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194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 군대해산을 감행했다. 이 해는 대단히 중대한 사건이 거듭되었다. 대한제국의 숨통을 끊기 위한 사건들이다. 고종이 이상설·이준·이위종을 특사로 헤이그에 파견하자 일제는 이를 빌미로 그의 퇴위를 강요했다.
'정미7조약'을 통해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았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나라가 독립국가로서 존재하려면 군대가 있어야 한다. 나라를 지키는 군대가 없는 나라를 상상하기 어렵다.
당시 대한제국은 서울에 시위대 제1연대와 제2연대가, 지방에는 진위대의 명칭으로 수원·청주·원주·대구·광주·해주·안주·북청에 8개 연대가 매치되었다. 1개 대대는 500~600명으로 구성되었다. 병력의 수나 무기의 수준으로 보아 크게 미약한 편이지만, 황실과 국가의 안보를 지키는 이 병력은 일제로서는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는 정미7조약의 비밀각서를 통해 한국군대 해산과 관련. 이완용 내각에 4가지 지침을 제시했다.
1. 육군 1개 대대만 존치하여 황궁경호에 임하게 하고 기타는 해산한다.
2. 군부를 비롯하여 육군에 관계 되는 기관을 모두 폐지한다.
3. 군사교육을 받은 장교로서 한국군에 필요한 자를 제외하고 일본군에 복속시킨다.
4. 해산한 하사와 병졸 가운데 경찰관 자격이 있는 자는 경찰관으로 임용하고 기타는 간도로 이주시켜 개간에 종사하게 하거나 둔 전병으로 황무지 개간에 종사시킨다.
이것은 대한제국을 무장해제시키는 책략이었다.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는 총리대신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명부를 앞세우고 순종 황제를 강박하여 '군대해산조칙'을 받아냈다. 그리고 8월 1일 아침 하세가와는 각 연대장과 시위대 여단장을 자산의 관저로 소집, '군대해산조칙'을 낭독하면서 장교들은 해산에 포함되지 않고 은사금 지급 등을 약속하면서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시위대 병사들에게는 오전 10시 맨손체조훈련이라 속이면서 일체 무장을 하지 말고 참석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대한제국 군대가 곧 해산된다는 정보는 은밀히 군인들에게 전해졌다.
박승환(朴昇煥, 1869~1907)은 서울에서 아버지 주표롸 어머니 남양 홍씨 사이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운파(雲坡)이고, 어려서 양주 목사를 지낸 외숙 홍태윤에게 한학과 궁술·총사격 등 무술을 연마하였다.
근력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타고난 성품이 충직했다.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을 맡아서는 사졸들을 자제와 같이 다독이니, 부하 사졸들이 그를 소중히 받들었다. 1895(고종32) 황후가 변고를 당한 뒤 공은 원수를 갚아 치욕을 씻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다.
보호조약이 체결된 뒤로 일본의 압박이 날로 심해져 국가의 근간이 위태로워지자 공은 강개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가 황위에서 물러났을 때에 공은 궁궐 내에서 거사를 일으키려고도 생각하였지만 그 화가 임금에게 미칠까 걱정되어 그만 두었다.
1907년 8월 1일 주한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가 한국 국방군의 각 부대장을 소집하였는데, 공은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고 중대장을 대신 보내 만나게 하였다. (주석 1)
일제의 한국군대 해산이 강행되었다. 직급에 따라 장교들에게는 상당액의 '은사금'이 지급되었다. 병사들은 분개하였으나 맨손이고 무기고는 이미 일본군이 장악한 상태였다. 박승환은 비장한 결단을 준비하였다. 국가존망의 위기에 부하 장병들에게 모범을 보이고자 했다.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니 만 번 죽어 아깝지 않다."
유서를 써놓고, 〈대한제국 만세!〉를 외친 다음 차고 있던 권총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부하 장병들이 총소리에 놀라 대대장실에 뛰어 들어가 보니 이미 순국해 있었다. 이에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병사들이 해산을 거부하고 무기고를 습격하여 총을 들고 봉기하였다.
제1연대 제1대대가 봉기했다는 통보를 받은 시위대 제2연대 제1대대 병사들도 견습 참위 남상덕의 지휘 아래 봉기하였다. 봉기한 대한제국 육군 병사들은 병영을 미리 포위하고 있던 일본군과 8월 1일 오전 11시 40분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인 다음 시가지로 나와 남대문과 서소문 사이에서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전개하였다.
대한제국 서울의 봉기한 시위대 군인들은 탄약이 떨어져 더 이상 시가전을 벌일 수 없게 되자 시민들의 비호를 받으며 성 밖으로 나가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주석 2)
박승환의 자결은 해산된 군인들에게 '군인의 길'을 찾게하고 전국 각지의 의병부대에 참가함으로써 항일무장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말의 국군 1만 4000여 명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는데, 오직 공의 부하들만이 적에 대항해 목숨을 걸고 싸우다 죽었다. (주석 3)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주석
1> 조소앙, <박승환 전>, <유방집>, 191쪽.
2> 신용하, <박승환>,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특별판, 339~340쪽, 독립기념관, 2019.
3> 조소앙, 앞의 책, 19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