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현 지란성 옌벤 조선족 둥장시 지신진)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에서 3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세기 말 한반도 북부지역에 기근이 심해지자 조선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간도와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은 함경북도 종서군 동풍면 상장포에서 살다가 가족을 이끌고 1886년 경 만주로 이주하였다. 할아버지 윤하연은 명동촌으로 옮기고 아버지는 1910년 독립지사인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하여 명동촌에 정착하게 되었다.
윤동주는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그의 고모 윤씨는 송신영과 결혼했는데, 고모의 아들이 독립운동가이자 친구였던 송몽규였다.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한 윤동주는 고종사촌 송몽규 등과 문예지 <새명동>을 발간하면서 문학 소년으로 자랐다. 14세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관립학교인 대립자학교에 다니다가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여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35년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다.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어,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였다. 광명중학에서 문익환을 만난다. 그는 문과 지망을 원하는데 아버지는 의학과 진학을 희망했다. 할아버지가 손자의 뜻을 존중하여 연희전문의 문과에 진학했다.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정지용 등과 사귀며 문학을 토론하면서 시심을 키웠다. 이 해에 처음으로 <소년>지에 시를 발표했다.
1941년 12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때, 그동안 썼던 시 중에서 19편을 골라 첫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간행하려 했으나 시국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제가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소년기부터 남다른 시심이 있었다. 처녀작으로 15세에 쓴 시 <삶과 죽음>, <초한대>가 있다. 수준이 상당했던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의 시력을 보면 광영중학교 4학년 당시 간도 연길에서 나온 <카톨릭 소년>에 동시 <병아리>(1936년 11월), <빗자루>(1936년 12월), <오줌싸개지도>(1937년 1월), <무얼 먹고사나>(1937년 3월), <거짓부리>(1937년 10월) 등이 있다.
윤동주의 후기 작품으로는 <서시>,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등이 있다. 평자에 따라 분석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대표작은 <서시>를 꼽게 된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국민 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그의 대표작이다.
윤동주는 1942년 국내에서 조선총독부의 광기 넘치는 억압에 견디지 못하고, 차라리 일본으로 건너가 싸우겠다는 마음으로 도일, 도쿄 릿코대학 영문과에 입학하고, 5개월 후 중퇴하여 도쿄시 도시다대학 문학부로 전학했다. 여기서 이른바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경의 주목을 받았다.
이를 피해 한국으로 돌아오는 데, (1943년 7월 14일) 사상범으로 구속되어 교토의 카모가외 경찰서에 구치되었다. 이듬해 교코지방재판소는 징역 2년을 선고했다. 판결문에서 "윤동주는 어릴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학적으로 심득했으며 친구 김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문제에 대해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는 망동을 했다"라고 판시했다.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의문사 당하였다. 훗날 드러난 사인은, 일제 군부가 혈장 대신 식염수 주사가 가능한가를 실험하려는 짓이었다. 전쟁에서는 자주 혈장이 부족하고 수혈이 필요한 환자에게 어느 정도 대용 혈장, 즉 식염수를 주입할 수 있는가를 실험한 것이다. 일제가 감옥에 갇힌 '불령선인' 윤동주에게 '이름 모를 주사'를 놓았고, 곧 바로 사망했다. 생체해부의 목적이었다.
유해는 간도에 있는 유족에게 인도되어 그해 3월 장례식을 치른 후 간도 용정에 묻혔다. 윤동주는 27년의 짧은 삶을 접었지만, 100여 편의 주옥같은 시는 우리 곁에 남아 있고, 순결한 그의 생애는 항상 의롭게 살고자 힌 사람들의 지표가 되고 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은 연희전문학교 교지 <문우>에 <자화상>, <새로운 길> 등이 실렸다. <자화상>은 1939년 8월, 20세에 쓴 시다.
자 화 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 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별치고 파이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친구인 문익환 목사는 <헌사>를 윤동주에게 바쳤다.
그의 시는 곧 그의 인생이었고, 그의 인생은 극히 자연스럽게 종교적이기도 했다. 그에게도 신앙의 회의기가 있었다. 연전 시대가 그런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의 존재를 깊히 뒤흔드는 신앙의 회의기에도 그의 마음은 겉으로는 여전히 잔잔한 호수 같았다. 시도 억지로 익히지 않았듯이 신앙도 성급히 따서 익히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에게 있어서 인생이 곧 난대로 익어가는 시요 신앙이었던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