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척간두(百尺竿頭), 그때나 지금도 위기이다
올해가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동학보은취회 131주년이다. 그때나 지금도 백척간두의 위기이다. 지난 이천이십 사년 십이월 초삼일 이십이 시 이십삼 분경이었다. 그날 서울의 밤은 일상적인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그런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인지 봉창 뜯는 소리인지 모르지만, 대한민국 대통령께서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그럴듯한 계엄 포고령을 살펴보니 마치 대한민국이 더할 수 없이 어렵고 위태로운 지경이라는 백척간두를 극복하고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는 그런 취지로 보였다.
내가 볼 때는 미안한 말이지만 윤 대통령께서 그동안 외치 즉 외교관계 등 나라의 상황을 풍전등화(風前燈火)로 몰고 간 것은 아닌지, 또 내치 즉 사람사는 사회에서 늘 그래왔던 시국 상황들, 평온한 일상을 마치 일망타진(一網打盡)이라도 할 것처럼 스스로가 백척간두 상황을 만들지 않았나 뒤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보아왔듯이 권력이 국민을 이길 것 같지만, 결국 국민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권력이다.
대한민국은 법치 국가이다. 만약 대통령과 비상계엄령 관련자들이 불법계엄과 내란음모 등 국법을 위반했다면 당연히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법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는 헌법적 취지에서 드리는 말씀이다. 끝으로 대통령께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는 심정으로 '비상계엄 선포가 잘못되었다'고 용서를 빌기 바란다. 그리고 현재 백척간두의 위험천만한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국민들의 현명한 판단과 행동에서 결정된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혁명을 단행하다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4월 26일(음) 금구 원평에서 정부를 향해 불가역적(不可逆的)의 돌이킬 수 없는 혁명을 의미하는 행동을 단행한다. 임금의 효유문을 가지고 온 이효응과 배은환을 단칼에 효수했다. 또 임금의 위로금을 관군에게 전하려 한 선전관 이주호와 그 일당들을 공개처형 해버린다. 이는 단순히 국정을 개혁하라는 데서 더 나아가, 동학농민군이 혁명군임을 천하에 선포한 것이다. 전봉준 대장과 혁명군 지도부는 국내외적으로 시국상황이 백척간두라는 인식에 그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혁명의 대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전주성으로 향하기에 앞서 전봉준은 황룡전투에서 승리한 동학농민군을 격려하였다. 그리고 승전의 의미를 말하면서, 전주성 점령에 대한 작전계획을 설명하였다.
"우리는 지난번 황토현에서는 전라감영군을 격파하였으며, 이곳 황룡에서는 경군을 무찔렀습니다. 이제 목표는 전주성 점령입니다. 우리의 1차 목표는 전주성을 함락하여 백척간두의 나라 위기를 극복하는데 있습니다. 최경선의 기마병은 둘로 갈라져, 하나는 김개남 좌군의 선봉에, 다른 하나는 손화중 우군의 선봉에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이방언의 동학군은 후군의 역할로 우리 군과 관군 사이에 매복해야 합니다. 전주성을 점령할 때까지 저들을 따돌리고 골탕 먹여야 합니다."
전주성을 향하여 출진하라
전주성을 향하여 출진하라는 전봉준의 명령이 떨어졌다.
"동학군은 일제히 진격하라!"
동학농민군은 나팔 신호에 따라 팔자진법에 의한 신출귀몰한 진격을 시작하였다. 노령을 넘어 깃발과 기마병을 앞세운 채 조용히 그리고 재빨리 사라졌다가 나타나며 갈라졌다가 합치기를 반복하였다.
전봉준은 행군하다 갈재를 지나면서 길가에 있는 전일귀효자비(全日貴孝子碑)에 잠시 틈을 내어 고사(告祀)를 올렸다. 훗날 12월 동학군이 패하고, 일본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전봉준이 고사(告祀)를 지냈다는 이유로 효자비(孝子碑)에 불을 질렀다.
