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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기록화 황토현 승전 후 전봉준은 장성 황룡촌으로 가는 도중에 정읍과 고부, 흥덕과 고창, 그리고 무장을 점령한다. 그리고 영광과 함평을 거쳐 장성 월평리에 도착한다. 본 동학혁명기록화는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동학혁명기록화황토현 승전 후 전봉준은 장성 황룡촌으로 가는 도중에 정읍과 고부, 흥덕과 고창, 그리고 무장을 점령한다. 그리고 영광과 함평을 거쳐 장성 월평리에 도착한다. 본 동학혁명기록화는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동학농민군, 동학혁명군으로 거듭나다

전봉준과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4월 7일 황토현(황토재)에서 전라감영군을 격파하고 전열을 다시 정비하였다. 그리고 전략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였다.

하나_경군을 유인하여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지쳐 의욕을 상실하게 해야 한다. 둘_여러 곳의 지방군들이 힘을 못 쓰게 타격을 가해야 한다. 셋_경군을 유인하는 최종 목적지는 장성 황룡촌이다. 넷_동학군은 중군, 좌군, 우군 3군 체제를 가동해서 정읍과 고부, 흥덕과 고창, 그리고 무장을 점령한다. 다섯_영광과 함평을 거쳐 장성 월평리에 도착한다. 여섯_장성으로의 진군 도중에 우리 군을 곳곳에 매복시켜 뒤쫒는 경군과 지방 관군을 경계하도록 한다. 일곱_장성 황룡촌 전투에서도 황토현 전투의 학진법과 기습공격의 전략을 그대로 적용한다.

동학당 그림 동학혁명군 모습은 일본의 천우협 기관지인 이륙신보(二六新報) 1894년 8월 11일자에 실렸다. 신문내용에, '동학당원들은 황색, 청색, 흑색의 띠로 각기 부서의 구분을 두었으며, 의복은 진한적색 마포로, 등에는 화승총, 허리에는 약통(물통)과 화승을 차고 있다'고 그림을 설명했다. 본 그림의 설명으로 보아서, 고부봉기와 무장기포, 백산대회, 황토현 승전 뒤 전주성 점령후 집강소 통치 기간과 그 이후에는 진한 적색 등 정식 군복을 착용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동학혁명군의 머리띠를 황색, 청색, 흑색으로 부대소속을 구분하였다는 것은 중군, 좌군, 우군의 3군체제로 군편제를 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본 동학당 그림은 동학혁명기관에 전시했었다.
동학당 그림동학혁명군 모습은 일본의 천우협 기관지인 이륙신보(二六新報) 1894년 8월 11일자에 실렸다. 신문내용에, '동학당원들은 황색, 청색, 흑색의 띠로 각기 부서의 구분을 두었으며, 의복은 진한적색 마포로, 등에는 화승총, 허리에는 약통(물통)과 화승을 차고 있다'고 그림을 설명했다. 본 그림의 설명으로 보아서, 고부봉기와 무장기포, 백산대회, 황토현 승전 뒤 전주성 점령후 집강소 통치 기간과 그 이후에는 진한 적색 등 정식 군복을 착용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동학혁명군의 머리띠를 황색, 청색, 흑색으로 부대소속을 구분하였다는 것은 중군, 좌군, 우군의 3군체제로 군편제를 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본 동학당 그림은 동학혁명기관에 전시했었다. ⓒ 동학혁명기념관

전봉준 대장은 경군과 일전을 치를 자세에, '궁을(弓乙)자를 써서 등에 붙일 것, 수건으로 머리를 싸맬 것, 칼 노래를 부를 것, 시천주 주문을 외울 것' 등에 대해 영을 내렸다. 전봉준은 황룡대회전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 '황토재 전투보다 황룡전투가 몇 배 힘들 것이다. 감영군이 고양이라면, 경군은 호랑이다. 우리는 용의 전법으로 호랑이를 물리칠 것이다'라는 말로 긴장감은 물론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동학농민군은 4월 7일(양5.11) 황토현 대회전에서 전라감영군으로부터 대승을 거두고 지도부 전략회의가 끝난 뒤 본격 행동에 들어갔다. 이날 해 질 무렵에 동학군은 정읍현 장교청(將校廳 관리들이 근무하고 회의하는 건물)에 쳐들어가 감옥(監獄)을 부수고 죄수를 석방하였으며, 칼과 창 등의 많은 무기를 탈취하였다. 또한 호장, 이방 등의 관속들과 하급관리의 우두머리들, 보부상들이 머물러 사는 마을의 집들을 거침없이 불살라 버렸다.

