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반일행동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는 일본 정부와 매국적이고 졸속적인 한일합의를 체결했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피해 할머니들이 바랐던 공식 사죄와 법정 배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단돈 10억 엔의 위로금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식이 전해졌을 뿐이다.
그 소식을 듣고 분노를 금치 못한 청년 학생들이 옛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으로 모여 농성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2024년 3월 16일 반일행동은 소녀상농성 3000일을 맞았다.
1930년대 일본은 전쟁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강제 동원해 노동을 강요하고, 여성들을 납치해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하고 대량 학살까지 자행하는 무자비한 전쟁 범죄를 이어왔다. 공장에서 일하게 해주겠다, 공부를 하게 해주겠다는 거짓된 사탕발림으로 어린 여성들을 납치해 철저히 군수품으로 취급한 역사가 남아있다.
일본의 적극적인 증거 인멸로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당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일본이 저지른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역사를 알고 있다. 해방 후에도 여러 후유증에 시달리며 숨죽이며 살아왔을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피해 할머니들의 마음을 알고 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국내에서 최초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1980년대부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세상에 들려왔지만 일본은 빈번히 발뺌하기만 했다. 1990년 6월 일본 정부는 "일본군이 군대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파렴치한 공표를 내놓았다. 이런 시기에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은 전 세계에 일본의 잔혹한 전쟁 범죄 사실을 알리고 수많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피해자들이 세상에 나와 증언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92년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 할머니들은 일본대사관이 있는 평화로에서 수요일마다 수요집회를 했다. 수요집회 1000회를 기념해 만든 기념물이 바로 '평화의 소녀상'이다.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 증언을 한 날로부터 33년 그리고 반일행동이 소녀상을 지키기 시작한 지 9년이 지났다. 오로지 신념과 정의 하나만을 가지고 소녀상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따뜻한 음료를 받아도 금세 살얼음이 생기는 추운 겨울에 시작해 찌는듯한 더위와 장마를 몸으로 견뎌가며 소녀상을 지켰다. 추위를 피할 천막과 더위를 견디게 해줄 파라솔 하나 치는 것도 우리에겐 전쟁과 같았다. 하지만 투쟁을 멈출 수 없었다. 30여 년간 일본의 공식 사죄와 법정 배상을 위해 거리에서 싸워 온 할머니들의 모습을 직접 두눈으로 목도하며 역사와 현재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다.
반일행동은 정의와 신념을 지키기 위해 농성과 캠페인을 비롯한 여러 투쟁을 진행했다. 소녀상 인근 인사동에서 캠페인을 하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심각성과 우리가 행동해야 하는 이유를 알렸고, 소녀상 옆은 물론이고 청와대 등 여러 곳에서도 1인 시위를 했다.
2020년 극우 세력들이 소녀상 옆 집회 1순위를 선점했다는 이유로 농성장을 철거하라는 통보를 받았을 땐 극우들의 망동으로부터 우리의 역사와 자존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소녀상과 우리의 몸을 끈으로 묶어 연좌농성을 했다. 친일청산 3대 법안 제정을 위한 캠페인을 하기도 했고, 2023년 5월에는 당시 일본 히로시마에서 진행된 G7 회의와 한미일 3국 정상회의의 본질을 알리기 위해 평화 원정을 했다. 노숙 농성, 기시다 방한 반대 투쟁 등 쉴새없는 투쟁이 이어지는 동안 소녀상은 나 그리고 우리 그 자체가 되었다.
2015년 소녀상에서 농성을 시작하고 정부가 2번이나 바뀌었지먼 여전히 바뀐 것은 없다. 하지만 반일행동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소녀상을 지켜온 시간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반일행동은 시민들과 함께 지켜 온 3000일의 시간을 기록하고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000일>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우리의 투쟁은 멈추지 않는다는 결의를, 혼자가 아닌 우리였기에 지킬 수 있었던 힘을,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해 싸워 온 반일행동과 우리들의 시간을 켜켜이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