이두황은 마구잡이로 보복하고
동학군이 장성에서 사라지자 그제서야 이두황의 토벌대가 나타났다. 이두황은 황룡전투 전후에 조금이라도 동학군에게 협조했다는 의심이 드는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수색하여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고 무참히 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홍계훈은 그동안 싸움에서 패전하여 흩어진 지방군과 한양의 경군 등을 합쳐 정예 3천 명, 향군 등 관군 소속 군사 모두 합쳐 5천 명 규모의 관군연합부대를 재편성하여 총지휘하는 대장의 위치에 있었다. 이제 동학농민군과 경군연합군의 대결로 치닫게 된 것이다.
경군은 동학군처럼 부대별로 나누어 추격하는 것이 아니라, 선봉대를 중심으로 대군을 이루어 추격하였기 때문에 그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방언의 후군이 매복과 기습 공격을 하여 제대로 추격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면서 자신들이 위험하지 않을 때만 추격하는 소극적인 양상을 보였다.
김개남은 본대를 이탈하여 응징하고
동학농민군은 4월 24일(양.5.28) 오후 장성을 출발하였다. 동학군 본진이 전주로 향하는 중간 거점인 원평으로 가는 도중, 김개남의 좌군은 4월 25일 정읍에 쳐들어갔다. 그리하여 초토영 운량감관 김평창의 집을 박살내고, 태인에서 손화중의 우군과 합세하여 원평으로 진격하였다.
거침없이 진군하여 4월 26일 원평에 도착한 동학군 본진은 귀미산 앞 원평천 둔치에 집결하였다. 전봉준은 전주로 향하기 전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작전을 환기했다.
"좌군은 금구대로를 통해 진격하고, 우군은 청도리고개를 넘어 전주로 진격할 것입니다. 두 군은 삼천천 둔치에 진을 칠 것입니다. 그리고 삼천천 둔치 주둔 병력은 용머리고개를 넘어 서문과 남문 근처로 이동한 후, 전주성을 칠 준비에 들어갑니다."
동학농민군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한다는 것에, 홍계훈은 동학군 평정에 어려운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지난해 귀화(歸化)한 자가 금일에 다시 일어나고 또 동쪽에서 쫓으면 서쪽으로 달아나니 초멸할 길이 만무하며 또 우리는 적은데 그들은 많아 병력을 나누어 여러 방향으로 추격하기가 어렵다.』
원평에서 불가역적의 혁명을 선포하다
전봉준 총대장은 동학군 지도부와 논의해서 전주성으로 진군하기 직전에 효유문을 가져온 칙사들과 내탕금을 지니고 온 자들을 원평에서 처단하기로 하였다. 김개남 총관령의 강한 주문에서 그렇게 결정되었다. 임금과 정부에 동학농민군의 혁명에 대한 의지를 확실히 전달하고 만천하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단행하기로 하였다.
"우리 동학군은 이제 임금과 정부에 혁명군이라는 것을 공개 선포한다. 임금의 효유문을 가지고 온 이효응과 배은환을 효수한다. 또 임금의 위로금을 관군에게 전하려 한 선전관 이주호와 그 일당들을 처형할 것을 명한다."
원평에서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결행한 이 광경을 목격한 동학군들은 큰 함성으로 의지를 드높였고, 지역 백성들은 지지를 보내긴 했으나 무서워 몸을 떨었다. 그리고 숨어서 염탐하던 관군의 첩보원들은 두려움과 경계의 눈빛으로 몸을 바짝 움츠렸다. 또한 승려군들은 죽창을 잠시 내려놓고 목탁을 치며 효수당한 이들 앞에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염불을 하였다.
원평천 둔치에 운집한 1만여 명의 동학군들도 하늘과 땅이 진동하도록 환호성을 지르며 발을 굴러 혁명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전봉준은 굳은 얼굴로 김개남의 눈치를 살피면서 동학군 지도부에 속삭이듯 심정을 밝혔다.
전봉준은 무혈혁명을 강조하고
"우리가 혁명을 선포한다는 결의로 이들을 처형했지만, 앞으로 가능한 한 인명 살상을 삼가면서 우리의 과업을 완수했으면 합니다. 이제 전주성을 점령할 때는 피를 흘리지 않는 작전을 세우겠습니다."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장성 황룡전투와 금구 원평에서 왕이 보낸 칙사 등을 처형한 후 동학정신을 뒤돌아보면서, 적과 싸울 때의 전투에 대한 원칙을 세웠다.
