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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동을 아십니까. 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 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 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

정법영 주성중학교 시절의 정법영(왼쪽)과 아버지 정진동
정법영주성중학교 시절의 정법영(왼쪽)과 아버지 정진동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앞으로 나란히. 바로!" "야! 임마 민수(가명). 줄 틀리잖아!" 담임의 호통에 움찔한 민수는 재빨리 동작을 취해 줄을 맞췄다. 매주 월요일 학교 운동장에서 진행하는 애국조회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소위 '애국 조회'라 불린 야외 조회는 일주일에 1회 실시했다. 연단 아래에는 연대장, 학년장이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그 뒤에는 기수가 깃발을 들고 있었다.

당시 중학교에서는 교련 교육이 실시되지 않았지만 애국 조회 때는 운동장이 마치 군대의 연병장과 같았다. 연대장과 학년장, 기수들에게는 교복 위에 엑스 반도를 차게 하고 오른쪽 팔뚝에는 완장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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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를 잡은 조회 진행자 3학년 학생주임이 "교장 선생님에 대하여 경례!"를 외쳤다. 학생들이 일제히 "멸공"을 외쳤다. 당시 애국 조회 때 교장한테 하는 인사말은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멸공(滅共)'이었다. 10대 초반의 까까중머리 청소년들이 입에 올리기에는 무척이나 험악한 말이다.

교장 선생의 훈화는 국제정세부터 시작됐다. "월남(베트남)이 왜 망한 줄 알아요? 반공 의식이 투철하지 못해서 그래요." 교장은 중학생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해댔다. 그러더니 국내정세로 돌아왔다. 교장의 훈시는 30분을 훌쩍 뛰어넘었지만 끝날 줄을 몰랐다.

"우리 지역에서도 빨갱이가 준동하고 있어요. 청소부를 선동하는 목사가 있어요. 이런 행동은 간첩이나 하는 짓입니다."

1973~1974년의 청주시청 청소부들의 노동조건 개선 투쟁을 빨갱이 활동이라 매도한 것이다.

그때까지 연대장 뒤에서 깃발을 들고 있던 정법영은 쇠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지금 교장이 하는 얘기는 분명 아버지를 지칭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간첩이라고?'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아버지가 그럴 리가 없다며 머리를 가로저으며 주성중 3학년 정법영이 애국 조회 중간에 뛰쳐나온 것은 1974년도이다.

"아버지가 간첩이에요?"

학교를 뛰쳐나온 그는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법영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던 가족들은 불안했다. 열흘가량 만에 법영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부모님 저는 학교에 다니지 않겠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신다면…… 그 내용을 적어서 청도극장 서쪽 네 번째 집 굴뚝에 꽂아주세요. 그러면 곧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는 내용이었다. 얼굴이 반쪽이 된 법영이 대문을 밀고 들어오자 엄마와 누나들이 달려들어 법영을 껴안고 엉엉 울었다.

며칠 휴식을 취한 아들과 마주한 정진동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법영은 아버지에게 직설적인 질문을 했다. "아버지가 간첩이라면 왜 매일 청소부들에게 보리밥을 해줬습니까?" 정진동은 사춘기 아들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나는 예수를 믿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목사다. 단지 내가 하는 일은 예수가 가신 길을 따르는 것뿐이다. 예수도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수는 병들고 눈멀고, 불구된 이와 고아와 과부들을 불쌍히 여기고 섬겼다. 나는 지금 만나는 청소부들을 예수님 섬기듯 하고자 한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법영의 얼굴이 활짝 폈다. 다시 학교에 가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학교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무단결석으로 퇴학 조치를 내린 것이다. 화가 난 법영은 친구 7명과 함께 가출을 감행했다. 자전거 가게에서 사이클을 빌린 이들은 경북 청도까지 본의 아니게 무전여행(?)을 갔다. 배가 고파 수박 서리를 하다 주인의 신고로 경찰서에 넘겨졌다.