조선경군 전라도에 급파

동학혁명군의 기상 조선정부는 4월 2일 왕명으로 홍계훈 양호초토사, 이학승 대관, 이두황 영관 등 장위영 군사, 경군 800여 명을 전라도로 급파 한양을 출발시켰다. 그리고 인천항에 도착, 조선 군함 청룡호와 한양호, 청국 군함 평원호를 이용하여 군산포를 거쳐 전주에 도착하였다. 동학혁명군은 이에 맞서 총력전을 준비하고 장성 황룡촌에서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본 조각품은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역사광장에 자리하고 있다.
동학혁명군의 기상조선정부는 4월 2일 왕명으로 홍계훈 양호초토사, 이학승 대관, 이두황 영관 등 장위영 군사, 경군 800여 명을 전라도로 급파 한양을 출발시켰다. 그리고 인천항에 도착, 조선 군함 청룡호와 한양호, 청국 군함 평원호를 이용하여 군산포를 거쳐 전주에 도착하였다. 동학혁명군은 이에 맞서 총력전을 준비하고 장성 황룡촌에서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본 조각품은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역사광장에 자리하고 있다. ⓒ 동학혁명기념관

한편 4월 2일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왕명으로 이학승 대관, 이두황 영관 등과 함께 장위영 군사 등 경군 800여 명을 이끌고 한양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인천항에 도착, 조선 군함 청룡호와 한양호, 청국 군함 평원호를 이용하여 군산포를 거쳐 전주에 도착하였다. 초토사 홍계훈은 전주성에서 상황을 점검한 후, 동학군 해산을 촉구하는 방서(榜書)를 많은 사람들이 보기 좋은 곳곳에 내다 붙이게 했다. 또 정찰대를 파견하여 동학군의 뒤를 쫓게 하는 한편, 정부에 증원군을 파병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홍계훈은 이두황 등을 대동하고 원평, 태인 등을 시찰하고 돌아와 공명심에 엉뚱한 짓을 범하고 말았다. 전 전주영장 김시풍에게는 동학군과 내통하였다는 혐의를 씌우고, 김영배와 김용하는 동학군 전령이라는 트집을 잡아 11일 이들을 모두 전주성 남문 밖 초록바위 부근에서 효수형에 처했다.

홍계훈의 일방적 처사에 민심은 들끓었으며, 일부 동학도인들과 백성들이 앞장서 전주성 남문루에 괘서(掛書)를 붙였다. 그때의 괘서 즉 누군지를 밝히지 않고 내다 거는 글을 보면, 지금의 우리나라 정세와 비슷함을 엿볼 수 있다.

오늘의 사태를 보니,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다. 지금의 난세는 민씨 성을 가진 사람들로 인한 것으로, 그들은 날이 새도록 자신들의 배 채울 생각만 하는 탐학한 자들이다. 그 일당들이 각 읍으로 파견되어 날마다 백성들에게 해로운 일만 하고 있으니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특히 초토사 홍계훈은 이곳에 온 후 동학의 위세에 겁을 먹고 군대도 출동시키지 못했으며, 공이 있는 어진 사람만 함부로 살해하고 있다. 앞으로 조선은 왜(倭,일본)에게 빼앗기거나, 러시아와 서양에게 넘어갈 것이니 애석한 일이로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안정시키려면, 동학대장 전봉준이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바로잡아야 한다.

전주성에 괘서가 나붙자, 홍계훈은 겁을 먹고 한동안 안절부절못하였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인다는 소문으로, 자신에게 무슨 해가 미치지 않나 걱정이 태산 같았다. 홍계훈은 전라감사에게 향병이라도 모아 적극 대응하라고 다그치다가, 결국 자신이 직접 경군 800여 명을 이끌고 동학군의 뒤를 추격하기로 했다.

용의 전법으로 호랑이를 물리친다

홍계훈의 추격이 시작되었다는 급보를 받은 전봉준이 서둘러 전열을 가다듬고 선봉대를 먼저 출발시킨 뒤, 3군의 각 부대에게 진군 명령을 내렸다. 전봉준 대장은 '용의 전법으로 호랑이를 물리친다'는 전술로 관군을 이리저리 따돌리고 골탕먹이며, 최종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전군 출진하라!"

전봉준의 작전대로 동학군은 각 부대별로 관군에게 혼선을 일으키는 유인책으로 모였다 흩어지고 뭉쳤다 갈라지기를 반복하였다. 때로는 칼노래를 군가로 부르며, 동학의 주문(呪文,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을 목청껏 외우면서 거침없이 행군하였다.

