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李在明, 1886~1910)은 평안북도 선천에서 출생하여 8세 때 평양 아청리로 이사하여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하였다. 1904년 미국 노동이민에 응하여 하와이를 거쳐 미국에 갔으나, 고국에서 한일협약과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소식을 듣고 국권회복을 위해 1907년 10월 귀국하였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을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동지의 규합에 나섰다.
그는 나라를 강탈한 외적(外賊)의 수괴가 이토라면 나라를 판 내적(內賊)의 수괴는 이완용이라고 생각하였다. 이토를 먼저 처단한 안중근 의사도 이와 같은 뜻을 갖고 있었다.
두 의사는 따로 이토를 처단하기로 작심하고 때를 기다렸다. 이 의사는 1909년 1월 초대 조선통감에 취임한 이토가 허수아비로 전락한 순종황제와 함께 평양을 순행하기로 되었을 때 이토를 암살하고자 동지 몇 사람과 평양역 부근에서 대기 중 안창호의 만류로 목적을 접어야 했다. 이토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순종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으므로 안창호가 황제의 안전을 생각하여 만류한 것이다. 이토는 결국 그해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 의사에게 사살되었다.
이 의사는 일제의 침략 수괴들을 처단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동족으로서 왜적에게 나라를 파는데 앞장 선 매국노들을 처단하는 것도 못지않다고 여기고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도륙하기로 작정하였다.
자신의 몸을 던져 매국노들을 처단하기로 결심한 이 의사는 1909년 11월 하순 평양 경흥학교 서적종람소와 야학당에서 동지들과 회동하고 거사의 계획을 짰다. 몇 차례 숙의를 거듭한 끝에 이 의사와 이동수(李東秀) , 김병록(金丙祿)은 이완용, 김정익(金貞益) ․ 조창호(趙昌鎬)는 일진회의 대표 이용구를 처단하기로 결정하였다.
매국노들을 도륙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 이 의사는 12월 12일 이완용의 거처를 살피던 중 그달 23일 오전에 서울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이완용 등 매국노들이 참석한다는 신문보도에 접하였다.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 온 것이다.
이날 오전 11시 30분경 이 의사는 성당 문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다가 이완용이 거만한 모습으로 인력거를 타고 앞으로 지나갈 때 비수로 꺼내들고 이완용에게 달려들었다. 이를 제지하려는 차부 박원문을 한칼에 찔러 거꾸러뜨리고 틈을 주지 않고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다.
혼비백산한 이완용은 인력거 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이 의사는 재빨리 이완용을 타고 앉아 두 번이나 더 칼을 휘둘렀다. 인력거 주변은 유혈이 낭자하였고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판단한 이 의사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순간 이완용을 경호하던 한국인과 일본인 순사에게 허벅지를 찔려 붙잡혔다. 차부는 현장에서 숨지고 이완용은 급히 저동 자택으로 옮겨졌다. 이완용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출혈이 심하고 맥박이 불규칙하여 빈사상태에 이르렀다. 서울에서 가장 이름난 한성병원의 의사가 달려오고 30분 정도 뒤에는 일본인 의사 2명과 간호원이 도착 하였다. 급보를 받은 대궐에서도 전의 2명이 달려왔다.
이완용의 상처는 예상외로 깊었다.
"왼쪽어깨로 들어간 칼 끝은 왼쪽 폐를 관통하는 치명상을 입혔다. 숨을 쉴 때 마다 구멍뚫린 폐로 공기가 새어나와 폐기종을 일으킬 징후까지 보였다. 이완용은 만년에 해소병으로 고생을 하고 끝내 서식과 폐렴으로 죽게되지만 그 원인이 이때 입은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다. 허리부분을 찔린 두 번째와 세 번째 칼의 상처도 신장 가까이에 이를 정도로 심각했다. 의사는 이완용이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일어나 앉게 되기까지는 최소한 30일이 지나야 될 것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주석 1)
일제경찰은 이 의사를 끌고 이완용의 집으로 갔다. 이때 급보를 듣고 위문 온 농부대신 조중응이 의사를 보고 "네가 흉한이냐" 하자, 이 의사는 눈을 부릅뜨고 "너 따위 역적놈이 감히 나에게 너라고 하느냐"하고 호통을 쳤다. (주석 2)
이 의사의 의연함은 태산과도 같았다.
이 의사의 12·22 의거로 그와 동지 12명은 경찰에 피체되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다. 1910년 5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장 쓰가하라(塚原)의 주재로 첫 공판이 열렸다.
이 의사의 의연함은 재판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쓰가하라가 "이완용을 죽이려 한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묻자 "이완용은 죽일만큼 죄가 허다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큰 죄목이 여덟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을사늑약을 체결한 것"이라 진술하자 재판장이 이를 중단시켰다. 일제는 이 의사의 입을 통해 밝혀질 자신들의 죄상이 폭로될까 두려워 입을 막은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안중근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상'을 열거하며 그를 처단하는 정당성을 적시한 사실과 궤를 같이 한다. 이처럼 두 의사는 인식과 의분, 의연함에 있어서 비슷한 점이 많았다. 장부는 장부가 알아보고 의사는 의사끼리 통한다는 옛말 그대로이다.
이 의사는 재판과정에서 끝까지 의협심을 잃지 않고 장부의 기개를 펴 보였다. 쓰가하라가 "피고와 같이 흉행한 사람은 몇 명이냐"고 묻자 "이 야만 섬나라의 무식한 놈아! 너는 흉자(兇字)만 알지 의자(義字)는 모르느냐. 나는 강도와 같은 너희들을 몰아내 내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네놈들의 앞잡이를 처단하려는 의행(義行)을 한 것이다" (주석 3)라고 논박하여, 방청석을 숙연케 하였다.
쓰가하라가 다시 "그러면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가" 하니 "찬성한 사람은 2천만 대한민족 모두이다"라고 답변하였다.
이 의사는 이어지는 공판에서 이완용의 죄악을 샅샅이 설파하고 동지들을 위하여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면서 끝까지 의연한 자세로 법정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안병찬 변호사 등의 성의 있는 변론도 외면하고 1910년 5월 18일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 의사는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나는 죽어 수십 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 (주석 4)라고 일본인 재판장에게 경고하였다.
이에 앞서 구형공판정에서 일본인 검사가 이 의사에 사형을 구형하자 부인 오인성이 뛰어나오면서 "국적 이완용을 죽이려한 이재명은 당당한 애국지사다. 무슨 죄로 사형이냐, 애국지사를 사형에 처하려면 나도 사형에 처하여라" 하고 검사에 달려드니 수위들이 간신히 말렸다. 의사와 부인의 '부창부수'였다.
이재명 의사는 국적 이완용을 처단하고자 의거에 나서 비록 그를 처단하지는 못했지만 친일 매국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일제에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이 의사는 의거 9개월여 만인 1910년 9월 13일 수감중이던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이 의사가 그처럼 우려한 일제에 의한 조선병탄은 재판을 받고 있던 1910년 8월 29일 이완용등 매국적에 의해 강행되었으니, 옥중에서 의사의 심회는 어떠하였을까.
주석
1> 윤덕환, <이완용평전>, 중심.
2> 이강훈, <청사에 빛나는 순국선열>.
3> 이강훈, 앞의 책.
4> 이강훈, 앞의 책.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