법영의 엄마 조정숙이 변상금을 갖고 청도에서 아들을 데려왔다. 법영과 함께 가출한 친구들은 모두 학교로 돌아갔지만 주동자인 법영만은 제외됐다. 정진동이 교장에게 항의 편지를 썼다. 아버지를 비난한 사실로 결석한 아이를 퇴학 조치하는 것은 너무하는 것 아니냐는 내용이었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사회 각계에 민원을 넣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러자 충청북도 경찰국장이 나섰다. 중재를 선 그는 법영의 3학년 2학기 밀린 수업료를 대신 내주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주성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 시험에 낙방했다. 서울의 전수(專修)학교를 1년 다닌 후에 청주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1977년도였다.

정법영 가족 정법영 가족 사진. 우측부터 법영 신영 광옥 정진동 혜영 조정숙 맨 앞이 세영
정법영 가족정법영 가족 사진. 우측부터 법영 신영 광옥 정진동 혜영 조정숙 맨 앞이 세영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이상한 의사와 경찰

"네놈들이나 술 먹어라~." 정진동이 청주 대성동에 있는 성가병원 중환자실에 도착했을 때 정법영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간혹 하는 욕설들에 형사, 술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 사지를 비틀며 혼수상태에 빠진 아들을 보며, 정진동은 의사에게 "선생님. 얘가 어떻게 된 겁니까? 우리 애를 살려주세요"라며 간곡히 호소했다.

의사는 큰 이상이 있는 게 아니라며, 괜찮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진정제 주사를 맞은 법영은 잠이 들었다. 하지만 깊은 수면을 취하지 못하고 깨어난 그는 또 사지를 비틀며 헛소리를 했다. 정진동이 아들에게 "누가 너에게 술을 주었느냐?"라고 물었지만, 기력을 잃은 법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결국 사흘간 혼수상태가 지난 1978년 7월 8일 오후 6시 정법영은 열아홉 살의 꽃다운 나이에 영원히 눈을 감았다.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들어온 환자에게는 의사의 초동대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약물중독이거나 그로 의심되는 환자에게는 위 세척이 제일 우선돼야 한다. 하지만 법영은 위세척 한 번 받지 못하고 사흘간 사경을 헤맨 끝에 생을 다했다.

7월 5일 법영이 만취해 누군가의 부축으로 사직동 집에 왔다. 오자마자 축 늘어진 그는 의식을 잃었다. 딸 혜영이 아빠 정진동에게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정진동은 아내 조정숙에게 신경안정제를 먹이라고 한 뒤에 택시를 탔다. 청주도시산업선교회에서 단식농성한 지 80일 만의 귀가를 했을 때 정진동의 집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렇다면 문제의 7월 5일, 법영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경찰들이 법영에게 강제로 술을 먹인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해 3월 17일부터 청주산선 사무실에서 시작된 단식농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그랬기에 경찰이 술을 잘 먹지 못하는 법영에게 강제로 먹이고 괴롭힌 것은 단식농성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있었던 일이다.

경찰과 중앙정보부는 비단 정법영에 대한 감시만을 한 것이 아니다. 1976년 3월 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있은 '3.1 민주구국선언'에 정진동이 참석하지 못하게 특별공작을 했다. 특별공작이란 다름 아니라 밀착감시였다. 심지어 대회 전날인 2월 29일 청주경찰서 정보과 형사 두 명이 정진동의 집 안방에 와서 정진동을 가운데 놓고 양옆에서 잠을 잔 것이다. 슬픈 코미디였다.

1978년 단식농성 기간에는 전방위적인 감시가 진행됐다. 중앙정보부원이 청주도시산업선교회에 잠입해 사진 촬영을 했다. 이때 마침 조순형 전도사가 그 장면을 목격했다. 조순형은 중앙정보부원에게 달려들어 사진기를 빼앗아, 필름을 꺼내 창밖으로 던졌다.

사진기 필름을 훼손하면 인화가 불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왜 남의 사진기를 빼앗는 거야!" "누가 함부로 사진을 찍으라고 했어요. 초상권 침해야!" 중앙정보부원의 고압적인 말투에 기죽지 않은 조순형의 당당한 항변이었다. 중앙정보부원은 꼬랑지를 내렸다.

"사장님께"로 시작하는 편지

경찰과 중앙정보부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법영은 아버지 정진동의 일을 도왔다. 중학교 때의 가출 사건 이후 법영은 아버지의 도시산업선교 일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품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청주산선을 드나드는 노동자, 농민, 시민의 애환에 귀를 기울였다. 대성여객 버스에서 하차시 사고를 당한 박성세 사건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법영은 대성여객 사장에게 공개 편지를 썼다.

