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책이 나왔습니다'는 저자가 된 시민기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저자 혹은 편집자도 시민기자로 가입만 하면 누구나 출간 후기를 쓸 수 있습니다.[기자말] |
세월호 사건 추모 6주기를 맞이할 무렵에 막연하게 소설 연작을 구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작업의 마침표를 올해 겨울에 와서 찍었으니, 그동안의 감회가 새롭다. 국가 폭력 앞에 반복되는 패턴의 양상을 어떤 방식으로 소설적 형상화를 해야 할지 고민됐다.
한 사람의 존재가 지상에서 잊히는 과정을 오롯이 목격하는 혼자만의 시간 동안, 소리 죽여 울기도 많이 울었다. 왜 그래야만 하냐고 물었을 때, 내가 아는 상식선의 한국 근현대사 공부가 잘못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상이 부재하다는 것은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열 한편의 단편 소설을 출판사와 협의해 아홉편으로 줄였다. 시대적 맥락에 따라 단편소설의 위치를 배치했다. 첫 번째 작품인 '소설을 쓰기 시작한 사람'에서부터 마지막 작품인 '환대의 모든 것'까지를 탈고할 때까지, 표제작인 '길목의 무늬'처럼 저마다의 삶에서 표상된 무늬를 남기고 싶다는 욕심도 부렸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누군가 한 번쯤은 체면치레 걷어치우고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실어봤다.
사실 이 소설집의 처음과 마지막은, '소설을 쓰기 시작한 사람'의 첫 문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책을 통해 울어 본 사람은 책을 쓰게 되어 있다."(9쪽)는 진술이 그러했다. 문자로만 이루어진 것이 책일 수는 없었다. 개별의 사람이 모두 두툼한 책이었으며, 그들의 충돌된 세계를 서사로 기술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 소설 쓰기가 아닐까 자문하면서 쓴 문장이다.
좀처럼 인터뷰에 응해주지 않는 소설가 김종수를 취재하기 위해 떠나는 서술자 주화를 등장시켜 스토리를 전개했다. 주화는 김종수의 대학 2년 후배였다. 대학 시절 선배의 모습, 선배의 삶과 자기 삶, 등단한 삶과 그렇지 못한 삶 사이에서 소설 쓰기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모습 속에서 주화의 울음은 무엇일지 상상했다.
"울음은 책의 장르를 선택하는 결이며, 회개의 통로이자 자기 구원의 태도였다"(14쪽)는 김종수의 소설 속 문장을 곱씹으며, 교회 앞에 버림을 받은 한 존재와 의붓아버지의 몹쓸 짓과 친어머니의 방임 사이에서 유년을 보낸 자신의 결을 비교했다.
주화와 동세대이자 젊은 꼰대라 별칭 해도 이상할 필요가 없는 편집장이 읽은 '삶의 비극이자, 생의 아픔이라 칭송한'(17쪽) 그의 문장에 앞서, 우리 사회가 던진, 왜 20대는 짱돌을 던질 줄 모르는가를 왜 20대는 투쟁하지 않는가, 연대하지 않는가를 생각했다.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그보다 앞선 세대는 어떤 맥락에서 엄혹한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연대 할 수 있었는가.
연대의 바탕이 되어야 할 낯선 것에 관한 무조건적인 환대는 정말 이상향적인 것인가. 이러한 환대 하고 그것을 받는 공동체가 되기 위한 글쓰기는 무엇인가는 질문을 자문자답했다. 표제작인 '길목의 무늬'는 이런 맥락에서 목포시 온금동을 답사하며, 공간에 깃든 이야기와 바다에 서는 장(파시)을 접목하여 구상했다.
색시촌이라는 유곽에서 버림받은 한 아이를 키워낸 아버지와 어머니의 친구인 달순엄마를 상상했다. 어딘가에 있으면 좋을 것 같은 사람, 앞 소설에서 김종수를 키워낸 교회 목사 사모님 같은 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했다.
"가족이 뭘까, 사랑이 뭘까를 묻는 동안 나는 아주 오랫동안 어두운 길을 헤맸다. 가로등 불빛도 없는 길을 걸었다."(37쪽) 그 길의 끝에, "휴학, 복학, 취업, 명예퇴직, 재입학 등의 단어가 빚어낸 내 세월을 흉금 없이"(39쪽)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 삶의 질은 어떠할까.
책망이나 가르침이 아니라, 그저 곁에서 울어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버티는 삶이 아닌 어울리는 삶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사회적 자산을 꿈꾸는 것은, 비단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오의 끝자리, 빛'은 역으로 혐오와 배제를 덧씌운 한국 사회의 오랜 극단적 반공주의가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뒷세대에게도 '울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주인공인 한덕수의 외할아버지는 1948년 10월 27일 여수 읍의 종산국민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부임 중, 빨갱이 부역자로 몰려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그때 어머니는 그 학교에서 태어났고, 어머니가 생에 처음 느낀 감각은 고립이었다. 이후 '나'라는 인물은 이데올로기와 낙인 사건과 무관한데도, 그 연장선에서 "빨갱이랑 살아"(61쪽)야만 했다. 일제 강점기 해방 후 우리 사회에 낙착된 '악'으로 표상된, 혹은 만들어진 것으로 인한 비극은 종료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문학평론가 김영삼은 이번 작품집에 다음과 같은 해설을 썼다.
김성훈의 소설들은 군부독재와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시기를 관통해 온 대한민국의 화려한 모습 이면을 지속적으로 조명하면서, 사회의 외부로 재배치되어 망각과 배제의 대상으로 전락한 존재들이 잠든 차갑고 어두운 세계에 그 뿌리를 내리며 확장하고 있다. 특히 '홍콩빠 이모'에서 보여준 작가의 전략은 김명자라는 한 인물이 겪은 지독한 우연의 겹침을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생산한 수많은 국가 폭력이 한 번 외부로 배치된 힘없는 자들을 지속적으로 오염시키면서 권력의 재생산에 악용되는 가혹한 통치술의 결과로 읽게 한다. 이러한 연쇄적 겹침과 우연이 비록 소설의 개연성을 의심하게 할지라도, 이 말도 안 되는 우연성이 어쩌면 우리 사회가 경험한 현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하면서 말이다. (235~236쪽)
여순사건, 부마항쟁, 5·18민주항쟁, 세월호 사건을 관통하는 패턴은 무엇일까. 그 긴 여로에서 헛것의 청사진이라는 것에 또 매료되어 앞으로도 잊어버릴 것은 무엇일까. 여전히 울고 있는 존재가 있는데, 울지 말라 하는 것은 또 하나의 폭력이지 않을까.
아직도 나는 소설 쓰기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사의 주역보다는 역사 속에 살아가는, '미완된 애도 작업'(239쪽)을 할 수 있다면 하고 싶고, 같은 삶을 살아가며 세계를 그리는 풍속 화가로서 글쟁이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뉴스의 단신조차 되지 못한 옆집 할머니가 평생을 밭일하며 굽은 손가락 이야기를 하고 싶고, 자녀를 잃은 어머니들의 기억 투쟁에 글쓰기 작업을 함으로써 마음을 더하고 싶다. 홀로 가지 않는 길, 두 사람의 발자국 무늬를 남기는 것, 같이 사는 맛 아닐까.
이런 생각에 마음을 합해줄 사람이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좀 더 단단하게 연결되지 않을까. 꿈을 꾼다. 그 꿈은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