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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천 황현 선생
매천 황현 선생 ⓒ 매천 황현 선생 기념사업회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의 자는 운경(雲卿)이며 전남 구례 출신이다. 그는 당대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 자신의 현실인식과 역사의식을 투영하고자 하면서 '식자인(識字人)' 즉 지식인(지성인)의 책임을 생애의 키워드로 삼았다.

매천은 죽음을 앞둔 <절명시>에서 '난작인간 식자인(難作人間 識字人)' 즉 "글 아는 사람의 구실이 가장 어렵다."고 말한다. 이 말은 유언이고 그가 평생을 지켜온 책임의식의 주제어였다.

매천이 살던 시대의 '식자인'은 존재가 흔치 않았지만, 지금은 글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여서 의미가 다를 수 있겠으나, 그 존재가치와 책임성은 다르지 않다. 여기서 '식자인' 즉 지식인은 글과 말을 업으로 삼는 학자·언론인·성직자·교사·문인·정치인·법조인 등을 망라한다.

굴곡이 심한 우리 근현대사에서 지식인들의 타락 탈선이 수없이 많았지만, 오늘의 경우는 특히 심한 것 같다. 일제강점기와 미군정,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그리고 이명박·박근혜·윤석열의 보수정권 시대를 살면서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은 철저하게 수구화되었고, 외세 추종과 권력지향으로 체질화되었다. 외세지배시기나 독재정권 시대에는 '상황 탓'이라는 핑계라도 댈 수 있지만, 지금은 혈통과 체질, 기득권 유지, 자기검열 밖에 달리 이유가 없다.

"매천 필하에 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이란 말이 전한다. 매천이 시골 선비로서 얼마나 매섭게 권세가들을 비판했는지, 그의 붓끝에서 온전한 인물이 없었다고 한다. 반면에 의병·열사들의 행적을 기리며 <오애시(五哀詩)>에서는 민영환·홍만식·조병세·이건창·최익현 등 5인의 순절자를 추모하고 높이 평가하였다.

젊어서 한때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이 되었으나 한미한 출신이라 하여 차석으로 깎이자 출사를 거부하였다. 불의한 조정에 참여할 수 없다는 그의 단호한 신념이었다. 높은 학덕이 알려지면서 중앙에 나와 벼슬을 하자는 친구들의 권고를 받고 "귀신 같은 나라와 미친놈들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전남 구례로 낙향하여 책을 읽고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그의 학문은 '음풍농월'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러 채널을 통해 조정과 권세가들의 행동을 살피면서 하나하나 기록하였다. 이것이 <매천야록(梅泉野錄)>이다. 고종과 민씨 척신들의 난정(乱政), 탐관오리들의 비행·친일 민족반역자들의 악행을 샅샅이 기록하고 규탄, 후세의 난신적자와 그 후손들이 두려움에 떨게하였다.

그의 저술에는 일제 침략의 야만성과 함께 청국·러시아의 흉계가 담기고, 이에 대처하는 조정의 족친과 고위 관료들의 행적이 가감없이 기록되어 대한제국의 몰락사, 망국의 과정을 정사와 비사로서 읽을 수 있게 한다.

<매천야록>은 고종 원년(1864)부터 순종 융희 4년(1910) 경술 8월 병탄에 이르기까지 47년 간의 사실을 실제로 경험하거나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기록하여, '기록문학'으로서도 손색이 없는 한말의 사서(史書)이다.
 매천 황현 선생 생가 본채
매천 황현 선생 생가 본채 ⓒ 박도

매천의 저술이 사료로서 완벽한 것일 수는 없다. 그가 기거하는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 삼남지역을 휩쓴 동학농민혁명을 '동비(東匪)'라고 표현하는 등 역사인식의 한계가 지적된다. 하지만 1960년대 전후까지 우리 역사학계나 언론에서 '동학란'이라고 표기했던 것을 상기하면, 매천 만을 탓할 바도 못된다고 하겠다.

혹자는 이를 두고 매천이 위정척사파 계열이어서 민중혁명의 정당성을 비하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지만, 이 또한 단편적인 인식이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매천은 절친한 벗 창강 김택영이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동행하고자 했으나 빈한한 살림이라 먼 길을 떠날 여비를 마련치 못해 국내에 남게 되었다.