"사장님께. 안녕하십니까? (중략) 지난(1977년) 2월에 낸 귀 버스의 박성세 씨 사고에 대해 시민으로서 납득할 만한 보상을 즉각 해주시기를 재부탁합니다. 기업가의 양심 있는 판단을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청주 시민의 한 사람 정법영."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정법영 김두황』, 2004

1978년 4월 26일 청주산선 농성장에 합류한 박성세씨의 사연을 듣고 정법영이 대성여객 사장에게 공개 편지를 보낸 것이다. 박성세씨 사건은 법영이 의문의 죽임을 당한 지 1년 후인 1979년에 해결됐다.

법영은 이외에도 아버지가 작성한 성명서를 청주 시내 언론사, 관계기관에 보내는 우편물 작업을 도왔다. 그러다가 청주산선에서 단식농성이 시작된 이후에는 더 자주 산업선교회를 출입하며 아버지 일을 도왔다. 그해 3월 26일 중앙공원에서 열린 부활절 연합예배 때는 자신이 작성한 성명서를 동생 신영과 함께 돌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법영의 죽음은 의문사일까? 그렇지 않다. 경찰의 '조직적인 학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는 조순형이 법영이 죽기 70일 전에 경찰의 조직적인 학살에 관한 귀뜸을 들은 것으로 유추 해석할 수 있다.

4월 21일 문익환·백기완이 청주산선에 내려와 대책위원회 구성을 논의했다. 천주교 측의 참여 문제로 청주교구 김광혁 신부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광혁 신부는 조순형에게 "(중앙)정보부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내 말 허투루 듣지 말고 정 목사님께 꼭 전해라. 정 목사 가만히 안 두겠다고 말한다. 특히 가족을 조심시키라고 해라"며 신신당부했다.

조순형이 정진동에게 이 말을 전했지만, "나 잡아 가두겠다는 거지. 그런 각오 없이 어떻게 일해!"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김광혁 신부의 걱정이 현실화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절

형에게 쓰는 편지 형 정법영에게 쓴 편지를 낭독하는 정세영(가운데 교복 입은 이)
형에게 쓰는 편지형 정법영에게 쓴 편지를 낭독하는 정세영(가운데 교복 입은 이)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관에 씌워진 흰 천에는 십자가가 찍혀 있었다. 관을 둘러싸고 많은 이들이 통곡을 했다. 동생을 보내는 혜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혜영 옆에 교복을 입은 세영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됐다. 법영의 장례식에 동생 신영과 세영이 편지글을 낭독하기로 했지만 결국 세영만 했다. 항상 형과 친구처럼 지낸 신영이 장례식이 시작되자마자 기절했기 때문이다. 세영이 편지글을 낭독했다.

"형님은 나의 귀중한 친구입니다. (중략) 당신의 죽음은 현 사회의 악당들이 죽였습니다. 당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돕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중간중간 끊기기는 했지만 세영은 끝까지 형을 추모하는 편지글을 읽었다.

청주 서부교회 출신으로 한신대학교를 졸업한 윤응진 전도사의 추모시 낭독이 이어졌다. "어디에서나 낯선 / 이방인처럼 / 그대를 외롭게 병들게 한 것은 / 누구였는가? / 쫓기는 긴장으로 불안으로 / 그대를 내어 몰은 것은 / 누구의 범행이었는가? (하략)"

청주지역 기독교장로회 청년운동 1세대인 윤응진의 추모시는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의 마음에 분노를 일으키고 눈물을 적셨다. 충북도립병원(현 청주의료원) 영안실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농촌동(현 성화동)에서 화장을 했다. 19세 청년 정법영이 지구별에서 영원히 떠난 날이다.

장례식 장례식.
장례식장례식.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1주기 추도예배 정법영 1주기 추도예배. 금천동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사무실. 우측부터 정진동, 전주 부용고회 박윤석 목사
1주기 추도예배정법영 1주기 추도예배. 금천동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사무실. 우측부터 정진동, 전주 부용고회 박윤석 목사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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