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일 이강일(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주최로 열린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법률 공철회’에서 이희용(전 연합뉴스기자) 문화비평가가 2차대전 당시 나치정권 부역자들에 대한 프랑스의 ‘반역자 청산’ 사례를 소개했다.(사진=김남균 기자) ⓒ 충북인뉴스
27일 이강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충북 청주 상당) 주최로 열린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법률 공청회'에서 이희용 문화비평가(전 연합뉴스 기자)가 2차대전 당시 나치정권 부역자들에 대한 프랑스의 '반역자 청산' 사례를 소개했다.
이희용 비평가는 "프랑스의 경우 조사 대상은 광범위했고 판결은 추상같았다. 1944년부터 10년간 약 35만 명의 부역 혐의자 가운데 약 12만 명이 재판에 회부돼 9만 8000여 명이 유죄를 선고받았다"라며 "이중 3만 8000여 명이 징역 또는 금고형을 받았고, 사형선고를 받은 6700여 명 중 1500명이 처형됐다"라고 설명했다.
반면, 대한민국의 경우 1948년 9월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제정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조사 대상은 7000명에 불과했다. 프랑스 35만명의 2%밖에 안된다.
이마저도 다 조사하지 못했는데, 실제 조사를 받은 반민족행위자는 682명에 그쳤다.
재판에 회부된 친일반민족행위자는 79명에 그쳤고, 집행유예 5명, 실형은 7명, 공민권 정지 18명 등 30명만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실형은 선고받은 7명도 재심등을 거쳐, 1950년 봄 이전에 모두 풀려났다.

▲이희용 문화비평가 (사진=김남균 기자) ⓒ 충북인뉴스
나치에 부역한 언론에 대한 처벌은 더 엄격했다. 이희용 비평가에 따르면 드 골은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기 때문에 첫 심판대에 올려 가차 없이 처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나치 점령기에 15일 이상 발행한 모든 신문은 폐간됐고, 언론인과 작가들은 다른 부역자들보다 훨씬 중벌을 받았다.
이들이 가혹하게 단죄된 배경에는 신문이나 책 등에 글이 남아 있어 부역 증거를 수집하기 쉽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잘못된 생각과 신념을 퍼뜨리는 행위는 당대에는 물론 후세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간지 <오주르디> 편집인 조르주 슈아레즈, 일간 <누보탕> 발행인 장 뤼셰르, 주간지 <즈수이파르투> 편집국장 로베르 브라지야크, <라디오 파리> 책임자 장 에롤 파키 등이 사형을 선고받았고 징역형에 처해진 언론인도 수천 명이었다. 뚜렷한 부역 혐의가 없어도 이 시기에 종사한 모든 언론인은 다시는 언론에 종사할 수 없도록 공민권을 박탈했다.

▲나치 정권에 부역한 혐의로 처형되는 프랑스 언론인 ⓒ 충북인뉴스
나치 정권에 부역한 기업들도 철퇴를 맞았다. 이희용 비평가에 따르면 또 부당이득몰수위원회와 업종간연합숙청위원회가 부문별로 구성돼 친독일행위로 얻은 기업의 부당이득을 몰수하고 부역 경제인들을 내쫓았다.
항공사 에어프랑스와 자동차 제조사 르노그룹은 국유화되고 르노 창업주인 루이 르노 회장은 감옥에서 뇌출혈로 숨졌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가 단행한 나치 협력자 처단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며 "친일반민족행위뿐만 아니라 과거사 정리, 혹은 적폐 청산 작업에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희용 문화비평가의 토론문 전문이다.
프랑스의 반역자 심판에서 배우자
글 : 이희용 문화비평가, 전 연합뉴스 기자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가 단행한 나치 협력자 처단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롤모델로 삼아 배울 점도 많은 반면 타산지석으로 여겨 경계해야 할 요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나아가 친일반민족행위뿐만 아니라 과거사 정리, 혹은 적폐 청산 작업에 시사하는 점이 많습니다.
1944년 6월 6일 프랑스 서북부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한 연합군은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 각 지역을 속속 탈환한 뒤 8월 25일 파리에 입성했습니다. 나치 치하에서 신음하던 프랑스가 해방되자 임시정부 주석 샤를 드골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나치 협력자 처단이었습니다.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한 기간은 1940년 6월 22일부터 4년 2개월입니다. 파리를 포함한 국토의 5분의 3은 독일의 직접 지배를 받았고, 나머지는 1차대전 당시 '베르됭 전투의 영웅' 필리프 페탱이 이끄는 비시 정부가 관할했습니다.
