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대통령이 2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2024 증권·파생상품시장 개장식에 참석해 박수를 치고 있다. 2024.1.2 ⓒ 연합뉴스
"한 번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왜 반대하는지, 왜 말을 바꿨는지, 왜 그때는 그렇게 상법 개정하겠다고 생색을 냈는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여권 주요 인사들의 말바꾸기를 비판하고 나섰다. "기억상실증"이라거나 "집단 망각증에 걸린 것 아니냐"며 강도 높게 꼬집기도 했다. 지난 2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다. 과거 상법 개정에 찬성 의견을 냈던 여권의 주요 인사들이 태도를 바꿔 반대하고 나선 것을 꼬집은 것이다.
현재 민주당은 소액주주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뿐만 아니라 '주주'까지로 확대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기업의 성장성을 믿고 투자한 소액 투자자들이 기업의 물적 분할(핵심 사업부를 떼어내 재상장 시키는 일)로 '뒤통수' 맞는 일들이 빈발하자 투자자 보호를 위한 제도를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상법은 상장회사와 비상장회사까지 모든 기업에 적용된다.
이 대표의 지적처럼 실제 여권의 주요 인사들은 한때 '상법 개정'에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달라졌다. '김건희 여사 리스크'에 둘러싸인 윤 대통령은 더이상 상법 개정을 말하지 않고 정부는 상법 개정에 부정적이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상법이 아닌 자본시장법을 개정하자"며 말을 바꿨다. 한 대표는 민주당이 당론으로 발의한 상법 개정안을 가리켜 "많은 혼란이 생길 것"이라고 반대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상법 개정안과 관련해 그동안 달라진 여권 인사들의 주요 발언들을 정리해봤다.
[윤석열 대통령·정부] "소액주주 이익을 반영하도록 상법 개정 추진"

▲윤 대통령, 2024 증시 개장식 축사윤석열 대통령이 1월 2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2024 증권·파생상품시장 개장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사회가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액주주의 이익을 책임있게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상법 개정을 추진하겠다."
윤 대통령이 지난 1월 2일 한국거래소가 개최한 '2024년도 증권·파생상품시장 개장식'에서 내놓은 발언이다. 1400만 '개미 투자자들'의 열망을 정책으로 반영하겠다며 그 대안 중 하나로 상법 개정을 언급한 것이다.
분명 올 상반기까지도 상법 개정을 둘러싼 정부 의지는 확고했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월 26일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윤석열 정부 임기 내내 자본시장 선진화를 중점 과제로 삼아, 상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또 윤 대통령이 5월 9일 "기업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방안 마련"을 지시하자 최 부총리는 같은 달 27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상법상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를 도입하는 방안에 대해 법무부 및 금융위원회와 공청회를 거쳐 의견 수렴을 할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에 주주까지 포함하는 안을 정부가 직접 낸 것이다.
하지만 한국경제인협회를 포함한 8곳의 경제단체가 상법 개정에 반대하는 공동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하자, 정부의 태도가 돌변했다. 최 부총리는 지난 7월 17일 재계가 주최한 정책 강연에서 상법 개정안에 대해 "기업하는 분들이 걱정하는 결론은 정부가 도출하지 않겠다"라며 "기업인들이 경영하는 데 불확실성을 높이는 쪽으로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이후 최 부총리는 지난 28일 KBS 라디오 '성공예감 이대호입니다'에 출연해 "상법에 '이사의 충실의무'에 주주를 넣으면 의무가 충돌되는 등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크고 법체계에 안 맞는다는 주장도 있다"며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주주의 비례적 이익 보호, 획기적인 법안"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2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우주항공산업발전포럼 주최 정책 토론회에 참석한 뒤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받고 있다. ⓒ 남소연
"법률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보호하도록 하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 획기적인 법안이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5월. 국회 대정부 질문 과정에서는 모처럼 훈훈한 장면이 연출됐다. 법무부 장관 임명 후 연일 야당 의원들과 각을 세우던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이용우 전 민주당 의원으로부터 '주주 비례적 이익 보호'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에 대한 질의를 받고 "획기적 법안"이라는 긍정 평가를 내놨기 때문이다. 당시 이 전 의원이 발의한 상법 개정안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의 비례적 이익과 회사'로, 확대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사회 이사들이 경영적 판단을 내릴 때 회사뿐만 아니라 주주 이익도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다.
