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시 최초의 근대학교는 언제 세워졌을까?
부천시의 디지털부천문화대전과 부천교육지원청의 홈페이지에는 1922년 일제가 설치한 소사공립심상소학교(素砂公立尋常小學校)를 부천시 최초의 근대학교로 설명하고 있다(소사공립심상소학교는 줄여서 소사심상소학교 또는 소사소학교로도 부른다).
그렇다면 이 내용이 맞을까? 부천의 항일독립운동을 기념하고 일제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역사활동을 하고 있는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이는 잘못된 정보일 가능성이 있다.
부천시의 최초의 근대학교는 소사공립심상소학교(素砂公立尋常小學校)가 아니라 1909년도에 설립된 계남학교(桂南學校)다. 옛날 자료를 찾아보면 이에 대한 근거가 나온다. 잘못된 내용에 대해 살펴보고, 계남학교에 대한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첫 번째 오류] 소사공립심상소학교의 설립연도
소사공립심상소학교(素砂公立尋常小學校)가 부천시의 최초의 근대학교도 아니지만 부천시의 디지털부천문화대전과 부천교육지원청의 홈페이지에 소개된 설립연도도 잘못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천시의 디지털부천문화대전에는 부천 지역에서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1922년' 설립된 소사공립심상소학교를 제일 먼저 소개하고 있다.

▲부천시의 디지털부천문화대전에서의 소사공립심상소학교 소개부천시의 디지털부천문화대전에서는 부천 지역에서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1922년 설립된 소사공립심상소학교를 제일 먼저 소개하고 있다 ⓒ 박종선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관보를 보면 소사공립심상소학교(素砂公立尋常小學校)는 1922년이 아닌 1913년 설립허가가 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당시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지기 전이므로 심곡리(현재의 부천역 남부)를 부평군 석천면으로 소개하고 있다.

▲조선총독부의 소사공립심상소학교 설립인가 고시조선총독부 고시 제168호 대정2년 6월 4일 좌기 소학교/설치/인가 조선총독 백작 사내정의(寺內正毅) 학교명 : 소사공립심상소학교 위치 : 경기도 부평군 석천면 심곡리 ⓒ 박종선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1922년 이전에 소사공립심상소학교(素砂公立尋常小學校)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공진회 행사에 참석한 소사소학교들1915년 9월 24일 광화문에서 진행된 공진회 행사에 전국학생들이 단체로 참여하였는데, 소사소학교에서는 학생 33명이 참여하였다 ⓒ 박종선
1915년 9월 24일 오전 10시부터 광화문 일대에서 진행된 공진회 행사에 소사(素砂)소학교 성도 삼십삼(33)명 참여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두 번째] 소사소학교 이전의 계남학교
또한, 소사공립심상소학교 이전에 계남학교가 있었다. 계남학교가 언제 세워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909년 11월 17일에 발행된 대한매일신보에 최초로 나오므로 그무렵 설립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날의 기사를 통해 학생 수와 설립자를 파악할 수 있다.
부평군 옥산면 소사리 사립계남학교는 서상대(徐相大) 이계현(李啓賢) 윤백헌(尹百憲) 제씨가 협력설립하여 인허까지 승준하였는데 학교이하 일반임원이 열심권장한 결과로 학도가 일익증가하여 현금 60여 명에 달하였다더라.
학생수는 60여 명으로 서상대, 이계현, 윤백헌이 협력하여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계남학교는 사립이었으므로 학부모들이 내는 학비로만은 부족하였을 것이다. 서상대, 이계현, 윤백헌이 설립하였더라도 운영비는 많이 들기 때문에 후원이 필요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은 1910년 1월 14일에 발행된 황성신문의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계남학교에 논5두락을 후원하는 이원서씨의 기사내용(1910년 1월 14일 황성신문)이원서씨는 60여 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는 계남학교의 운영과 교육을 위해 논5두락을 후원하였으며, 이 행사에 참석한 부평군수 정운구씨와 교장 이명헌씨가 참석하였다 ⓒ 박종선
부평군 옥산면 소사사립 계남학교는 임원과 학도부형이 열심 권장함으로 학도가 날로 증진하여 60여 명에 달하였는데, 지난달에 학부형회를 열고 해당 지역 군수 정운구(鄭雲衢)씨와 교장 이명헌(李命憲)씨가 차제로 교육의 필요함을 격렬히 설명함에, 해당 면 조종리에 사는 학부형 이원서(李元西)씨가 자기가 경식(작)하던 논 5두락을 특별히 학교에 기부하며 가로되, "우리가 비록 우매한 농민이나 국민교육이 이와 같이 시급한즉 어찌 전토(田土)를 애석해하리오"하고 일장 연설을 하였는데, 이를 보던 여러 사람이 그의 학계 열심을 칭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더라
옥산면 조종리, 즉 현재의 원미동에 살던 이원서씨가 논5두락을 후원하였으며, 자신과 같은 농민들은 배우지 못해 우매하지만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후원한 논은 전혀 아깝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이명헌씨가 교장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계남학교에서는 연말에 시험을 치러 성적에 따라 반을 나누었다. 1910년 1월 15일의 대한매일신보의 기사 내용이다.
부평군 소사리 사립계남학교에서 지난달에 연종시험(年終試驗)을 경하였는대 우등생이 갑반에 10인, 을반에 11인이라더라.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계남학교는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사립학교로 1909년 또는 그 이전에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가 1913년 만든 소사공립심상소학교 보다 최소 4년 이상 빠르게 설립되었다.
따라서 부천시의 디지털부천문화대전과 부천교육지원청의 홈페이지에서의 근대교육기관에 대한 내용은 수정되어야 한다는 게 필자의 의견이다.
[마지막] 계남학교가 부천시에 중요한 이유
그렇다면 왜 계남학교의 존재가 부천에 중요할까?
우리가 알아야할 자랑스런 역사가 시민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묻혀있기 때문이다.
부천시는 1914년 이전에는 부평군에 속한 한적한 농촌마을이었다. 즉 부평군에 속한 15개면 중 중심이었던 계양산 아래 군내면에서 가장 멀리 위치한 옥산면, 석천면, 상오정면, 하오정면, 주화곶면 일부(대장리)가 현재의 부천시가 된 것이다.
한적한 농촌마을이 일제가 1910년대부터 소사 부근에 계남면사무소, 소사금융조합, 부평수리조합, 경찰관주재소, 우편소 등의 통치기관을 설치하면서 발전하여 그 이전의 역사는 소홀히 다루어진 측면이 많다.
이로 인해 그동안 일제의 억압과 수탈에 대항하여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한 3대 항일운동(1919년 3월 24일 소사독립만세운동, 1927년 9월 24일 소사역하역노동자동맹파업, 1927년 19월 28일 부평농민조합창립대회 및 소작료인하운동)이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으며, 연구 또한 미미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계남학교도 수면 아래 깊이 묻힌 것으로 보인다.
계남학교의 존재는 조선이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그 이전에 유지해 왔던 쇄국정책에서 벗어나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추진하였고, 동시에 외세들의 침략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족정신을 키워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근대학교를 세우는 운동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교육을 통해 인재를 키워 나라의 국력을 키우는 방향에 부천시도 참여했다는 이야기다.
부천이라는 삶의 터전에서 일어났던 자랑스런 역사를 기억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부천시와 부천교육지원청은 계남학교의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아 시민들과 학생들에게 알려야 한다. 이 기사가 그 출발점이 되길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콩나물신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