프랑스 중부 소도시 비시를 임시 수도로 한 남부는 자유지역이라고 불렸지만, 이는 허울이었고 사실은 괴뢰정부를 앞세워 독일 나치 정부가 간접 통치한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1942년 11월부터는 독일군이 남부에도 진주해 비시 정부는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프랑스 전역에 울려퍼진 "콜라보 에퓌라숑 = 반역자 처단"
요즘 우리나라에서 '콜라보'라는 말은 '협업'을 뜻하는 영어 '컬래버레이션'의 줄임말로 흔히 쓰이지만, 프랑스에서는 '협력자'란 뜻의 '콜라보라퇴르'를 줄인 겁니다. 부역자나 반역자를 일컫는 단어입니다. 80년 전 프랑스에서는 "콜라보 에퓌라숑", 즉 "반역자 처단"을 외치는 목소리가 드높았습다.
드골은 파리 해방 1년 전 알제리 망명정부에서 프랑스국민해방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배반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면서 일찌감치 나치 협력자 숙청 방침을 천명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후인 6월 26일 독일 점령기 협력 행위를 처벌하는 부역자재판소를 출범시킨 데 이어 8월 18일 '국치죄'(자발적으로 독일과 동맹국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거나 프랑스인의 자유와 평등에 해를 끼친 행위)를 저지른 자들의 공민권을 박탈하는 공민재판부를 설치했습니다. 11월 18일에는 비시 정부 주역들을 처벌하기 위한 최고재판소를 발족했습니다.
조사 대상은 광범위했고 판결은 추상같았습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총리는 비시 정권을 공식 승인한 적이 있기 때문에 부역자 처단에 반대했지만 드골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1500명 처형, 3만8000명 징역형
1944년부터 10년간 약 35만 명의 부역 혐의자 가운데 약 12만 명이 재판에 회부돼 9만 8000여 명이 유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이 중 3만 8000여 명이 징역 또는 금고형을 받았고, 사형선고를 받은 6700여 명 중 1500명이 처형됐습니다. 비시 정부 수반 페탱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종신형으로 감형돼 1951년 7월 옥사했고, 라발 총리는 1945년 10월 처형됐습니다.
또 부당이득몰수위원회와 업종간연합숙청위원회가 부문별로 구성돼 친독일행위로 얻은 기업의 부당이득을 몰수하고 부역 경제인들을 내쫓았습니다. 항공사 에어프랑스와 자동차 제조사 르노그룹은 국유화되고 르노 창업주인 루이 르노 회장은 감옥에서 뇌출혈로 숨졌습니다.
언론인과 작가들은 다른 부역자들보다 훨씬 중벌을 받았습니다. 신문이나 책 등에 글이 남아 있어 증거를 수집하기 쉽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잘못된 생각과 신념을 퍼뜨리는 행위는 당대에는 물론 후세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드골은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기 때문에 첫 심판대에 올려 가차 없이 처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유독 언론인은 더 가혹하게 처벌
나치 독일은 점령 기간에 철저한 검열을 실시했기 때문에 프랑스 신문들은 친독일 논조를 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력 일간지 발행인과 편집인 등에게 사형과 징역형을 선고했고, 이 시기에 활동한 언론인들은 뚜렷한 부역 혐의가 없어도 다시는 언론에 종사할 수 없도록 공민권을 박탈했습니다.
