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가 개념에 의해 해명되듯이, 리얼리티는 관점에 의해 설명된다. 이 연재는 청년 세대의 관점에서 바라본 북향민의 리얼리티다. 그리고 다시금 통일에 대한 비전을 기록한다.[기자말] |
북향민(北鄕民), 북쪽에 고향을 둔 사람들을 지칭하는 의미다. '탈북'은 북한을 떠났다는 의미에 중점을 두므로 분단의 상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을 떠나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한 사람들 모두가 '떠난 사람'이라는 정체성으로 불리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북향민들이 갖는 설움 또는 서운함이 '탈북자'라는 호칭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도 있다.
이왕 정체성으로 호명되어야 한다면 '북향민'이라는 단어가 어감상으로도 더 부드럽다. '이런 존재'에서는 분단과 체제 대결이 느껴지지 않는다. 민감하게 거론되는 이념도 넘어선, 존재 그 자체로서의 이름이다. 단어 하나를 바꿈으로서 존재가 변화한다. '탈북자'라는 기존 단어가 가질 수 있는 존재의 설움도 줄어든다. 그렇다면 시도해볼 만한 선택이 아닐까?
북향민과 비슷하게 호명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실향민(失鄕民)이다. 실향민은 한자 의미 그대로 '고향을 잃고 타향에서 지내는 백성'이다. 북쪽이 고향이었으나 잃은 사람들. 분단과 전쟁으로 하나의 국가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고, 두 개의 국가 모두 각자 소속된 곳에서 터전을 닦았다. 북쪽은 인민으로, 남쪽은 국민으로. 그래서 실향민들은 돌아가도 되찾을 고향이 없다.
북쪽에 남은 가족이 있음에도 실향민들의 고향은 기록으로만 남은 채 사실상 소멸되었다. 그래서 실향민은 현실적으로도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다. 이 존재는 단절된 존재다. 연결이 없다. 반면 북향민은 여전히 북에 고향이 존재한다. 그곳에 가족들이 살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의미상으로도 '북쪽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라는 뜻의 북향민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다시, '왜 굳이 북향민으로 바꿔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내가 '존재의 문제'라고 답했음에도 그 답이 그이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면, 이번에 나는 '현실의 문제'로 다시 답해 보고자 한다. 바로 '북향민'이라는 용어가 체제 경쟁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탈북'이라는 정체성은 분단의 상징이자 결과물이다. 여기서 '탈북자'는 분단 체제가 낳은 존재들로 조난자이자 경계인들이 되고 만다. 그래서 북에서 온 이들은 자신을 자유인, 통일인, 통일민 등으로 부르며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하려 한다.
하지만 이런 용어들 모두 분단과 체제 대결의 현실을 상징하는 의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거나, 정치적 이상향을 진술한 용어에 불과하다. 정치적 이상향은 그 이상향에 동의하지 않거나 그런 이상향을 주창하는 사람들과의 어울림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소외와 배제를 낳는다. 게다가 남한 사람들은 자유인이 아니며 통일이나 통일민이 아닌가라는 반문에 답할 수 없다. 결국 '탈북자'라는 용어가 우세할 뿐이다.
북향민들이 계속 '탈북자'로 규정되는 한 우리는 일상의 대화에서까지도 '분단'에 종속되게 된다. 사실 '탈북자'들은 분단과 체제 경쟁에서의 패자와 승자 모두에게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이다. 승자 입장의 남쪽에서 '탈북자'는 정치적으로는 환영 받을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 또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외부에 겉도는 사회적 타자로서 존재한다. 마치 이방인들처럼 말이다.
한국 사람들의 마음의 벽은 생각보다 높고, 그래서 '탈북자'라는 정체성을 벗어 던지지 않는 한 이들에게 근본적인 신뢰감을 주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물론 모두가 불신한다는 뜻은 아니다. 친절한 사람도 많다). 그래서 북향민들 앞에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끝없는 인정 투쟁과 신뢰 투쟁이라는 과제가 놓인다. 인정 투쟁은 악셀 호네트가 소개한 이론이며, 신뢰 투쟁은 인정 투쟁에 빗대어 내가 만든 개념이다. 인정 투쟁과 신뢰 투쟁은 주류에 서지 못한 사람들이 해야 하는 것으로 당연시되는 숙명 같은 것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조경일 작가는 함경북도 아오지 출신이다. 정치컨설턴트, 국회 비서관을 거쳐 현재 작가로 활동하며 대립과 갈등의 벽을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까 줄곧 생각한다. 책 <아오지까지> <리얼리티와 유니티> <이준석이 나갑니다>(공저) <분단이 싫어서>(공저)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