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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월, 자정이 넘은 시각. 집에 경찰들이 찾아왔다. 남편이 왜 침대가 아닌 바닥에 누워 있느냐고 아내인 내게 따지듯이 묻는다. 하루 반 전까지 화장실을 혼자 갔다고, 그런데 하루 전에는 화장실을 다녀오더니 침대에 올라가지를 못했다고, 그래서 바닥에 이불을 깔아줬다고. 그런데 그 말을 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다(자택에서 임종하는 경우, 112에 신고를 하는데 사망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경찰이 방문한다).

경찰이 남편에게 지병이 있느냐고 물었다.

"네, 암 수술을 했어요. 항암을 하다가 멈춘 상태입니다."

나 대신 둘째 사위가 대신 대답했다(둘째 딸이 옆 단지에 살아 집에 와 있었다). 남편 책상에 있는 대학병원 투약 안내서를 내가 경찰에게 내밀었다. 주황색 조끼 입은 사람들이 왔다. 그다음부터는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 차려보니 장례식장이었다. 그제야 큰 딸에게 전화를 했다. 새벽 2시에 전화를 해서 그랬나, 휴대폰 너머의 딸도 '여보세요'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흐느낀다.

요양원에 가려고 했는데 장례식장이라니

두 시간 후, 큰애가 왔다. 그 애를 안고 또 엉엉 울었다. 조용한 새벽 빈소에 모녀의 울음소리가 깊게 파묻혔다. 어느새 딸은 장례지도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무슨 종이들을 읽고 뭔가를 썼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일을 해온 사람 같았다. 장례지도사와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는 분명하고, 때로는 단호하기까지 했다.

그걸 지켜보며 나는 딸의 얼굴에서 남편의 흔적을 발견했다. 딸이 눈을 찡그리며 뭔가를 생각하는 모습이, 결정을 내릴 때 입술을 살짝 깨무는 습관이 그 사람과 닮아 있었다. 그걸 깨닫자 가슴이 저릿했다. 남편은 우리 곁에 없지만, 이렇게 딸을 통해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고 있구나. 그 생각에 차가운 새벽 공기가 조금 덜 시리게 느껴졌다.

남편은 새벽에 소천했기 때문에 3일장에서 하루가 없는 셈이라고 했다. 이런 경우 하루를 추가할 수도 있다고 했지만 싫다고 했다. 올 사람이 별로 없는 줄 알고 그랬는데 사위들 회사에서 수 십 명이 왔다. 꽃도 계속 들어왔다.

옛날에 친정엄마가 나에게 "너는 아들이 없어서 장례식장도 썰렁할 거"라고 했는데, 아니었다. 나는 영정 사진을 보며 말했다.

"아들 없어도 괜찮네. 여기 장례식장에서 당신 꽃이 제일 많아. 그런데 당신이 여기 들어온 사람 중에서 제일 어려."

 옛날에 친정엄마가 나에게 "너는 아들이 없어서 장례식장도 썰렁할 거"라고 했는데, 아니었다.
옛날에 친정엄마가 나에게 "너는 아들이 없어서 장례식장도 썰렁할 거"라고 했는데, 아니었다. ⓒ phictionalone on Unsplash

장례식장 화면에 각 방의 상주와 고인의 나이가 떴다. 남편 나이인 70대는 아예 없었다. 우리 빈소 양 옆으로 고인은 다 90대였다. 그게 억울해서 다시 눈물이 나는데, 손님들이 또 들어왔다. 갑자기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다. 나는 수십 번 반복했던, 똑같은 대답을 녹음기처럼 재생했다.

"응, 열흘 전까지 혼자 이발하러 갈 정도로 멀쩡하다가 갑자기 기력이 달린다며 일주일 동안 누워 있었고 하루 전까지 화장실도 혼자 가다가 엊그제부터 못 일어났고 그대로 가버렸어."

어느 순간, 이 남자가 나 고생 안 시키려고 이렇게 순식간에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을 잘 못 가길래, 주말이 지나면 요양원을 알아보려고 했다. 내가 부축하기에는 같이 넘어질 거 같았다. 요양원에 가도 속옷 세탁은 내가 다 해서 내가 입혀줘야지, 그러고 있었다.

떠나기 3일 전쯤인가, 남편은 말할 기운조차 없는지 방에 누워만 있었다. 병원을 가자고 하면 남편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안 가!'를 간신히 내뱉었다.

그 모습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나는 알았으니 더 기운 빼지 말라고 했다. 그러고서는 사과랑 고구마를 곱게 갈아서 가져다줬다. 남편은 희미하게 웃더니 잘 받아먹었다. 다 먹더니 허공에 손을 흔드는 거다.

나는 그 손을 얼른 잡아채 이불에 넣어주며 팔 아프게 왜 흔드냐고 핀잔을 줬다. 지금 보니 내게 하는 인사였던 거 같다. 이 답답한 사람아, 나 이제 가려고 인사하는 거잖아. 길석아 잘 있어. 나 없어도 씩씩하게 잘 살아, 그거였다.

그 손을 이불에 넣어버리지 말고 그저 꼭 잡아주면서 나도 대답했어야 한다. 그래, 나도 당신이랑 살아서 행복했어. 내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가, 나 당신 없이도 잘 노는 거 알잖아. 그렇게 했으면 그가 가는 길이 조금 더 편했을까.

장례식이 끝나고 애들이 내가 시킨 대로 남편 방을 싹 정리했다. 그랬어도 나는 한동안 그 방문을 열지 못했다. 라디오 틀어놓고 책 보던 남자가 아직 그 방에 있을 거 같았다. 나가는 내게 어딜 가냐 묻지도 않고 잘 갔다 와, 돈 아끼지 말고 맛있는 거 먹어,라고 인사할 거 같았다.

비어 있지 않은 남편의 방

싹 바뀐 남편 방 한동안은 이 방문을 열 수 없었다.
싹 바뀐 남편 방한동안은 이 방문을 열 수 없었다. ⓒ 김길석

계절이 한바퀴 돌았다. 다시금 그때처럼 추운 겨울이다. 남편 없는 집에 꽤 적응한 줄 알았는데 날이 추워지니까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 돌아간다 해도 그전만큼 울지는 않는다.

남편의 부재는 처음엔 날카로운 바늘처럼 내 일상 곳곳을 찔렀지만, 이제는 둥글게 닳아 내 안에 조용히 자리 잡았다. 차마 방문조차 열지 못했던 날들이 지나고, 언젠가 용기를 내어 문을 열었을 때 방 안의 공기는 여전히 그의 체온을 간직한 듯했다.

남편의 흔적은 마치 겨울 새벽 공기 같았다. 차갑지만 투명하게 내 숨결 사이로 스며들었다. 문을 열지 못하던 날들, 나는 그 방을 둘러싼 공기의 무게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언젠가 문틈으로 들어온 햇살에 이끌려 방 안으로 발을 들였을 때, 그곳은 비어 있지 않았다. 남편의 말투, 웃음소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흔들었던 손짓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을 오래도록 머금고 있다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최성민씨, 당신은 나의 계절을 돌고 돌아 내 삶의 가장 따뜻한 겨울로 남을 거야.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어. 나중에 만나.

#남편#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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