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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기록화 동학혁명군은 보국안민, 광제창생, 제폭구민, 척양척왜 등을 내세우며 전국에서 기포하였다. 1차 동학농민혁명에서 장성황룡촌(황룡천, 황룡강) 전투가 가장 크게 벌어진 대규모전쟁 즉 황룡대회전이었다. 본 사진은 동학혁명기록화로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동학혁명기록화동학혁명군은 보국안민, 광제창생, 제폭구민, 척양척왜 등을 내세우며 전국에서 기포하였다. 1차 동학농민혁명에서 장성황룡촌(황룡천, 황룡강) 전투가 가장 크게 벌어진 대규모전쟁 즉 황룡대회전이었다. 본 사진은 동학혁명기록화로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동학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사람이 살면서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민족과 국가, 세계인류에게 큰 피해를 끼치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할 일을 말한다면 이렇다. 갑오동학농민혁명. 기미삼일독립혁명,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남북통일정부수립운동. 사일구민주혁명. 오일팔민중항쟁. 또 이어지는 피로 쓴 민주혁명들.

그리고 말하기 싫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갑진년(2024) 십이월 삼일 야밤에 일어났던 계엄포고령은 반민주, 반헌법, 내란행위에 해당된다. 대통령 스스로 거취를 결정해야만 되는 이런 몹쓸 일들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오늘 십이월 사일 새벽에 나는 문득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가 생각났다. 그 시를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 심정을 대변한다.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장성황룡촌(황룡천, 황룡강) 전투 현장 동학농민군은 4월 23일(양5.27) 조선 경군과 지방관군을 상대로 황룡대회전을 치른 역사의 현장이다. 황룡촌 전투, 황룡천 전투, 황룡강 전투라고 여러 명칭이 있다. 최근에는 '황룡전투'라고 한다. 필자는 '황룡대회전'이라 명칭하였다.
장성황룡촌(황룡천, 황룡강) 전투 현장동학농민군은 4월 23일(양5.27) 조선 경군과 지방관군을 상대로 황룡대회전을 치른 역사의 현장이다. 황룡촌 전투, 황룡천 전투, 황룡강 전투라고 여러 명칭이 있다. 최근에는 '황룡전투'라고 한다. 필자는 '황룡대회전'이라 명칭하였다. ⓒ 동학혁명기념관

황룡전투에서 경군에게 대승을 거두다

황토현 대승 뒤 동학군은 여전히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조선 최고의 경군에 비해 전략적인 취약점이 있었다. 당시 동학군은 1만여 명이었고, 관군은 총 5000여 명으로서 경군 800여 명, 지방관군 2000여 명, 관군소속 관변군사 2000여 명의 대결이었다.

또한 경군은 동학군의 무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살상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전봉준 총대장과 지도부는 홍계훈 초토사와 경군이 도착하기 전에 경군과 일전을 치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봉준은 다급하게 작전 명령을 내렸다.

"최경선 영솔장은 기마병(騎馬兵)과 함께 학익전법으로 대회전(大會戰)을 치르기에 앞서 기습하기 좋은 위치에서 기다리세요. 그리고 김개남 총관령과 손화중 총관령의 좌군과 우군은 월평리 삼봉 아래에서 대기하세요. 이방언 대접주의 동학군은 황룡촌 부근에서 준비한 대장태를 숨기고 매복하세요. 나는 중군과 함께 중간에서 상황을 봐 가며 지휘를 하겠습니다. 이 전법은 경군 도착 즉시 큰 전면전인 대회전의 효과적인 전략전술입니다."

그런데 4월 23일(양5.27)에 동학농민군이 목표지점에 도착하여, 주먹밥으로 점심을 먹을 무렵이었다. 그때 화력을 갖춘 경군의 선봉대와 기마병이 동학군을 기습하였다. 경군은 사전에 첩보병들을 풀어 혁명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황토재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치밀한 전략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홍계훈 초토사는 기회를 포착 즉시 공격 명령을 내렸다.

"동비들을 우리가 먼저 급습한다."
"우리는 월등한 화력이 있다."
"천둥벼락 치듯이 총공격하라."

동학혁명 장성황룡전투 모습 장성 황룡전적기념비 하단에 조각된 동학혁명 전투모습이다. 장성황룡전적비 사진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동학혁명 장성황룡전투 모습장성 황룡전적기념비 하단에 조각된 동학혁명 전투모습이다. 장성황룡전적비 사진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경군, 뜻밖의 선제공격

경군은 대관 이학승이 이끄는 선봉대와 기마병이 먼저 돌진하였고, 그 뒤를 대관 원세록과 오건영에게 병정 300명과 쿠르프포 1좌(坐)와 회전식 기관총 등을 주어 출동시켰다. 또 그 뒤에서 지방관군이 지원토록 하였다. 경군과 지방관군은 미리 파악한 정보로 동학군을 섬멸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경군과 지방관군은 포와 소총으로 무차별 공격하였다. 경군의 구식 포와 신식 쿠르프포, 회전식 기관총들이 동시에 퍼붓는 포격과 총소리는 하늘을 찢듯이 울려 퍼졌다.