고창 모양성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한 동학혁명군은 정읍, 흥덕을 거쳐 4월 8일에는 고창성을 점령했다. 홍계훈의 경군이 출동했다하여 9일에는 무장현을 점령, 여시뫼에서 며칠간 체류하며 진법을 훈련했다.
고창 모양성황토현 전투에서 대승한 동학혁명군은 정읍, 흥덕을 거쳐 4월 8일에는 고창성을 점령했다. 홍계훈의 경군이 출동했다하여 9일에는 무장현을 점령, 여시뫼에서 며칠간 체류하며 진법을 훈련했다. ⓒ 동학혁명기념관

동학농민군은 정읍과 고부, 흥덕과 고창을 차례로 접수하고, 무장의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남녘 고을을 휩쓸었다. 4월 8일에는 흥덕으로 쳐들어가 군기고를 털어 창과 탄약, 조총 등의 무기를 탈취한 뒤 고창으로 물밀듯 들어갔다. 동학군은 어둠을 틈타 옥문을 부수고 억울하게 갇혀있는 동학도인들을 석방시켰으며, 동헌의 군기와 장부 등을 압수하고 관료들의 가산을 부수었다.

이처럼 거침없고 패하지 않는 여세를 몰아 나아가는 동학군에 맞선 홍계훈은 몹시 궁한 나머지 꾀를 내어 8일 각 고을에 방문(榜文)을 내걸었다.

이번 양호(兩湖, 전라도와 충청도) 동학도들을 평정하려 7일 전주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작은 도둑쯤이야 왕명으로 곧 초멸되겠지만, 그렇게 되면 너희 백성들이 오랫동안 소요의 피해를 입는 것은 물론 이제 농사철인데 실업의 폐단을 가져올까 걱정이로다. 이에 우리 경군에서 성상(聖上, 임금을 높여 이르는 말)의 백성을 생각하는 은혜를 베풀어 방문(榜文)을 게시하여 타이른다. 이에 놀라지 말고 안심하고 동요하지 말고 너희 자제(子弟)와 친척에게 일러 사설(邪說, 그릇되고 바르지 않는 말)에 물들어 죄를 범하는 일이 없다면 어찌 불행한 일이 있겠는가. 그리고 고을의 교졸(校卒)들이 동학군을 잡는다고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 있으면 마을에서 그들을 결박해 놓고 그 성명을 기록하여 보고해 오면 그들을 엄벌에 처하겠으니 반드시 거행토록 하라.

누가 동학혁명군을 막으랴

홍계훈은 한편으로 각 고을에 명령하여 동학군들의 동태와 두령의 성명, 인원수, 지명, 산천의 지형, 도로 상황 등을 자세히 기록하여 시간을 늦추지 말고 보고토록 하였다. 또한 나주, 장성에 영을 내려 동학군이 이웃 경계까지 침범하여 반란을 도모함으로 속히 군대를 동원하여 경군과 합세하라고 지시하였다.

동학농민군은 4월 9일(양.5.13) 무장현으로 쳐들어가 동헌(東軒)과 아사(衙舍)를 모조리 부수고 옥중의 동학도인 44명을 석방하였으며, 관료들의 집들을 불 지르고 관속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목숨을 위협하였다.

이처럼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들이 폭발하면서, 한번 성난 민중들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고 통제 불능으로까지 치달았다. 일부 동학군들은 탈취한 갑옷을 입고 총과 창으로 무장한 뒤 무장성내를 휩쓸고 다니면서 허공에 총까지 쏘아댔으므로 관료는 물론 백성들까지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러한 사태를 목격한 전봉준 총대장은 '그 어떠한 일이 일어도 백성들의 피해가 없어야 하며, 관료들의 재산 등도 보호하라'는 특명을 내려 겨우 진정되기 시작했다.
무장에서 3일 동안 머물렀던 동학혁명군은 일부 병력을 잔류시키고 주력군은 12일 영광을 접수하고 무기와 식량을 확보하였으며, 4월 16일 함평으로 진군하였다.

함평관아터(동헌터) 함평관아터는 현재 함평군청이 자리하고 있다. 함평 현감 권풍식은 1894년 4월 16일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16일 신시(申時) 동도(東徒) 6~7천 명이 영광으로부터 기(旗)를 앞세우고 창을 들고 칼을 휘두르며 대포를 쏘며 쳐들어오는데 말을 탄 기마병(騎馬兵)이 백여 명이요, 그중에는 갑옷을 입었고 혹은 전립(戰笠, 전투모자)을 썼다.』
함평관아터(동헌터)함평관아터는 현재 함평군청이 자리하고 있다. 함평 현감 권풍식은 1894년 4월 16일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16일 신시(申時) 동도(東徒) 6~7천 명이 영광으로부터 기(旗)를 앞세우고 창을 들고 칼을 휘두르며 대포를 쏘며 쳐들어오는데 말을 탄 기마병(騎馬兵)이 백여 명이요, 그중에는 갑옷을 입었고 혹은 전립(戰笠, 전투모자)을 썼다.』 ⓒ 동학집강소

함평 현감 권풍식은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16일 신시(申時) 동도(東徒) 6~7천 명이 영광으로부터 기(旗)를 앞세우고 창을 들고 칼을 휘두르며 대포를 쏘며 쳐들어오는데 말을 탄 기마병(騎馬兵)이 백여 명이요, 그중에는 갑옷을 입었고 혹은 전립(戰笠, 전투모자)을 썼다.