당시 한 대표는 "(상법 개정의) 방향에 공감한다. (이 전 의원의) 입법을 보고 '이런 것도 있구나' 했다"며 "비례적으로 본다는 취지는 충분히 알겠지만 그런 입법례가 없다.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1인 주주 회사에 대해서도 배임이나 횡령을 인정하는 체제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제도와 조화될 수 있는지 법안 심의 과정에서 잘 검토해보겠다"고 말했다. 또 "저희(법무부)도 상법 특별위원회를 진행하고 있다"며 "물적분할 등 기업 구조조정 시 소액주주를 보호하는 방안에 대해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다"고도 이야기했다. 상법 개정안은 법무부 소관 법률안이다. 그만큼 법무부의 '의지'가 중요한 셈이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법무부가 국회에 제출한 상법 개정안에는 정작 이사의 충실의무를 확대하는 안은 들어있지 않았다. 주주들이 온라인상에서 주주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전자 주주총회' 관련 내용과 함께, 기업 물적분할에 반대하는 주주들에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하지만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폐기됐다. 또 법무부는 올해 1월 주주 충실 의무와 관련해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규정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한때 이용우 전 의원이 발의한 상법 개정안을 "획기적"이라고 평가한 한동훈 대표 역시 법무부 장관에서 여당 당대표로 위치가 바뀌는 동안 상법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한 대표는 지난 21일 민주당이 당론으로 추진 중인 상법 개정안을 가리켜 "주주를 충실의무 대상으로 넣으면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로 굉장히 많은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반대 뜻을 밝혔다.
[이복현 금감원장] "주주까지 충실 의무 대상 돼야 한다는 방침 명확"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28일 오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은행지주 이사회 의장 간담회를 마친 뒤 백브리핑하고 있다. ⓒ 연합뉴스
"금감원은 이사회 충실 의무 대상이 주주로까지 확대돼야 한다는 입장이 명확하다. 다만 삼라만상을 다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는 배임죄는 현행 유지보다는 폐지가 낫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여권 인사들 중 상법 개정에 대한 의지를 공식석상에서 가장 많이, 자주 드러낸 인물이다. 심지어 올해 5월 정부가 상법 개정 추진 의지를 밝힌 후, 재계를 중심으로 충실의무가 확대될 경우 배임죄로 인해 소송이 남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일자 지난 6월 14일 배임죄 폐지라는 '중재책'까지 스스로 마련했다.
당시 이 금감원장은 "형사법상 배임죄로 인해 이사회 의사 결정이 과도한 형사처벌 대상으로 왜곡돼 있다"며 "의사 결정 과정에서 소액 주주 보호가 미흡할 경우에 임무 위배로 보고 배임죄로 귀결되는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형법상 배임죄를 건드리는 것이 쉽지 않다면 상법에 경영 판단의 원칙을 명확히 하고 형법상에 규정된 특별 배임죄만이라도 폐지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최근 이재명 대표가 상법 개정에 따른 재계 반발을 달래려고 꺼내들고 있는 '당근책' 또한 이 금감원장이 앞서 언급한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심지어 금감원은 몇 차례나 충실의무 확대를 논의하는 간담회를 자체적으로 열었고, 상법 개정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금감원장은 지난 8월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 관련 간담회'에서 "한국적 기업지배구조의 특수성과 투자자 보호가 미흡하다는 점이 밸류업의 걸림돌"이라고 했고, 같은 달 28일 역시 금감원에서 열린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연구기관 간담회'에서도 "합병, 공개매수 등의 과정에서 지배주주만을 위한 의사결정으로 국내·외 투자자들이 크게 실망하는 경우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10월부터 이 금감원장은 후퇴했다. 이 금감원장은 지난달 17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상법 개정은 정부 내에서 여러 가지 안을 검토 중이라 이 자리에서 뭐라 말씀드리기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며 발언 수위를 크게 낮췄다. 지난 28일에는 아예 말을 바꿨다. 이 금감원장은 '은행지주 이사회 의장 간담회' 직후 기자들과 만나 "상법보다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해 주주 보호 원칙을 만드는 게 더 합리적"이라며 "상장법인은 2400여 개 정도이고 비상장법인은 103만 개가 넘는다. 과연 모든 기업에 (충실의무를) 적용하는 게 적절한지 의문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