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기포, 혁명의 포고문을 반포하다
[동학농민혁명 무장대기포. 백산대기포를 거쳐 황토현 대승과 황룡촌 대승, 그리고 전주성점령, 집강소 설치로 연결되는 그야말로 혁명의 본격 출발점이다. 무장에서 반포된 포고문을 보면 당시 동학혁명군의 위상과 조선정부 및 관군에게 어떤 입장이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무장혁명군은 동도대장기와 보국안민창의기, 접과 포의 각종 깃발 아래 모여든 충군애국의 동학열사들이었다.]
전봉준은 손화중, 김개남과 긴밀한 논의 끝에 무장대기포(茂長大起包)를 결행하게 된다. 안핵사 이용태의 무차별적인 폭력탄압에 울분을 금치 못한 전봉준은 우선 금구·원평의 김덕명, 태인의 김개남·최경선, 무장의 손화중 등과 대규모 기포(起包)에 관한 논의를 하였다. 그런데 손화중은 기포에 쉽게 응하지를 않았다. 그러한 사연은 최법헌 즉 해월 최시형 선생의 비폭력 평화주의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난 2월 19일 전면적인 동학 기포를 논의하기 위해 공음면 신촌의 김성칠 접주집에서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서인주, 임천서, 송문수, 정백현, 강경중, 김영달, 고영숙, 최재형 등 13명의 지도자들이 모였다. 이때 손화중은 해월 선생의 시기상조(時機尙早)론에 따르는 자신의 입장을 말했었다. 그러나 전봉준의 끈질긴 설득으로 보국안민, 제폭구민의 대의명분에 결국 적극 동참은 물론 주도세력으로서 선봉에 나서게 된 것이다.
무장기포는 전봉준·손화중 두령의 주도와 김개남 두령의 협조에 의한 대규모 동학기포였다. 다시 말해 동학 포·접 조직을 기반으로, 동학도인과 농민들이 적극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
무장대기포(茂長大起包)
동학농민혁명의 기포지인 무장현 동음치면 구수내 당산마을 부근은 동학농민군 훈련 교장(敎場)이 있어서 많은 숫자들이 집결하기 좋은 장소였다. 이곳은 구적산 아홉골에서 내려오는 물에 의해 연병장 같은 모래사장이 크게 조성되어 있어 많은 사람의 훈련과 집합에 좋은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3월, 당산마을에는 예년과 같이 화창한 봄이 찾아왔다. 겨우내 쌓였던 눈도, 처마 밑 고드름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다. 농부들은 밭 갈기에 기지개를 켜고, 따뜻한 양지쪽에는 어느새 노란 개나리가 피어났다. 보릿잎이 푸릇푸릇 자라났으며, 버드나무 가지에도 물이 오르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뛰노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솟구쳐 오르는 종달새 노래처럼 싱그러웠으며, 울타리 너머 아이를 부르는 어미의 목소리는 투박하면서도 정겹게 들렸다.
이러한 평화와 사랑이 가득한 시골 마을에 갑자기 마른 하늘에 천둥 벼락이 내리 칠 것 같은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3월 19일부터 집결하기 시작한 동학농민군의 중앙에는 수많은 깃발들이 바람에 휘날렸고, 동학 기포(起包)의 분위기가 한창 고조되었다. 동학 접(接)명을 쓴 작은 깃발들, 포(包)명을 쓴 중간 깃발들, 그리고 제일 크고 높은 '동도대장기'와 '보국안민창의기'가 펄럭이며 당당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전봉준은 이미 3월 17일경 소수의 정예군과 함께 당산마을에 도착하였다. 또한 손화중포의 김규일, 강경중, 고영숙, 손경찬, 오시영, 임천서 등 접주 수십 명이 각각 예하 동학도 수백 명씩을 인솔하고 기포에 합류하였다. 무장은 손화중포의 중심을 이루는 곳으로, 전라도의 동학 조직 중 최고의 세력을 갖추고 있어 동학농민군 기포지로 삼기에 최적지였다.
동학농민군은 이미 다섯 번의 교조신원운동 즉 취회를 통하여 조직 동원과 숙식 해결 등 대규모 군대 이동을 이끌어 가는 훈련을 한 셈이었다. 언제 발소리를 죽여야 하며, 언제 함성을 질러야 하며, 언제 싸워야 하는지 나름대로 능숙하게 훈련되어 있었다. 전봉준과 손화중은 이미 접주들의 자발적 참여와 석교촌 사창(社倉_지방마을곡물대여기관)에서 군량미도 확보하였다. 특히 고부봉기에서 얻은 전투 경험은 큰 교훈으로 작용하였다.