『동학군은 목숨을 건 전쟁에서도 가난하고 어려운 백성들을 배려한다. 농민들은 물론 관군이나 탐관오리의 지배층을 포함한 모든 인민들의 생명을 존중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푼다. 동학군들 모두가 생명존중에 있어 생물과 무생물도 함부로 해치지 않는다.』
불살생, 사람 목숨을 하늘 목숨처럼
특히 동학군은 적 즉 관군을 대할 때 4가지 약속을 다시 강조하였다.
『첫째_적과 맞서 싸울 때마다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고의 공으로 삼는다. 둘째_어쩔 수 없이 전투에 임하더라도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하고 죽이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셋째_진군할 때마다 사람과 주변 사물에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한다. 넷째_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끼리 우애가 깊으며 나라에 충성하고 벗 사이의 믿음이 두터운 사람이 사는 촌락으로부터 10리 이내는 주둔하지 않는다.』
전주성을 점령하라
전봉준은 마침내 4월 26일(양5.30) 금구와 원평에서 전주성을 향하여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선봉대 기마병은 둘로 나뉘어 좌군과 우군의 선봉에 선다."
"좌군은 금구 김인배 부대와 합류하여 대로로 출진한다."
"우군은 금산사 앞쪽을 돌아 청도리 고갯길로 출진한다."
"동학군이여! 앞만 보고 전진하라! 전주성을 향하여 진격하라!"
김개남, 전봉준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김개남의 좌군은 명포수들로 구성된 별동대와 기마병을 앞세우고, 제일 먼저 진군을 서둘렀다. 그 뒤에는 김개남과 함께 도끼 등 살벌한 무기로 무장한 부대가 따랐다. 김개남의 좌군은 포수, 노비, 백정, 승려, 장인, 의적, 산적들까지 가담한 막강한 부대였다. 김개남은 남주송과 김중화 접주를 좌두령과 우두령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대두령이란 이름으로 부대를 지휘하며 진군했다. 김개남은 이때부터 독자조직과 독자노선으로 전봉준의 통제에서 벗어난다.
손화중의 우군은 김규일 두령과 기마병을 앞세우고 선봉에 임천서, 좌두령에 강경중, 우두령에 손경찬, 후방에 고영숙, 참모장에 오시영이 각각 지휘하는 부대를 거느리고 힘차게 진군하였다. 손화중은 활과 창으로 무장한 명사수들의 궁수대가 앞서고, 관군에게 노획한 소총으로 무장한 소총부대가 궁수대를 뒤따랐다.
동학군은 그동안 관군에게서 압수한 소총 수십 정과 기관총과 대포도 한 문씩 가지고 있었다. 전봉준은 손화중과 함께 우군의 선봉에서 지휘했다. 금구의 김인배 두령이 좌군에 참여하기로 하여, 전봉준은 우군에 참여한 것이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파직되고
한편 전라감사 김문현은 감영군 첩보병들에게 동학군들이 좌우로 나뉘어 전주성을 향하여 파죽지세로 몰려오고 있다는 급보를 받았다. 김문현은 이미 4월 18일 자로 동학군에게 부적절하게 대응한 죄로 파직된 상태에서 후임 감사 김학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업무를 인계하지 않은 상태라 감사직을 수행하면서, 동학군이 전주감영과 가까운 원평에 도착하자 정부에 급히 보고서를 올렸다.
『감영군은 모두 출정하였고, 초토사의 경군도 따라가 전주성이 비었는데, 저들은 이미 원평에 이르러 곧 전주로 진격할 것 같고, 성안에는 관군이 보이지 않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전주성을 지키는 지방군은 전투병이 아닌 수비병과 향군들로 모두 합해 수백 명에 지나지 않았다. 전봉준과 동학군 지도부의 계략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전주성의 수비병과 향군들은 4대문을 걸어 잠그고, 동학군이 쳐들어오면 어디로 도망칠 것인가를 궁리하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26일 전주 삼천에 도착하여 천변 둔치에 진을 쳤다. 이튿날 27일 장날을 기해 서문과 남문을 공격하기로 계획하고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