경군이 회전식 기관총과 소총으로 집중사격하자 우박이 쏟아지는 것 같은 소리가 온 산천을 뒤흔들었다. 순식간에 월평리 일대는 포연으로 뒤덮혔다. 기습을 받은 동학군은 그 자리에서 사상자를 50여 명이나 내고 우왕좌왕 후퇴하기 시작했다.

동학농민군이 예상한 것보다 경군의 공격은 파괴력이 컸다. 경군 선봉대와 기마병이 동학군의 뒤를 쫓았고, 본대는 여전히 떨어져 있으면서 소총과 포를 쏘며 지원했다. 경군이 신속하게 동학군을 쫓아 황룡촌으로 진격하고 있을 때였다.

[목판화]장태도 동학농민혁명 장성황룡전투에서 등장한 대장태를 박홍규 화백이 판화로 실감나게 그려냈다.
[목판화]장태도동학농민혁명 장성황룡전투에서 등장한 대장태를 박홍규 화백이 판화로 실감나게 그려냈다. ⓒ 박홍규

동학군 신병기 괴물의 대장태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장흥 대접주 이방언이 이끄는 동학군이 대나무로 만든 장태 수십 개를 황룡촌 야산 위에서 밑으로 굴리며 반격에 나섰다. 동학농민군과 경군연합군의 대회전이 시작되었다.

뜻밖의 역습을 받은 경군은 당황하며 일제히 장태부대에게 사격을 가했지만, 장태 뒤에 숨어서 목숨을 걸고 장태를 굴리며 돌진하는 동학군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전봉준은 순간 기마병과 중군, 좌군, 우군에게 학익진의 포위전으로 경군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학군은 장태부대의 선공과 3군의 대회전으로 돌진하면서 경군에게 밀리던 전투가 순간 역공으로 뒤집혔다. 동학군은 관아에서 탈취한 소총 등 병장기로 무장하여 일제히 활을 쏘고 사격을 가하면서 번개처럼 몰아쳤다.

이방언 대접주와 동학군이 특수 제작한 대로 만든 장태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였다. '대장태'라고 하는 것은 청죽(靑竹)으로 얽어 닭장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그 밑에 차바퀴를 붙인 괴물 같은 것이었다. 그 장태 속에는 군사가 앉아 총을 쏠 수 있으며, 또한 장태 뒤에 숨어 굴리면서 적에게 돌진할 수 있어 동학군으로서는 신병기였다.

동학농민군은 장태 수십 개를 엄폐물 삼아 경군의 총과 화살을 막아 내면서 경군과 지방관군을 여지없이 몰아붙였다. 순식간에 경군은 동학군에게 역습을 받게 되었다.

동학군은 경군의 공격으로 사상자를 백여 명이나 내며 후퇴하다가 갑자기 장태전법과 학익진으로 몰아붙이자, 홍계훈은 기마병과 호위 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도주하기 시작했다. 또한 나머지 경군과 지방관군들 역시 '걸음아 나 살려라'하며 도망가기 바빴다.

김개남 장군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된 동학인물도(새 세상을 여는 사람들), 박홍규 화백의 그림을 편집한 것이다. 칼을 찬 김개남 장군의 모습이 산천이 쩌렁하도록 용감하고 늠늠하게 보인다.
김개남 장군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된 동학인물도(새 세상을 여는 사람들), 박홍규 화백의 그림을 편집한 것이다. 칼을 찬 김개남 장군의 모습이 산천이 쩌렁하도록 용감하고 늠늠하게 보인다. ⓒ 박홍규

김개남, 독자행동이 시작되다

동학농민군이 경군과 지방관군을 추격하며 폭풍처럼 몰아붙이자, 경군의 이학승이 군사들과 까치능선으로 밀리면서 처절한 끝판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경군은 이미 백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전세는 역전된 상태였다. 이학승과 호위 군사들은 쓰러졌고 나머지 병사들은 일부는 도망쳤고 일부는 항복하였다. 그러나 반격에 나선 김개남은 울분에 복받쳐 경군들의 목을 사정없이 베기 시작했다.

"내 부하들이 많이 죽었다. 모조리 목을 베어라!"