무장기포(茂長起包)의 주역 손화중·전봉준·김개남 등은 3월 20(양.4.25)일에 총집결, 3월 21일 해월 최시형 선생의 탄신일을 기하여 본격 출진, 4월 27일 전주성 점령까지 37일 작전에 돌입하였다. 무장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혁명을 선포하는 포고문(布告文)을 반포하고 고을의 경계선을 넘는 월경(越境) 즉 전면적인 기포(起包)를 무장에서 단행하였다.
이날 아침 수천 명의 군중이 집결하였으며, 전봉준, 손화중, 대두령은 당산마을 앞 넓은 들판 한가운데 자리한 바위에 올라 동학농민군 진군 계획을 설명했다. 김개남 대두령은 무장 출정식을 앞두고 자신의 병력을 더욱 보충하기 위해 다시 본거지로 향했다. 전봉준과 손화중은 무장에 모인 동학농민들에게 기포의 명분을 공고하였다.
"민씨 정권과 탐관오리들이 임금님의 눈과 귀를 가려 정치가 잘못되었다. 세도가와 관리들의 탐학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졌으며 일본과 서양의 외세 침략이 눈앞에 다가왔다. 동학이 하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려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것이다. 우리는 살상과 약탈을 하지 않을 것이나, 오직 탐관오리만은 처벌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 함께 뜻을 모아 백성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에 동참하기를 우러러 바란다!"
동학농민혁명사에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에 길이 빛날 문건이 하나 있다. 바로 무장동학포고문(茂長東學布告文)이다. 무장포고문은 전봉준과 손화중 그리고 김개남 장군이 합의한 창의문(倡義文)형태의 명문장이다. 무장포고문은 3월 20일경 세상과 백성들 앞에 반포되었다.
무장동학포고문(茂長東學布告文)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사람에게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관계는 가장 큰 인륜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충직하며, 아버지가 자애롭고 아들이 효성스러운 뒤에야 가국(家國)이 이루어지고 끝없는 복이 미칠 수 있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자애롭고 총명하며 슬기롭다. 현량(賢良)하고 정직한 신하가 밝은 임금을 보좌한다면 요순(堯舜)의 덕화(德化)와 한(漢)나라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치세를 날짜를 손꼽으며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하된 자들은 보국(輔國)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한갓 벼슬자리만 탐내며 (국왕의)총명을 가린 채 아첨을 일삼아 충성스러운 선비의 간언을 요언(妖言)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匪徒)라 일컫는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보국(輔國)하는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들을 수탈하는 관리들만 득실대어 인민(人民)들의 마음은 날로 더욱 어그러져서 들어와서는 즐겁게 살아갈 생업이 없고 나가서는 제 한 몸 간수할 방책이 없다.
학정(虐政)은 날로 더해지고 원성이 이어지고,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분별이 드디어 무너져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사유(四維_예禮, 의義, 염廉, 치恥)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나라가 곧 망한다."고 하였다.
바야흐로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욱 심하다. 공경(公卿)으로부터 방백수령(方伯守令)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태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단지 남몰래 자신을 살찌우고 제 집을 윤택하게 하는 계책만 생각하여 벼슬아치를 뽑는 일을 재물이 생기는 길로 여기며, 과거 보는 장소를 온통 사고파는 장터로 만들었다. 허다한 재화와 뇌물이 국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의 창고를 채우고 있다.
국가에는 쌓인 부채가 있는데도 갚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음탕하게 노는 데 거리낌이 없어서 온 나라가 어육(魚肉)이 되고 만백성이 도탄(塗炭)에 빠졌다. 참으로 지방관들의 탐학(貪虐)때문이다. 어찌 백성들이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약해지면 나라가 멸망한다.
그런데도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방책을 생각지 않고 시골에 저택이나 짓고 오직 저 혼자서 살길만 도모하면서 벼슬자리만 도둑질하니 어찌 올바른 도리이겠는가.
우리들은 비록 초야(草野)의 유민(遺民)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농사지어 먹고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살아가고 있으니 국가의 위망(危亡)을 좌시할 수 없어서, 온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합치고 억조창생(億兆蒼生)이 순의하여 지금 의(義)의 깃발을 치켜들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생사의 맹세로 삼았다.
금일 이러한 광경은 비록 놀랄만한 것이지만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각자 자신의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여 모두 태평성대를 축원하고 다함께 임금의 교화를 누릴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다.