이 기간 15일 이상 발행한 신문은 모두 나치에 협력한 것으로 간주돼 폐간의 운명을 맞았고 신문사 재산은 국유화됐습니다. 드골은 훈령을 통해 독일 치하에서 발행된 신문 제호를 사용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작업은 1951년 사면법 통과에 이어 1951~1953년 대사면으로 일단락됐습니다. 상당수 수형자들은 감형 조치를 받아 1964년에는 부역죄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프랑스 의회는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없애는 입법을 단행했습니다. 반민족행위 가운데서도 반인륜적 범죄는 끝까지 추적해 단죄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해외 도피나 증거불충분 등으로 숙청을 면한 부역자들이 처벌받았습니다. 1980년대에도 비시 정부 당시의 학살사건 등이 뒤늦게 드러나 친나치 의용대 정보총책 폴 투비에게 종신형을 선고하는 등 청산작업이 계속됐습니다.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만은 아닙니다. 격렬한 찬반 논쟁이 빚어졌고 과도한 인권침해로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정식 재판을 하기도 전에 집단적으로 몽둥이 찜질을 하는가 하면 독일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여성들의 머리를 빡빡 밀어 거리에서 조리돌림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카뮈의 정의론
찬반양론의 대표적 사례는 1944년 9월부터 1945년 2월까지 맞붙은 알베르 카뮈의 '정의론'과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관용론'입니다. 둘은 전쟁 중 지하신문 <프랑스 문예>에서 함께 활동한 가까운 사이였고 모두 프랑스 지성계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모리아크가 <르피가로> 사설을 통해 "죽음의 쳇바퀴를 돌리는 대신 그리스도의 자비를 베풀자"고 주장하자 카뮈는 <콩바(전투)> 논설에서 "온 국민에 관련된 진실이 문제가 될 때 정의가 해야 할 일은 자비를 침묵시키는 일"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카뮈는 1944년 9월 9일 자 <프랑스 문예>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과거 불행은 반역을 처벌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오늘 또다시 처벌하지 않는다면, 주모자들을 처단하지 못한다면, 커다란 위험이 닥칠 것이다. 어제의 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곧 내일의 죄를 부추기는 것이다."
드골은 모리아크 대신 카뮈의 손을 들어주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프랑스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는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또다시 민족 반역자가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승만 정권에 무너진 친일청산
우리나라도 1948년 5월 31일 출범한 제헌의회가 그해 9월 7일 반민족행위특별법을 통과시킨 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했습니다.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자 7000여 명의 명단을 확인하고 이 가운데 682명을 조사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방해와 경찰의 습격 등으로 1년 만에 와해돼 조사나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불과 79명이 재판에 넘겨져 집행유예 5명, 실형 7명, 공민권 정지 18명 등 30명만이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실형을 선고받은 7명도 재심 등의 과정을 거쳐 1950년 봄 이전에 모두 풀려났습니다. 재산을 몰수당한 기업인도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66년 친일 연구가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을 펴내며 친일 청산 움직임에 불을 댕겼습니다. <한국문학의 사회사>와 <일제 침략과 친일파> 등도 잇따라 펴냈습니다. 그의 글 '일제 말 친일 군상의 실태'는 1980년대 초 대학생 필독서로 꼽힌 <해방전후사의 인식>에도 실려 대중적 관심을 일깨웠습니다.
1989년 임종국의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이 그가 남긴 자료를 물려받아 1991년 '반민족문제연구소'(1995년 '민족문제연구소'로 개칭)를 발족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 연구서를 펴내고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추진하는 등 임종국의 유업을 계승하며 친일 청산론을 확산해 나갔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국가 차원의 친일 청산 작업이 필요하다는 여론을 불러일으켜 2004년 3월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반민족규명법)이 제정됐으며 이듬해 5월 대통령 소속으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했습니다.
4년 반의 활동 끝에 추려진 친일반민족행위자는 1006명으로 반민특위 피의자 682명보다 324명 늘어났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4389명이 수록됐습니다. 여기에는 박정희, 안익태, 백선엽 등이 새롭게 등재됐습니다.
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친일재산귀속법)도 제정돼 이듬해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출범했으나 친일파 168명이 후손에게 증여한 토지 1113만㎡(2010년 기준 공시지가 959억 원, 시가 2106억 원 상당)를 환수하는 것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2010년 위원회 활동 종료와 함께 친일재산 환수 업무가 법무부에 이관된 이후 지금까지 친일파 재산 환수 사례는 하나도 없습니다.
반민족행위의 반대급부로 얻은 재산을 해방 후에도 여전히 소유함으로써 기득권을 누리고 후손에게 세습해왔습니다. 고등교육의 혜택도 많이 받아 대대로 엘리트 대접까지 받고 있습니다. 반면에 독립운동가 후손 대부분은 대대로 가난에 허덕이는 형편입니다. 민족정기 측면에서나 사회정의 차원에서나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북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