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년(李康秊, 1858~1909)은 현 문경시 가은읍 성리에서 아버지 이기태와 어머니 의령 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무녀독남으로 본관은 전주, 호는 운강(雲崗), 아명은 양출(陽出)이라 불렀다.
성장하면서 큰 키에 눈빛은 불꽃이 넘치는 것 같아 위엄이 넘쳐 흘렀다고 한다. 23세에 (1880년)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갑신정변(1884년)이 일어나 정국이 혼란해지면서 사직하고 향리로 내려와 칩거하였다.
그 사이 정국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일제의 민황후 살해, 단발령 반포 등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을미의병이다. 의분심이 강했던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충북 제천에서 유인석을 중심으로 제천의병의 결성 소식이 계기가 되었다.
1896년 2월 고향인 문경 도태리 장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 봉기에 놀라 도망치던, 백성들을 토색질하던 탐관오리 안동관찰사 김석중과 순검 이호윤·김인담 등을 처단하고 고모산성에 진을 쳤다. 관군의 기습으로 고초를 겪었다. 인망이 높은 제천 의병장 유인석을 찾아가 제자가 되고, 제천의병의 유격장에 선임되었다. 3월에 일본군 병참기지인 수안보를 수차 공격했으나 점거하지 못했다.
1897년 4월 만주로 건너가 선행한 유인석을 만나는 등 3년여 체류하였다. 그는 이때 장백·무송·즙안·임강 등에서 이주민 자치단체를 결성하는데 힘을 발휘하였다. 한일신협약으로 국내정세가 위태롭게 전개되자 귀국하여 지역주민들을 상대로 시국상황을 설명하면서 국권수호의 방책을 찾았다. 그리고 의병활동으로 멈춰두었던 학문을 탐구하면서 기회를 찾았다.
1905년 을사늑약에 이어 1907년 대한제국 군대마저 해산당하자 그는 다시 의병전에 나섰다. 1907년 3월 유인석과 상의하여 강원도 원주·원성에서 의병을 모아 재거의하였다.
6월에는 원주읍의 무기고를 장악, 병장기를 모아 무장하고 7월에 제천읍으로 진군하여 군대해산을 거부하고 의병이 된 원주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의 의병부대, 조동교·오경욱·정대무·의진 등과 연합하여 전개한 제천전투에서 500명의 왜군을 토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우리 의병전에서 기록적인 혁혁한 전과였다. 소식을 들은 광무황제가 운강을 도체찰사에 제수하고 밀조를 내렸다. 강제로 퇴위 당하기 직전이다.
아! 나의 죄가 크고 악이 충만하여 황천이 돌보지 않으시니, 이로 말미암아 강한 이웃이 틈을 엿보고 역적 신하가 권세를 농락하여 4천 년을 내린 종묘 사직과 3천 리 넓은 강토가 하루 아침에 오랑캐의 지역이 되었도다. 생각하면 나의 실낱 같은 목숨이야 아까울 것이 없으나 종묘 사직과 만백성을 생각하니 이것이 애통하도다.
선전관 이강년으로 도체찰사를 삼아 지방 4도에 보내니 양가(良家)의 재주 있는 자제들로 각각 의병을 일으키게 하며 소모장(召募將)을 임명하되 인장과 병부(兵符)를 새겨서 쓰도록 하라. 만일 명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와 수령들을 먼저 베이고 파직하여 내쫓을 것이며, 오직 경기(京畿) 진영의 군사는 나와 함께 사직에 순절할 것이다. (주석 1)
제천전투의 대첩은 그동안 수세에 밀린 각지 의병부대에 희망과 용기를 불러넣었다. 40여 의병부대가 제천에 모여 운강을 도창의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제천 백묘에 본부를 두고 군사상 요충인 충주성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되었다. 주요 전투와 전과를 약술하면,
9월 16일 제천 추지에서 적 200명 생포
9월 27일 죽령에서 적 200명 생포
10월 5일 단양 교리정에서 적 80명 생포
10월 23일 풍기 백자동 전투에서 적 100명 생포.
우리 의병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지고 의병들의 의복과 식량, 탄약이 제대로 보급되지 못하면서 어려움이 겹쳤다. 왜군의 증파가 계속되었다. 운강은 거듭되는 전투로 건강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던 중 전국 의병부대의 연합을 위해 이인영·허위 등과 경기도 양주에서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고, 호서창의대장에 추대되었다. 서울탈환작전이 1차적인 목표였다.
여러 가지 불리한 여건에서 의병의 서울탈환작전은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운강은 국권수호의 의전을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 6월 4일 청풍 까치성 전투는 장마로 인해 화승총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퇴로가 막혀 고전을 거듭하던 끝에 복사뼈에 탄환을 맞아 왜군에 생포되었다.
붙잡힌 뒤 일본군이 치료하려들자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제공하는 음식도 거부했다. 7월 8일 일본군사령부를 걸쳐 19일 평리원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판사 박제선이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묻자 "더러운 자와는 의견을 말하고 싶지 않다"고 전제, "내가 거의한 것은 먼저 내적을 단죄하고 왜적을 박멸해 위로 나라의 철천지 원수를 갚고 아래로 도탄에 빠진 생민을 구하고자 한다."라는 글로서 답했다.
일제 재판부는 1909년 9월 23일 사형을 선고하고 1909년 10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51세였다. 순국 진전 큰아들 승재와 전국의 의병에게 유언을 남겼다.
"네 아비는 평생 혈충을 품어 나라를 위해 죽고자 했다. 이제 뜻대로 되었으니 무슨 여한이 있으랴. 너는 놀라지 말고 정신을 차려 동생과 함께 나 죽은 뒤 3일안으로 박장토록하라."
"강년은 양심이 격동함을 참을 수 없어 경신년(1896년) 이래로 13년간 두 번 의기를 들고 일어나 30여 회전에서 적추 백여 명을 참수했다.(중략) 이 몸은 존화양이의 대의에 죽는 것이니, 하루를 더하더라도 그치는 것 보다 났다.(중략) 동지들에게 바라는 것은 적세가 성하다고 해서 본의를 이기지 마시고 더욱 큰 의리로 매진해 광명한 날을 기대하시라." (주석 2)
운강 지사는 일본군에 붙잡히면서 즉흥시 두 수를 남겼다. 한 수를 소개한다.
(1)
오십 년 내려오면서 죽기를 결단한 마음
이제 와서 어찌 구차하게 삶이 있으리
군대에 맹세하고 다시 나왔건만 종시 회복키 어려워
지하에서도 오히려 싸울 뜻을 가겠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주석
1> <운강선생 창의일록>.
2> <운강선생 유고>(3책 필사본).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