그때 망명을 하여 중국에서 활동했다면 박은식·신채호와 같은 독립운동과 민족사학의 선구자가 되었을 터이지만, 남아서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을 쓰고 자진의 길을 택하였다. 그가 생(生)에 대한 애착으로, 또는 식자의 책임감을 덜 느껴서 생의 길을 택하였더라도 정만조(鄭萬朝)·윤희구(尹喜求)·신기선(申箕善) 등 처럼 훼절하면서 권귀의 길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난세에 대처하는 지식인의 책임감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낙향하여 거처하던 초당(草堂)에 중국 역사상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지조를 지킨 절사(節士) 10인의 행적을 시와 그림으로 그려서 10폭 병풍으로 만들어 머리 맡에 두고 지켜보면서 살았다는 데서, 그의 흔들림이 없는 지사의 모습을 찾게 한다.

동양에서는 시(詩)·서(書)·화(畵)에 높은 수준에 달한 문인을 삼절(三絶)이라 일컬으며, 여기에 문(文)과 사(史)에 모두 능하면 오절(五絶)이라 불렀다. '삼절'이나 '오절'의 경지에 들기는 쉽지 않았다.

매천은 시·서·화·문·사에 능통한 흔치 않는 지식인이었다. 여기에 실천성도 갖고 있었다. 비록 의병을 조직하거나 해외 망명을 결행하지는 못하였으나 <매천야록>,<오하기문> 등을 통해 격동하는 시대상을 후세에 남기려는 역사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학교를 세워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고래로 지식인의 역할은 나라의 운명을 가름할만큼 중요하다. 지식인만 깨어 있으면 설혹 위정자나 지배그룹이 부패 타락해도 국가의 쇠망을 막을 수 있다. 한말의 지식인은 대부분 관료들이었다. 이들의 시대의식의 결여와 부패 무능한 정부를 견제하지 못하고 결국 망국으로 이어졌다. 매천과 같은 소수의 지식인이 있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매천은 지식인의 책임을 다하고자 망국의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자기가 살았던 시대의 인물이지만 누구보다 문제의식을 갖고, 그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었다. 그래서 시대를 뛰어넘었고 역사와 만났다.

그의 죽음은 생자들에게 그리고 역사에 긴 울림을 남겼다. 그는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실패자로 기록되지 않는 것은 죽음 자체가 민족의 비극, 민초와 식자의 아픔을 대신한 때문이었다. 해서 식민지 시대 백성들을 위로하고 바르게 살고자 하는 지식인들의 사표가 되었다.

매천은 경술국치 소식을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사실은 9월 5일 배달된 <황성신문>을 통해서였다. 매천의 동생 황원은 형의 망국 소식을 듣고 순국하기 까지, 그리고 유언 등을 <선형 매천공의 몇 가지를 기록하다(先兄 梅泉公事行錄)>를 남겼다.

5일에 공이 삼경(三更)까지 손과 바둑을 두다가 <황성신문>을 받아서 관솔불로 비추어 열람하였다. 이때 한 이웃 노인이 공과 함께 유숙(留宿)하려고 왔는데, 공이 술을 내다가 서너 잔을 대접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오늘 저녁에 일이 있으니, 당신은 내 아이의 처소에 가서 자시오." 하니, 그 노인이 마침내 물러갔다. 이때가 바로 사경(四更)이었다.

공이 문을 닫고 앉아서 <절명시(絶命詩)>를 짓고 인하여 자제들에게 남길 유서(遺書)를 지었는데 "의당 죽어야 할 의리…"를 먼저 말하고, 이어서 "염습(斂襲)에는 난복(襴襆)을 사용하고 치상(治喪)은 검소하게 치러서, 내가 부모상을 당했을 때 가난함을 몹시 상심했던 뜻을 기억해 달라. 여기저기 상자 속에 흩어져 있는 나의 시문(詩文)은 세밀히 찾아서 책을 만들되, 시의 경우는 연도를 밝히고 문의 경우는 문류(門類)를 나눈 다음에 식견(識見) 있는 사람에게 총괄하여 정리하도록 부탁하거라. 융희(隆熙) 4년 음력 8월 6일 새벽 등불 밑에서 매천이 마지막으로 쓰다."라고 하였다. (주석 1)

매천이 이 때에 쓴 <절명시> 1수는 다음과 같다.

조수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오
무궁화 이 세계는 망하고 말았구려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 헤아리니
세상에 글 아는 사람되기 어렵기도 합니다. (주석 2)

매천은 다량의 아편을 소주에 타 마시고 목숨이 경각에 이르러서도 또렷하게 가정의 후사를 당부하고, 얼마 후 눈을 감았다.

주석
1> <매천집> 1, 74쪽.
2> 임형택 역, <역주 매천야록> 상, 1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의열사#의열사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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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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