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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걷쓰 사례나눔 행사행사장 현장 사진 ⓒ 정슬기
이번주에는 눈이 참 많이 왔다. 며칠 전만해도 뒤늦게 찾아 온 단풍을 보며 자연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빛깔과 가을 정취에 흠뻑 빠져 있었는데 하루 아침에 폭설이라니. 갑자기 가을에서 겨울로 순간 이동한 느낌이었다.
폭설로 위험하니 외출을 자제해달라, 출근 대란이다 등 안전 문자가 속출했지만 나는 동네 강아지마냥 설렜다. 거실 창 밖으로 보이는 세상이 온통 하얬다. 폭설에도 생업에 매진하며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는 죄송하지만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설렘을 주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좋았다.
117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던 그날 저녁, 우리 지역 도서관에서는 '읽걷쓰 행사'가 있었다. '읽걷쓰'란 읽기, 걷기, 쓰기의 줄임말인 인천시 교육정책 브랜드로, 학교를 구성하는 학생, 학부모, 교직원은 물론 학교 밖 시민들까지 인문학적 소양을 고양시키고자 하는 교육 활동이자 시민 활동을 말한다. 나는 지난 봄, 도서관 프로그램인 '나의 인생 여행기'라는 문집에 참여해 이 행사에 초대되었다.
도서관으로 가는 길, 눈발과 바람은 점점 강해졌고 평소보다 도로가 붐볐다. 딸아이 손을 잡고 우산 하나로 뒤뚱뒤뚱 언덕길을 오르다 보니 종일 함박눈이 예쁘다고 설레었던 일이 무색하게도 집에 돌아갈 걱정부터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길이 험난해도 삶은 여전히 설레고 떨리는 일 투성이라는 것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시민 저자로 자리에 참여한 84세 할머니의 시 낭독을 듣고 나서였다.
할머니는 성인 문해 교육시간에 시를 써 시화전에서 수상했다고 한다. 수줍은 듯 살짝 떨리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제주 4.3 사건으로
다 빨갱이라며
학살당한 동네 사람들
하루아침에 길 잃은
고아 삼 남매
나는 첫 소절을 듣자마자 울컥했다. 요즘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설을 읽고 있어 특히나 제주도에서 벌어졌던 이 참상에 깊숙한 슬픔과 고통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역사의 산 증인으로 7살 시절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놓는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증오나 원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저 자신의 삶을 나직이 풀어놓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오히려 더 가슴 아프고 애달프게 다가왔다.
7살 때 그렇게 친척집을 떠돌아다녔는데
눈칫밥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네
이 대목을 읊으실 때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저 짧은 시 안에 80년 세월 할머니의 삶을 어찌 다 담아낼 수 있었을까 마는 시대의 과오로 한순간에 고아가 되어버린 7살 아이의 막막함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7살 아이가 80이 되기까지 그 모진 세월을 어찌 견디셨을지. 한평생을 까막눈으로 사시다 여든이 넘어서야 겨우 부모님 이름을 떠듬떠듬 한글로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할머니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부모님 이름을 쓰며 마치 돌아가신 부모님을 다시 만난 듯해 목놓아 우셨다는 고백에 가슴이 아렸다.
그 짧은 순간 우리 두 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2년 전 갑자기 입원치료를 하게 된 나는 아무 준비 없이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 그때 우리 딸들도 할머니집, 삼촌 집을 전전하며 지냈다. 이제 다 컸다고 생각했던 6학년 딸아이도, 마냥 해맑기만 했던 1학년 딸아이도 제 몫의 불안과 슬픔을 통과해야 했던 시기였다. 이제 그런 과거도 추억이 되었구나 생각했는데 할머니의 시구에 그 시절 마음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할머니가 시를 통해 만남도 이별도 모두 떨림이라 말씀하셨듯, 슬픈 일도 기쁜 일도 모두 지나가게 마련일 것이다.
할머니는 다시 태어나도 젊을 때보다 지금이 더 좋으시단다. 사랑한다고 문자 한 통 보내면 딸들에게 용돈 받는 지금이, 받아쓰기 백 점 맞으면 보너스 받는 지금이 좋으시다고 한다. 공부는 늘지 않고 비록 손은 떨리지만 말이다. 하나 하나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은 지금껏 어떤 것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쁨이자 설렘이기에.
낭송을 마친 할머니는 소감을 묻는 인터뷰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여러 사람 앞에서 마이크를 잡는 게 참말 꿈만 같다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이런 시를 쓰시게 됐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는 내 삶을 그냥 있는 그대로 썼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이런 큰 자리에서 시를 낭독하고 큰 박수를 받으니 하늘에 둥둥 떠있는 것만 같다고.
잔잔하지만 들뜬 아이처럼 파르르 떨리는 할머니 목소리에 내 가슴도 떨렸다. 할머니의 삶은 시가 되었다. 이런 게 바로 삶이 묻어나는 글의 힘인가 보다.
그날 아침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첫눈은 내게 떨림이었다. 휘청이는 우산 아래 내 손을 꼭 잡고 도서관 언덕을 함께 오른 딸아이의 온기도 내겐 떨림이었다. 그곳에서 할머니의 시를 만난 것도 내겐 잊을 수 없는 떨림이었다. 할머니 말씀대로 삶은 정말 떨림이 맞는가 보다.

▲시민저자님 시송희자 시민저자 님의 시입니다 ⓒ 송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