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기포, 첫 봉화의 불길이 타오르다
[동학농민혁명 고부기포. 수운 최제우 선생의 동학 창도와 그리고 순도. 해월 최시형 선생과 동학도인들의 교조신원운동.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사발통문거사계획. 개벽과 혁명을 이어주는 기나긴 동학운동, 그 혁명의 첫 봉화가 타오른 곳이 고부이다. 고부기포는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 왕조 역사를 끝장내고 새로운 민주공화제를 여는 데 출발점이라 하겠다.]
사발통문 거사 계획이 뜻하지 않게 연기되었다. 전봉준과 사발통문 서명자들은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로 올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 시점을 기다리고 있었다. 1894년 1월 9일(양.2.14), 조병갑이 고부군수에 재부임함으로써 역사의 수레바퀴는 다시 구르기 시작했다.
그날, 조병갑의 재부임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봉기(蜂起)의 깃발을 든 것은 예동마을 농민들이었다. 예동마을의 남녀노소 수백여 명은 징, 나팔 등 풍물을 울리며 "조병갑을 잡아 죽여라!"라는 함성과 함께 죽창과 낫 등 농기구를 들고 봉기하였다.
전봉준은 이미 여러 곳의 동학도인과 농민들에게 저녁밥을 먹고 1월 10일(양2.15) 말목장터로 모이라는 기별을 넣어 두었다. 전봉준은 고부기포 준비를 김도삼, 정익서, 최경선 등과 함께 추진했다.
동학농민군 일부는 예동으로 갔고, 일부는 말목장터로 향했다. 예동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풍물을 울리면서 보국안민·제폭구민의 깃발을 높이 들고, 동학의 13자 주문을 외우며 벌떼처럼 말목장터로 향했다. 또 '났네 났어 난리 났어. 에이, 참 잘되얏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라도 어디 남아 있겠냐.'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10일, 날이 밝기 전에 모여 새벽닭 울음소리를 신호로 고부관아로 진격한다는 계획이었다. 전봉준은 의기에 찬 동학농민군과 3천여 명의 백성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의(義)를 위해 모였습니다."
"우리는 보국안민을 위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제폭구민을 위해 봉기했습니다."
전봉준은 여성과 노약자는 집으로 되돌려 보냈다. 또한 동학농민군을 좌군(左軍)과 우군(右軍)으로 나눠, 협공으로 고부관아를 점령하는 작전을 세웠다. 1월 10일(음.2.15) 새벽 2시경에 동학농민군은 진군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봉준은 죽창을 중심으로 낫, 쇠스랑, 삽, 작대기 등 농기구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의 군율을 발표했다.
첫째_ 민가에 피해를 끼치지 말 것
둘째_ 항복하는 자는 함부로 죽이지 말 것
셋째_ 동학을 사칭하고 못된 짓을 하지 말 것
넷째_ 군을 이탈하는 자는 엄한 군율로 다스릴 것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의 전략에 따라 '좌군은 천치 길로, 우군은 영원 길로 갈라져 진군하다가, 북성문 밖에서 모여 협공으로 일제히 공격한다'는 작전을 지시했다. 전봉준은 행동 수칙과 작전을 발표하고 조병갑의 학정을 일일이 거론하였다. 그리고 보국안민, 제폭구민을 힘차게 외치며 명령을 내렸다.
"진군하라!"
고부관아를 점령하라
동학농민군은 죽창을 들고 풍물을 울리며, 20리를 내달려 고부관아 북성문 밖에 모였다. 좌군과 우군은 전봉준의 최종 명령에 따라 10일(음)새벽 4시경에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고부관아로 몰려 들어갔다.
"조병갑을 잡아라. 관속들을 잡아 마당에 대령하라!"
동학농민군은 일거에 관아를 습격해 점령하였지만 조병갑은 그곳에 없었다. 전봉준은 "조병갑의 뒤를 쫓아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조병갑은 용케도 몸을 피해 동쪽으로 5리나 도망쳐 입성리 정 참봉 집에 숨어 있었다. 조병갑은 동학농민군의 동태를 살피다가 농민 복장으로 변장하고 정읍에서 순창을 거쳐 전주감영으로 피신했다.
녹두 전봉준은 고부를 중심으로 여러 곳의 동학 접 조직을 이용하여 통문을 돌리게 해서 봉기를 확산시키는 데 만전을 기했다. 그사이 동학농민군은 형옥을 부수어 억울하게 옥에 갇힌 백성들을 풀어 주었다. 다음 날, 어둠이 걷히고 날이 밝아 오자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을 말목장터에 소집하여 명령 체계와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첫째_ 규율을 어기는 자들은 군율로 엄히 다스린다.
둘째_ 좌군은 백산으로 이동하여 백산성을 쌓는다.
셋째_ 우군은 만석보를 허물어 배들평 농민들의 원한을 풀어준다.