동학농민군이 곧바로 동헌으로 쳐들어가자 관문을 지키고 있던 수성군(守城軍) 등 150여 명과 접전이 벌어졌으나 수성군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부상을 입고 도주하였다. 그러나 함평군 각 면의 사림(士林)들 1백여 명이 동헌을 끝까지 지키고 저항함으로 전봉준은 이들을 향해 큰 소리로 엄히 꾸짖었다.

우리는 탐관오리를 징치하고 고을 수령들의 민폐를 바로잡으며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해 각 고을을 돌아 이 고을에 왔다. 지금 사인(士人)들이 동헌을 호위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고을 현감의 치적을 가히 알 수 있다.

전봉준의 설득으로 사림들은 동헌에서 물러났으며, 동학군은 손쉽게 동헌을 점령하였고 호장, 이방, 수형리의 세 관속을 잡아들인 뒤 동학군을 환영하지 않은 죄를 물어 가벼운 곤장으로 다스렸다. 또한 전봉준과 동학군 1만여 명은 4월 18일 혹은 말을 타고 혹은 걸어서 무안(務安)을 점령하고 다음날 19일 나주(羅州)로 진격하였다.

한편 전주성을 출발했던 홍계훈의 경군은 동학군을 뒤쫓으며, 전라감영군과 지방관군의 패잔병들을 수습해 21일 영광에 도착했다. 영광에 온 홍계훈은 무슨 꿍꿍이가 있었는지 이두황과 함께 일단 뒤로 빠지고, 대관 이학승·원세록·오건영에게 경군 선봉대를 인솔하여 먼저 동학군을 추격하라며 22일에 장성으로 출발시켰다.

[목판화]봉준이 온다 전봉준 장군과 동학혁명군이 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모든 일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바로 민심을 얻은 것이다. 민심을 얻은 것은 천하를 얻은 것이다. '때가 오니 천하가 함께 하더니'라는 녹두 장군의 절명시가 그 상황을 대변해준다.
[목판화]봉준이 온다전봉준 장군과 동학혁명군이 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모든 일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바로 민심을 얻은 것이다. 민심을 얻은 것은 천하를 얻은 것이다. '때가 오니 천하가 함께 하더니'라는 녹두 장군의 절명시가 그 상황을 대변해준다. ⓒ 박홍규

민심이 천심이다

동학농민군은 그동안 경군을 보기 좋게 따돌리고, 여러 관아를 점령하면서 관군의 무기와 식량을 확보하고,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눠주었다. 또한 관아의 세금 장부를 압수하고, 탐학한 아전들을 처형하거나 처벌하였으며, 감옥을 부숴 버리고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동학도인과 백성들을 풀어주었다.

또한 동학군은 홍계훈과 나주의 관리들에게 기포한 뜻을 담은 서찰을 보냈다. 그 서찰은 탐관오리 처벌과 세금 개혁, 보국안민을 실현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동학군은 장성에 도착하여 경군을 상대로 일전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동학군이 황토현를 출발하여 장성에 올 때까지 그 뒤따르는 백성들이 있었다.

그들은 구호를 외치고 피리를 불어 댔으며, 인의예지(仁義禮智) 깃발과 안민창의(安民倡義)라는 깃발을 높이 올렸다. 백성들은 동학군을 따라다니며 여러 색의 깃발을 만들어 흔들고, 동학의 주문과 칼노래도 따라 부르며 행진하였다. 이러한 백성들의 움직임은 동학군이 시운과 민심을 완전히 얻었다는 결과라 볼 수 있다.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고 하였다.
백성들이 믿고 따르니 천하가 따르는 것이었다.
민심을 잃으면 천하를 잃는다고 하였다.
정부와 관료들은 민심을 잃어 하늘이 그들을 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민심이 천심임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요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동학#천도교#동학혁명#동학농민혁명130주년#수운최제우선생탄신2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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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또 현(現)천도교선도사·직접도훈, 전(前)전주녹색연합 공동대표, 전(前)전주민예총 고문, 전(前)세계종교평화협의회 이사 등 종교·환경단체에서 임원을 엮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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