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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침, 주방 식탁에 눈에 띄는 상장이 놓여있었다. 상장 위엔 중학생 딸아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여우주연상이라니?

아이에게 물어봤다. 아직 잠이 덜 깬 아이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학교 수업시간에 역할극을 하고 투표로 받은 거라고 한다. 여자 중에서는 본인 표가 제일 많이 나왔다고 했다.

국어 시간에 <같은 말, 다른 뜻>이라는 주제로 조별 역할극을 했나 보다. 아이의 조에서는 '밥 먹었어?'를 정말 밥 먹었는지 묻는 것과 의례적인 안부인사로 나눴다고 했다.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은데 이걸 어떻게 연기로 표현했을지 궁금해서 나는 아이에게 자꾸 물어봤다. 그런데 아침잠과 싸우는 사춘기 아이가 엄마의 질문에 상냥할 리 없다. 며칠 지난 거라 생각이 잘 안 난다면서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한참 후에 나온 아이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렇게 들어가 버린 게 내심 미안했는지, 묻지도 않은 얘길 해줬다. 상장에 있는 사진은 국어 선생님이 상장을 만들려고 직접 서울 강동구 JYP엔터테인먼트(대형 연예기획사) 건물 앞까지 가서 찍어온 거라고 강조했다나. 이 날 수업이 재밌었다고 했다.

 아이가 학교에서 받아온 여우주연상
아이가 학교에서 받아온 여우주연상 ⓒ 최은영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수업 방식이다. 이런 상장을 만들겠다고 JYP 사옥까지 갔다 온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내심 이게 아이들의 '시험'을 위한 국어에는 도움이 될까 싶은 생각도 실은 들었다. 입시 시험에서 '밥 먹었어?'를 상황극으로 구분하는 문제 같은 건 사실 없을 테니 말이다.

지난 10월, 남편이 쉬는 날에 아이 공개수업이 있어서 같이 간 적이 있다. 도형 관련한 수학시간이었지만 문제풀이는 하나도 없었다. 대신 한 시간 내내 아이들은 만들기만 했다. 시에르핀스키 삼각형이라고 했다. 정삼각형의 둘레가 무한으로 수렴하는 것을 간단한 만들기로 실습하는 과정이었다.

나 어릴 적과는 다른 학교 수업... 24% 안팎의 아이들

내 기억 속 어릴 적 수학시간은 '선생님 목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공간이었다. 아예 그냥 자는 아이들도 있었다. 반면 딸아이의 수학 수업은 다들 본인의 작업을 하느라 집중하느라 적막이 흘렀다. 자는 아이도 없었다. 같은 적막은 있지만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아이 수업과 나 때의 수업은 같은 적막이 있었지만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자료사진).
아이 수업과 나 때의 수업은 같은 적막이 있었지만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자료사진). ⓒ jizhidexiaohailang on Unsplash

이날 학교를 나오면서 남편 말하길, 수업은 활기찬 거 같아서 참 좋은데 혹시 시험도 저렇게 보냐고 물었다. 도형파트는 삼각형 무게중심을 이용한 문제풀이를 잘해야 할 거라고 내가 대답했다.

학교에서 이렇게 재미있는 수업을 한들, 결국 수능시험을 잘 보려면 학원에서 문제풀이를 배워야 하지 않느냐고 남편이 또 묻는다. 그게 지금 한국 교육의 현실 아닐까, 라며 나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러고 또 얼마 후에 아이 학교에서 고교학점제 설명회가 있었다. 2시간에 걸친 열띤 설명회 끝에 질문 시간이 됐다. 상위 24%(이게 인서울 입시전략을 세울 최소 범위라고 한다)에 안 들어가는 아이들은 어떤 전략이 있나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손을 들고 질문할 용기가 없었다. 대신 그날 퇴근한 남편을 붙들고 24% 밖에 있는 아이들을 위한 설명회는 없냐며 괜히 투덜거렸다.

남편은 이제 회사에서 관리자급으로 일한다. 그 동안 수많은 팀원들을 대하면서, 그는 서울권 대학출신이나 지방대 출신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가 아니라, 일을 대하는 태도와 협력으로 시너지를 만드는 성품이 그 사람의 일과 태도를 결정한다는 뜻이었다.

아직 빈 페이지가 많은 책

그래서인지 설명회에 갔다 와서 씩씩대는 나를 보며 남편은 씩 웃는다.

그러면서 남편 말하길, 부모는 그저 아이와 친함을 잘 유지하고 답 없는 경쟁 스트레스에서의 피난처만 만들어주면 그만이라고 했다. 그다음은 아이가 자기가 알아서 할 거라며, 도 닦는 사람처럼 갑자기 나를 토닥였다. 아니 이 사람이 왜 이러지.

듣고 보니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가급적 시험에 나오는 걸로 수업을 해달라고 학교에 편지 넣을 수도 없고, 교육청에 수업 내용과 시험 문제를 통일시키라고 압박할 수도 없다. 그게 맞는 방향인지도 의문이다.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에 머리 싸매고 있어 봤자 나만 스트레스다.

아이의 삶은 아직 빈 페이지가 많은 책이다. 비유하자면 나는 그 책에 직접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 옆에서 조용히 책장을 넘겨주는 역할일 것이다.

아이가 선택한 단어들로 자신만의 문장을 잘 써 내려갈 수 있도록, 나는 다만 잉크가 마르지 않게 마음의 여유를 채워 주면 될 일이다.

때로는 부모님 내 걱정이 바람처럼 아이의 길을 흐트러뜨릴까 두렵다. 하지만 바람이 불어도 아이는 자신의 방향을 찾아갈 것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따뜻한 햇살 같은 믿음과 부드러운 쉼터 같은 품으로 기다려 주는 것뿐이다. 아이의 속도에 맞춰 걸음을 맞추는 그 순간들이, 부모로서 내가 남길 수 있는 가장 소중한 흔적일지도 모른다.

내가 기록하고 바라는 딱 그만큼만이라도 실제가 되는 삶이길, 쓰는 만큼 살아낼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반갑다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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