넷째_ 예동과 두전에 쌓아 둔 보세미를 갈취 당한 농민들에게 되돌려준다.
동학농민군은 고부 및 인근 농민들을 받아들여, 읍성을 장악하고 성 안팎에 배치하여 경계를 강화했다. 전봉준은 고부의 일을 마무리하는 대로 함열의 조창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고부 고을은 그야말로 농민들의 해방구가 되었다.
전라감영에 피신한 조병갑의 제안에 따라, 김문현 감사는 전봉준 등 거사 지도부 암살 계획을 승인했다. 감영의 별동대로 구성된 암살 자객 50명을 농민으로 변장시켜 전봉준과 핵심 지도부를 죽이는 것으로 거사의 종지부를 찍으려 하였다. 조병갑과 김문현은 동학의 조직이 엉성하다고 판단하였고, 고부봉기를 일시적 분노에 의해 일어난 민란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철저한 대비와 만약을 위해 방어 및 경호에 만전을 기하던 동학농민군은 자객 50여 명을 재빠르게 제압하였다.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목숨이 위험한 급박한 상황에서도 신속하게 대처하여 상황을 종식했다. 전봉준은 전날 밤에 자객 혹은 관군과 전투가 벌어질 경우 아군과 적을 가려야 하기 때문에 동학의 신표인 '(弓乙_궁을)' 부적을 잘 보이는 곳에 붙이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관군 쪽에서는 이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전봉준은 체포된 암살단 50명을 일단 결박하여 창고에 가두라고 하고는, 태연한 모습으로 다시 회의에 임하였다. 그런데, 동학 전령에 의한 보고에 '충청도 보은대도소 해월 최시형 법헌의 지시 없이는 기포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었다.
전봉준과 고부봉기 지도부는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전봉준은 사로잡은 전라감영군 자객 50명 중 부상자는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모두에게 단단히 타일러서 전주로 되돌려 보내기로 하였다.
사람이 하늘인 세상을 열다
세계 혁명사, 전쟁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동학만의 특이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적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 다 같이 살고 서로 존중하기 위한 전쟁사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하늘입니다. 더욱이 관군들도 우리와 같은 백성들입니다. 전부 살려서 돌려보내세요."
전봉준은 '모두가 하늘인 세상'을 열어나가고자 하였으며, 또한 '민심을 얻는 것이 천하를 얻는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자신들의 목숨을 노렸던 자객들을 치료하여 7일 만에 석방했다. 전라감영의 자객들이 풀려나자 감영에서는 협상을 시도해 왔다. 그러나 첫 번째 협상에서 감영의 수교 정석희는 전봉준을 설득하려다 되레 설득 당해서 돌아갔다.
두 번째 협상에서는, 전주 진영 군위 정진석이 무예에 뛰어난 군사 셋을 대동하고 전봉준과 직접 대면하여 해산을 권유하였다. 이때 장사꾼으로 변장한 수상한 자들 10여 명이 말목장터로 들어오는 것을 경비병들이 발견하고 잡아들였다. 그들의 등짐을 풀어 보니 살상무기로 가득하였다. 정진석은 부하들이 잡혀 2차 암살 계획이 들통나자 도망치다가 뒤쫓아온 동학농민군의 죽창에 찔려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전봉준은 말목장터를 중심으로 경계를 더욱 강화하면서, 결국 2월 25일에 지리적 여건이 좋은 백산성으로 동학농민군 대다수를 옮겨 배치했다. 백산성은 앞쪽으로 동진강이 흐르고, 동서남북이 한눈에 들어와 적의 접근을 막기에 매우 용이한 전략적 요충지다. 그래서 전봉준은 관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미리 보강해 둔 백산성으로 진영을 옮긴 것이다.
백산성에 안착한 동학농민군은 함열 조창으로 진격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갑론을박하였다. 전봉준과 접주들은 진격을 주장했고, 농민대표들은 월경(越境)하면, 곧 고부군의 경계선을 넘어서므로 반란이 된다며 반대하였다. 전봉준은 농민 대표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며 차후 관군과의 협상권을 농민들에게서 위임받았다.
조선 정부는 전통적으로 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나면 그 지역의 책임자인 군수를 교체하고, 사태를 정확히 조사하여 보고하고 수습하는 책임을 지는 안핵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전라감사 김문현은 조병갑의 중앙정부 뒷배경도 무시할 수 없었고, 또 자신이 다시 고부군수로 추천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가 고부에서 도망왔다는 사실을 한 달가량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를 숨길 도리가 없어 조병갑에게 양해를 구하고 2월 10일경 보고서를 올렸다. 전라감사의 보고를 받은 조정은 그 사정을 이해라도 해 주는 듯 2월
15일 김문현에게 3등급 감봉이라는 가벼운 징벌을 내렸다. 또 조정에서는 김문현에게, 조병갑을 조사하여 민란을 일으키게 한 혐의와 나랏돈을 횡령한 혐의에 대해 그 죄를 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후 정부는 용안현감 박원명을 신임 고부군수로 발령하였으며, 봉기의 확대를 방지하기 위해 장흥부사 이용태를 고부군 안핵사로 임명하였다. 이용태 안핵사에게는 민란의 전말을 제대로 조사할 것과 고부고을 백성들을 잘 타이르고 주의시켜 생업에 안정케 하며, 조정의 너그러운 뜻을 백성들에게 보이라고 지시하였다.