(무장동학포고문 국역은 진윤식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의 도움으로 필자가 정리하였다.)
동학농민군은 머리에 흰색과 황색의 수건을 둘렀으며, 옷은 대부분 흰색으로 통일했다. 특히 가슴과 등 쪽에 동학의 궁을영부(弓乙靈符)를 붙였고, 허리춤에는 물통을 매달았다. 대열 가장 앞에는 칼, 창, 활 등의 살상 무기를 든 선봉대와 기마병(騎馬兵)이 앞서가고, 그 뒤에 재인부대(才人部隊)가 징, 나팔, 북, 꽹과리 등으로 구성된 풍물패로 분위기를 돋우며 대열을 선봉에서 이끌었다.
또 그 뒤로는 '동도대장기'와 '보국안민창의기'가 높게 펄럭였다. 각 포와 접의 깃발은 대열의 앞과 중간 중간에서 바람에 휘날렸다. 무장기포 당시 동학농민군의 무기는 죽창을 중심으로 하였고 나머지는 칼과 낫, 삽, 쇠스랑 등 대부분 농기구였다.
전봉준과 손화중은 좌군과 우군으로 나눠 각자 말에 올라 직접 통솔했다. 전봉준은 상복 차림으로 허리에 검을 차고 목에는 동학의 105염주를 걸고 백마(白馬) 위에 올라탔다. 손화중도 105염주를 목에 걸고 허리에 검을 찼으며, 활과 화살을 움켜쥐고 보기도 튼튼한 적마(赤馬)에 올라탔다.
당산 들녘에서는 동학농민군 선발에서 빠진 노약자와 여성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군중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목숨을 건 동학농민혁명의 출정을 응원하였다. 전봉준 대두령이 출진 직전에 다시 군중들을 향해 외쳤다.
"동학의 영부를 몸에 붙인 우리 천군(天軍)은 적들의 총알도 피해 갈 것이며, 입으로 주문(呪文)을 외우는 신군(神軍)들은 한울님(天主)의 보호로 천하에 당할 자들이 없을 것이다! 행진할 때는 함부로 생물을 해치지 마라. 특히 효제충신(孝悌忠信)이 살고 있는 마을로부터 십 리 안쪽에는 주둔하지 말라!"
드디어 전봉준과 손화중이 출군 명령을 내렸다.
"출진하라!" "진군하라!"
동학농민군 대두령들의 명령이 떨어지자, 재인부대의 신바람 나는 풍물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으며, 여기저기서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 주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동학농민군들이 때로는 걷고 때로는 뛰고 풍물과 주문 소리에 발을 맞추어 '칼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때 손화중 두령의 유씨 부인은 동학농민군 가족들과 함께 당산 들녘 언덕에 올라 초조한 눈빛으로 손을 흔들었다. 유씨 부인은 함께한 동학군의 부인들과 자녀들의 손을 맞잡고 동학군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직 한마음으로 무사 귀환을 염원하였다.
전봉준과 손화중의 동학농민군 주력부대는 20일 무장 당산을 출발하여, 고창현을 거쳐 흥덕현의 사포와 후포, 그리고 부안현 줄포를 지나 고부에 도착했다. 마치 세차게 부는 바람처럼,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물결처럼 고부관아를 재점령하고 관군의 무기도 탈취했다. 동학농민군은 고부 향교와 관청에서 하루를 머물고 25일 백산성에 진을 쳤다.
한편 일본은 조선군과 동학도에 대한 지속적인 첩보 활동을 이어 오다가, 무장기포를 계기로 군함 축파호, 대화호 등을 투입하여 침략 활동을 더욱 강화했다. 일본은 조선을 장악하기 위해서 철저한 계산속에 청일전쟁을 도발하고 동아시아 지역을 점령하는 계략을 세워나갔다.
「동학농민군. 동학혁명군. 동학창의군, 그들은 성난 파도였다. 그들은 거대한 태풍이었다. 그들은 타오르는 들불이었다. 동학 주문은 하늘의 힘. 동학 영부는 하늘의 신표. 동학 재인부대는 하늘의 용사다. 동도대장기. 보국안민창의기. 각 포와 접의 깃발들이 신바람에 휘날린다. 죽창이어라! 농사지을 때나 써야할 낫과 삽, 쇠스랑이 웬 말이냐. 그건 딱 하나 백성이 하늘임을 깨닫고 하늘세상을 실현시키기 위함이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