하여 동문 밖으로 달아나던 김문현의 귀에 "관찰사를 포박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김문현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면서 공주 쪽으로 도주하였다. 김문현은 후일 전주성을 버리고 도주한 죄로 유배를 가고 결국 처형당한다.

김문현과 함께 도망가던 판관 민영승과 영장 임태두는, 조경묘 참봉 장교원과 박봉래가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조경전의 위패를 들고 도망치는 것을 붙잡아 어진과 위패를 회수하여 위봉사 대웅전에 모셨다. 민영승 등은 이태조 초상화를 안전하게 보호했다는 명분으로 전주성을 포기한 죄를 면하려 했다.

김문현, 민영승, 임태두 등은 동학군에게 쫓기는 지방관군들의 모습을 외면하였으며, 피난에 정신없는 백성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죄를 면할 생각만으로 비겁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하였다. 전주성 함락 후 홍계훈은 '이렇게 순식간에 전주성이 점령된 것은 영부(營府)내의 관속(官屬)배들이 동학군과 내통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정부에 보고하였다.

전주성 서문터 표지석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할 때 서문과 남문으로 입성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전봉준 장군은 서문을 통해 전주성에 들어갔다. 서문은 현재 조그마한 유적표지석만 덩그러이 지키고 있다.
전주성 서문터 표지석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할 때 서문과 남문으로 입성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전봉준 장군은 서문을 통해 전주성에 들어갔다. 서문은 현재 조그마한 유적표지석만 덩그러이 지키고 있다. ⓒ 동학혁명기념관

혁명사에 전무한 동학군의 무혈입성

동학농민혁명군은 갑오년 4월 27일(양1894.5.31) 전주성 함락에 피를 흘리지 않은 무혈입성(無血入城)을 성취하였다. 동학군은 전봉준 총대장의 명령에 따라 도망치는 관군들을 끝까지 추격하지 않고 성문 밖으로 멀리 쫓아 버렸다. 군율에 따라 항복한 관군들 중 부상자들은 치료해 주고, 저항한 자들은 체포하여 구금하였다.

그런데 김개남 총관령의 동학군은 전주성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많은 관군들에게 부상을 입혔다. 결국 전봉준의 만류로 멈췄지만 언제 다시 불거질지 모르는 김개남의 완고하고 과격한 행동은 전봉준과 지도부를 긴장하게 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장악하여 평정해 가자, 피난길에 나서지 않은 전주성 안팎의 백성들은 동학군을 대대적으로 환영하였다.

"동학군 만세!"
"녹두장군 전봉준 만세!"

전주성을 완전 장악하다

전봉준은 전주성을 점령한 직후 4대문을 걸어 잠그고 방비를 철저히 하라 지시하고, 전라감사 집무실인 선화당에서 동학군 지도부 회의를 열어 중요사항을 결정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선화당에 대도소를 설치하여 동학군 본부로 사용하고, 기율을 어기거나 백성들을 괴롭히는 등의 사사로운 행동을 하는 자들은 엄벌에 처한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전주성의 4대문을 지키는 역할 분담과 성벽 위를 수비하는 부대도 임무를 맡겼다. 또한 부상자나 노약자 등은 귀가토록 하였다.

전봉준은 1차 회의를 신속하게 끝내고 긴급 명령을 내렸다.

"각 부대는 4대문을 중심으로 각자 위치로 향할 것이며, 대문과 대문 사이의 소문과 성벽까지 철저히 수비와 감시를 해야 한다. 각 부대와 지원부대는 신속히 이동한다."

동학농민군은 조선왕조의 발상지이자 전라도의 수부인 전주성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전라감영이 자리한 전주성은 조선 왕가의 본향, 즉 풍패지향(風沛之鄕)이라는 상징성과 만경평야와 서남해안의 풍부한 물산을 관리하는 수부(首府)로 조선왕조 재정의 근간을 담당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동학군은 전주성 점령이라는 최대 성과를 이루었고, 감영군과 경군 등은 전주성을 빼앗김으로써 최대 손실을 초래한 것이다.

한양을 칠 것이냐 말 것이냐

전주성 안팎이 질서와 평온을 되찾자, 동학군 지도부는 2차 회의를 열었다. 회의의 주제는 곧바로 한양을 치러 북상하느냐, 아니면 전열을 가다듬고 휴식을 취한 후 다음 행동으로 옮기느냐다. 전봉준 총대장은 전략회의에서 의견이 엇갈려 쉽게 결론을 내지 못했다. 한양직격에 있어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한 이유 중 두 가지 사항이었다.

첫째는 경군연합군이 인원 보충과 무기 확보로 한양으로 직격하는 동학군 뒤를 치면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외세 개입 즉 청군과 일본군의 개입에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우려에서이다.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의 전령과 동학군 밀정들의 보고를 인용하면서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지도부와 밤이 깊도록 논의하였다. 그 결과는 한양성을 치는 것은 일단 보류하고 관군과 일전을 치루는 전략을 준비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그날 밤, 성 안팎은 전쟁터의 흔적 위로 평온한 고요가 찾아들어 어느덧 소쩍새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왔다. 전주성 4대문과 성벽 위에서는 수많은 깃발과 횃불 들이 바람결에 춤추듯 나부꼈고, 여기저기 줄지어 순찰을 도는 동학군의 발소리는 긴장하고 피로한 탓인지 불규칙하게 들려왔다.

전봉준 격문 전봉준 장군이 발표했던 격문을 보면 전주성 함락의 명분이 담겨있다.
전봉준 격문전봉준 장군이 발표했던 격문을 보면 전주성 함락의 명분이 담겨있다. ⓒ 박홍규

잠못이루는 전봉준의 리더십

그날 밤, 전봉준은 한숨도 자지 못하고 비서인 정백현과 송희옥을 대동하고 보초병들을 위로했다. 또 치료소에 들러 부상자들의 손을 잡아 주고, 상처가 심한 동학군들을 끌어안으며 말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동학군들은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고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으나, 내일이 오면 피 냄새가 진동할, 생사를 알 수 없는 운명이 자신들에게 닥친다는 사실에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이렇게 혁명의 밤은 깊어 가고, 곧 찬란한 해가 꿈과 희망으로 솟아오를 것이다. 전주성 점령은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에서 가장 큰 성과를 이루게 될 것이다.

「전주성 점령은 단순한 한 지방의 감영을 점령한 사건이 아니다. 당시 전주성 안에는 전라감영 즉 전라감찰사인 전라감사가 상주해 있는 곳으로,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와 전라남도, 광주광역시, 제주특별자치도까지 관할하는 거대규모의 전라도 행정의 중심지였다. 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면 조선왕조의 본향이자, 곡식 즉 쌀 생산에 있어 전국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곳이라 조선정부로서는 마치 한양성을 빼앗긴 것처럼 큰 충격을 받고 균형이 흔들리며 심하게 비틀거리고야 만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동학#천도교#동학농민군전주성점령#동학농민혁명130주년#수운최제우선생탄신2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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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또 현(現)천도교선도사·직접도훈, 전(前)전주녹색연합 공동대표, 전(前)전주민예총 고문, 전(前)세계종교평화협의회 이사 등 종교·환경단체에서 임원을 엮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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