전봉준, 신임 고부군수 박원명과 협상
신임 고부군수 박원명은 3월 3일에 전봉준 등 고부기포 지도부에 만날 것을 요청하여 고부관아 동헌에서 회동했다. 전봉준 등이 협상 장소에 도착하니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전봉준은 박원명에게 전임 군수 조병갑을 빗대어 전라도 일대에 무슨 민요가 퍼지고 있는지 알려주었다.
"금잔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백성의 피요, 옥쟁반의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농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랫가락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또한 높네."
전봉준은 암행어사 이몽룡의 어사출두 전에 나오는 시를 읊어주었다. 그리고 동학농민군 해산과 무사 귀가는 물론 앞으로 농민들에 대한 수탈은 물론 동학에 대한 탄압도 금지하기로 군수에게 약속을 받아냈다.
고부군수 박원명은 전라감사 김문현에게 조병갑 군수의 파직을 요청하였고, 최시중, 김양보, 좌수 김봉현, 호장 은세방, 이방 은인식, 수교 은덕초, 향민 심덕명, 조성국 등의 처벌을 건의하였다. 김문현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조정에 이들의 죄상을 고발하였다. 전봉준은 마침내 3월 5일 동학농민군의 해산을 결정했다.
고부봉기 후 안핵사인 장흥부사 이용태는 동학농민군의 조직과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는 소문을 듣고 잔뜩 겁을 먹어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이용태는 고부군수 박원명이 동학농민군을 해산시켰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며칠이 지나서, 역졸 8백여 명을 이끌고 고부에 나타났다.
관군의 무차별 탄압이 시작되다
안핵사 이용태는 역졸 8백여 명과 고부 군졸 2백여 명 등 1천여 명으로 진용을 확대하여 수십 명 단위로 고부 군내 마을 곳곳을 마구잡이로 뒤지게 했다. 군사들은 백성들을 마구 두들겨 패며 재산을 약탈했고,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등 파렴치한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고부 군민 일부는 겁에 질려 동학농민군이 아닌 일반농민들까지 고발하였으며, 군사들은 고기 꿰듯 사람들을 줄줄이 엮어 끌고 갔다.
이용태의 군사들은 구역을 넓혀 고부는 물론 부안, 고창, 무장 등 여러 지역을 휩쓸고 다니며 백성들의 재물을 노략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부자로 소문난 사람들을 고창 선운사로 잡아들여 동학농민군이라 트집을 잡아 온갖 협박으로 재산을 갈취하려 하였는데, 손화중포 도인들에게 발각되어 연지원 주막거리에서 반 죽도록 두들겨 맞고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친 일도 있었다.
안핵사 이용태는 민란의 수습 상황을 정부에 보고조차 하지 않고 제 잇속 챙기기에 정신이 없었다. 이용태는 손화중포 동학도들에게 혼쭐이 나고 겨우 목숨을 건져 고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보복으로 전봉준, 김도삼, 정익서와 동학농민군 지도부의 집은 물론 일반 백성들의 집까지 불을 질러 살육을 일삼았다.
고부·무장·부안 등의 백성들은 공포에 떨었으며, 군사들에게 피해를 입은 가족들의 원한은 골수에 사무쳤다. 이때 관군들이 해산한 동학농민군을 잡아들인다는 소식에, 고부는 물론 인근 각읍 관아의 사령배들이 그동안 꼭꼭 숨어 있다가 일거에 쏟아져 나와 동학도를 소탕하는 일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나섰다.
손화중포, 무장으로 모이라
군사와 사령배들의 무차별 탄압이 계속되자 동학도인과 농민들도 서서히 전열을 가다듬으며, 동학 접(接) 소속으로 결집하여 목숨을 건 반격을 준비해 나갔다. 전봉준은 들끓는 민심을 꿰뚫어 보며 동학의 포·접 조직을 통해 무장으로 모이라는 통문을 띄운다. 관군의 무차별 탄압과 횡포에 맞서 전봉준은 무장대접주 손화중과 손을 잡고 동학대기포(東學大起包)를 결행하게 된다.
「고부동학기포, 그 혁명의 함성,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의로운 깃발을 꽂았다. 갑오년 정월 초열흘 첫닭 울음소리에 기나긴 반만년에 첫 봉기의 북을 울린 자랑스러운 고부농민들, 위대한 고부농민들, 오늘도 당신들의 숨소리가 민중들의 가슴에서 들려온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