김개남의 돌출 행동에 전봉준은 황급히 '동학군 규율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며 중단을 요구하였다. 김개남은 총상을 입어 피가 흐르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고, 입술을 깨물며 '내 오늘은 전 대장의 뜻에 따르겠으나, 차후 대적하는 관군이 있으면 추호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후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연합군들은 사기를 잃고 신출괴몰한다는 동학군들에 공포를 느껴 도망병들이 속출하였다. 홍계훈은 동학군과 접전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경군의 사기를 높여 전투에 임하게 할 것인가를 궁리하게 되었다. 그것은 정부지원군이 하루빨리 도착하게 하여 경군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것이 급선무라 여겼다.

동학혁명기념탑(장성 황룡 전적비 제막식) 1997년 장성황룡 전적지에 건립된 동학혁명기념탑 제막식이 있었다. 동학혁명전적기념공원을 조성하고 기념탑 1기, 퍼걸러 2동, 잔디광장 등 세웠다. 본 사진은 동학혁명기념관 초대관장 삼암 표영삼 선생께서 촬영한 것으로 전주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었다.
동학혁명기념탑(장성 황룡 전적비 제막식)1997년 장성황룡 전적지에 건립된 동학혁명기념탑 제막식이 있었다. 동학혁명전적기념공원을 조성하고 기념탑 1기, 퍼걸러 2동, 잔디광장 등 세웠다. 본 사진은 동학혁명기념관 초대관장 삼암 표영삼 선생께서 촬영한 것으로 전주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었다. ⓒ 동학혁명기념관

황룡대회전, 동학혁명사에 길이 빛나리라

동학농민군은 황룡대회전에서 경군에게 대승을 거두었으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전봉준은 항복한 경군과 지방관군들을 받아들여 잘 대우해 주고 전열을 정비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지난번 홍계훈이 요청한 정부 지원군이 총제영(總制營) 병정 500명과 강화(江華) 포수 300명이 강화병방 황헌주 인솔 아래 법성포를 거쳐 장성 부근에 도착하였다.

정부지원군은 완전무장을 한 채로 황룡전투에서 패퇴한 경군과 합류하였으며, 경군을 중심으로 한 관군은 지방군 등 모든 병력을 집결시켰다. 전봉준은 이 같은 경군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발 빠르게 대책을 세웠다.

그런데 전봉준 총대장에게 전령의 다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방금 임금이 경군에게 위로금으로 내린 내탕금(內帑金) 1만 냥을 지니고 온 선전관 이주호와 일행들을 최경선 장군님이 체포했습니다!"

전봉준 총대장은 사로잡은 이주호 선전관 일행을 전주성으로 가는 중간거점인 원평으로 압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학농민군은 4월 23일(양5.27) 조선 경군과 지방관군을 상대로 황룡대회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쿠르프포 1문과 회전식 기관총 1문, 소총과 화포, 양총 등을 포함해 무기 100여 점을 노획하였다.

황룡전투는 황토현 전투에서 전라감영군을 물리친 후 조선군 최고 정예부대인 경군을 격파한 큰 승전이었다. 그러나 동학군과 경군의 양측 사상자도 수백 명이 넘었다.

전봉준은 여러 지도부들 앞에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자신이 자만한 결과로 많은 동학군을 잃었고, 또한 불살생의 강령을 지키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많은 관군을 살상했다. 전주성 함락 때는 이를 거울삼아 인명 피해가 최소한이 되도록 하겠다.'는 다짐이었다.

황토현 대회전으로 승기를 잡은 동학농민군은 황룡대회전(黃龍大會戰)에서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이자 한양을 수비하는 경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특히 황룡전투 승전은 전주성 점령이라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차 동학농민혁명사에 있어 황룡대회전은 관군과의 승부를 결정짓는 큰 역할을 하였다. 서울과 지방 군사들을 한꺼번에 물리친, 역사에 길이 빛날 기념비적 승전이었다.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황룡대회전 직후 남진(南進)을 멈추고 기수를 북진(北進)으로 돌려 전주성을 향해 본격 진군을 준비하였다.

「황룡대회전, 장태전법과 학익진 전술로 조선 정예부대 경군을 여지없이 격파하였다. 물론 양쪽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조선정부로서는 큰 위기였다. 경군과 감영군은 황토재 전투에 이어 황룡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전의를 상실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경군보다 먼저 지름길로 재빠르게 원평을 거쳐 전주로 향하는 작전만이 남았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동학#천도교#동학혁명#동학농민혁명황룡전투#수운최제우선생탄신2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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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또 현(現)천도교선도사·직접도훈, 전(前)전주녹색연합 공동대표, 전(前)전주민예총 고문, 전(前)세계종교평화협의회 이사 등 종교·환경단체에서 임원을 엮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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