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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구현 관아터 김제 금구 관아 터는 동학농민군이 4월 1일~2일 사이 점령했던 곳이다. 금구관아 터에는 현재 금구면사무소와 금구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금구면은 조선시대에 금구현으로 독립된 행정구역이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김제군에 병합되었다.
금구현 관아터김제 금구 관아 터는 동학농민군이 4월 1일~2일 사이 점령했던 곳이다. 금구관아 터에는 현재 금구면사무소와 금구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금구면은 조선시대에 금구현으로 독립된 행정구역이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김제군에 병합되었다. ⓒ 동학집강소

원평결집, 금구현을 점령하다

금구, 원평은 갑오동학혁명사에서 결코 외면받아서는 안 될 중요 중간 거점이다. 1893년 원평 교조신원운동이 없었다면 1894년 동학농민혁명도 없었으리라는 것처럼, 금구와 원평은 교조신원운동과 동학농민혁명을 연결해 주는 결정적 중요지역이다. 또한 전주성 점령에 있어 중간 거점인 원평의 역할은 과소평가할 수 없는 동학혁명사의 재조명이 필요하다.

백산성에서 출발한 동학농민군은 전주성 점령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앞세워 며칠 만에 물밀듯이 금구현 원평에 도착했다. 무장기포 후 원평으로 집결하는 야간 행군에서는 횃불이 보이지 않았다.

수운 대선생 신원운동은 평화 집회였기에 횃불이 등장하였지만, 무력기포는 반란의 혁명이기 때문에 비밀리에 행군할 때나 야영을 할 때는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횃불을 밝히지 않았다. 물론 꼭 필요한 때는 불을 잠시 밝혔지만, 일을 마친 후 바로 꺼서 위치를 감추었다.

[동학혁명기록화] 한양경군출동 정부는 한양에 주둔하는 수도경비군사 경군(京軍)을 파견 홍계훈이 지휘토록 하였다. 본 사진은 경군이 출동하는 모습을 그린 동학혁명기록화로서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하였다.
[동학혁명기록화] 한양경군출동정부는 한양에 주둔하는 수도경비군사 경군(京軍)을 파견 홍계훈이 지휘토록 하였다. 본 사진은 경군이 출동하는 모습을 그린 동학혁명기록화로서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하였다. ⓒ 동학혁명기념관

전라감사 김문현으로부터 백산기포에 대한 보고를 받은 정부에서는 3월 29일 장위영 정령관 홍계훈을 전라도지역 군대를 통솔하고 경비를 담당하는 종이품 무관직 전라병사(全羅兵使)로 임명했다.

또한 정부는 홍계훈을 전라병사로 임명한 며칠 후 4월 2일, 전란이 일어난 호남·호서(전라·충청) 지방에 파견해 군사를 규합하여 동학군을 진압하는 특수 임무인 정3품 당상관 문무관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하였다.

초토사 홍계훈에게 특별한 임무가 하나 추가되었다. 정부는 한양에 주둔하는 수도경비군사 경군(京軍)을 파견 홍계훈이 지휘토록 하였다. 그리고 전라감영의 영병(營兵) 700명, 토병(土兵) 560명, 전라도 보부상(褓負商)부대 700여 명 등을 출동키로 하였다.

동학군의 움직임은 반란과 혁명이다.

조선정부의 발 빠른 대응은 지난 고부봉기는 물론 특히 무장기포와 백산대회 등의 소식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고 나름대로 철저한 방어대책을 세운 것이다. 고부봉기 이전 '사발통문거사'라는 불순한 문건에 '전주성을 점령하고 한양을 접수한다'는 계획을 반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무장동학포고문(茂長東學布告文) 무장동학포고문(茂長東學布告文)은 (고창)무장에서 3월 20일경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장군이 반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장동학포고문 필사원본은 현재 천도교도서관에 소장되어있다. 본 무장동학포고문 사진은 고창군에서 공개한 자료이다.
무장동학포고문(茂長東學布告文)무장동학포고문(茂長東學布告文)은 (고창)무장에서 3월 20일경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장군이 반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장동학포고문 필사원본은 현재 천도교도서관에 소장되어있다. 본 무장동학포고문 사진은 고창군에서 공개한 자료이다. ⓒ 천도교중앙총부

특히 무장기포에서 반포된 '무장동학포고문'의 '오늘 이 의로운 깃발을 들어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하게(보국안민 輔國安民)만들 것을 죽음으로써 맹세를 하였다' 등의 주요 내용은 사실상 정부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선전포고(宣戰布告)문이라고 본 것이다.

또한 백산대회에서 발표한 격문이라는 문건의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내몰고자 함'이라는 주요 내용은 반란의 혁명에 방점을 찍은 불순한 내용으로 파악한 것이다. 이처럼 동학농민군의 움직임을 초반에 진압하지 못했고 또 시간을 끌면 조선왕조가 위태로워진다는 위험천만한 상태로 보았던 것이다.

식량문제, 슬기롭게 해결하다

동학농민군은 금구현은 물론 지방관아 몇 곳을 점령하여 관군의 무기를 확보했고, 또한 곡물 창고를 열어 식량도 넉넉해졌다. 전봉준은 앞으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비상식량 준비 계획을 지시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주로 주먹밥으로 식사를 해결하였다. 또한 밥 지을 시간이 없을 경우, 비상식량으로 오곡(五穀) 미숫가루와 육포(肉包)를 준비하였다.

동학농민군 숫자가 보통 많은 것이 아니기에, 미숫가루와 육포는 각자 주머니에도 들어가는 간단한 비상식량으로, 수통의 물과 함께 먹거리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익한 방법이었다.

전봉준은 원평에서 다시 탁자위에 지도를 펼치고 작전을 지시를 하였다.

"김개남 총관령의 좌군은 금구에서 전주로 가는 직로로, 손화중 총관령의 우군은 금산사에서 청도리로 가는 우회를 통해 전주로 진격합니다. 그리고 최경선 영솔장의 선봉대와 기마병은 나와 함께 합니다."

백낙도포, 경상도 진주에서 기포하다

전봉준의 작전은 지금 곧바로 전주성을 치는 게 아니라, 원평에서 전주를 치는 척하다가 후퇴하면서 관군을 황토현(황토재)으로 유인하는 전술을 쓰기로 하였다.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원평 김덕명 총참모 도소에서 작전회의를 하고 있는데 전령의 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경상도 진주에서 백낙도 포(包) 접주을 중심으로 동학군이 무기를 들고 기포를 하였다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전봉준 총대장과 혁명군 지도부 모두는 뜻밖의 소식에 박수를 치며 환호하였다. 전봉준은 한껏 고무되어 마무리 발언을 했다.

"이번 유인작전은 우리 군과 관군 모두 사상자를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전술입니다."

김개남과 손화중 등 지도부도 전봉준의 작전에 동의하고 곧 출전하기로 했다. 동학농민군은 서둘러 전열을 정비하고 출발 준비를 했다. 동학농민군 뒷줄에는 자원한 승려 군 수십 명이 염주 대신 죽창을 들고 대열에 합류했다.

동학농민군은 전라감영군을 황토현(황토재)으로 유인하는 전술로 전주성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잘못하다간 전주성이 함락될 것이라는 위기감 속에, 무남영의 병력과 기마병, 전라도 각 고을에서 징발한 포수와 보부상 등 수천 명으로 병력을 강화했다.

4월 3일, 감영군 대관 이재섭은 대포와 소총으로 무장한 포군을 지휘하면서, 송봉희에게 무기를 주어 보부상 등의 군사를 이끌고 서문 밖 전주천 너머 용머리고개를 지키게 하였다. 또 4일에는 감영병정령 이경호 장군에게 중무장한 포군을 거느리고 원평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길목인 금산사 쪽 청도리 앞길과 금구의 큰길을 지키게 하였다.

전봉준 총대장은 감영군을 유인하기 위해 바람처럼 말을 몰며 최경선 영솔장과 기마병을 이끌고 동학농민군을 진두지휘하였다. 그리고 전주로 진격하는 재인부대에게 산천이 쩌렁하도록 풍물을 치고 함성을 지르라 하였다.

[동학혁명기록화] 전봉준 지휘모습 전봉준 장군은 출전할 때 말을 타고 지휘하곤 했다. 전투시에도 거의 앞에서 지휘하는 등 지도자의 자세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했다. 본 사진은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동학혁명기록화] 전봉준 지휘모습전봉준 장군은 출전할 때 말을 타고 지휘하곤 했다. 전투시에도 거의 앞에서 지휘하는 등 지도자의 자세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했다. 본 사진은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 동학혁명기념관

전라감영군을 황토현으로 유인하라

동학군은 감영군들에게 온갖 욕설과 비아냥으로 자극하였다. 양측이 밀고 밀리는 전투를 하다가 동학군의 피해가 발생하자 감영군은 기마병(騎馬兵)을 앞세우고 화살과 총, 대포를 쏘아대며 도망치는 동학군을 뒤쫓기 시작했다.

감영군은 동학군을 쫓으면서 규율도 없고 무질서한 오합지졸로 착각을 하였는지 무거운 대포와 거추장스러운 총은 후발대에게 넘기고, 서로 먼저 공을 세우려는 경쟁심에 가벼운 무기만 들고 정신없이 쫓아갔다.

전봉준과 동학농민군 지도부의 계략은 적중하였다. 동학군은 감영군을 유인하기 위해 싸우다 도망치기를 반복하였다. 감영군은 동학군의 유인책에 속아 지쳐서 허공에 총과 활을 쏘면서 한때 백산성에서 대치하였다. 동학군은 계속 감영군을 유인하면서 도교산 방향으로 도망쳤다.

감영군은 당초 백산성 주변에 머물러야 하는 전략을 무시하고 계속 쫓아가다가, 결국 해 질 무렵 황토재에 진을 쳤다. 동학군은 감영군을 황토재로 유인해 놓고, 4월 6일 두승산 시사봉과 특히 도교산 중턱에 총집결시켰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질 때를 기다리면서 위장술을 폈다.

금구현 점령, 전주성 점령을 위한 유인작전, 그 성과는 황토재 대승으로 다가온다. 황토재 대승은 황룡촌 대승의 성과로 다가온다. 황룡촌 대승은 전주성 점령이라는 엄청난 성과로 다가온다. 전주성 점령은 제2의 한양성 점령의 성과이다. 전주성 점령에 앞서 동학농민군은 치밀한 작전에 피 흘리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전술전략을 구사했다. 사람 목숨이 하늘 목숨이라는 동학의 인내천 즉 생명평화사상을 가능한 실현하려고 모든 병법에 적용했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동학#천도교#동학혁명#동학농민혁명130주년#수운최제우선생탄신2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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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또 현(現)천도교선도사·직접도훈, 전(前)전주녹색연합 공동대표, 전(前)전주민예총 고문, 전(前)세계종교평화협의회 이사 등 종교·환경단체에서 임원을 엮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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