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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화]사발통문거사도 박홍규 화백이 2016년 판화로 그려낸 사발통문거사도이다. 사발통문은 1893년 11월, 전봉준 접주를 위시하여 동학도인 20명이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 집에 모여 사발을 엎어 놓고 빙 둘러앉아 서명한 문서로서 봉기의 거사 계획과 내용을 정하여 각 마을의 집강(執綱)들에게보내질 계획이었다.
[목판화]사발통문거사도박홍규 화백이 2016년 판화로 그려낸 사발통문거사도이다. 사발통문은 1893년 11월, 전봉준 접주를 위시하여 동학도인 20명이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 집에 모여 사발을 엎어 놓고 빙 둘러앉아 서명한 문서로서 봉기의 거사 계획과 내용을 정하여 각 마을의 집강(執綱)들에게보내질 계획이었다. ⓒ 박홍규

[사발통문, 기포격문 한 장. 교조신원운동에서 촉발된 혁명의 거사는 사발통문에서 그 진의가 드러난다. 군수의 목을 벤다. 탐관오리들을 척결한다. 전주성을 점령한다. 한양을 접수한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사발통문 거사계획은 혁명을 천명한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고부군(古阜郡)은 다른 어느 고을보다 여러 명목의 세금과 백성의 재물을 가혹하게 빼앗는 일이 매우 심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착취(搾取)는 다른 고을의 수령(守令)들보다 매우 심하였고 방법 또한 더욱 잔인했다.

조병갑은 조선왕조 말 대표적인 탐관오리이다. 또한 고종을 등극시킨 막강한 권력자 신정왕후 조 대비와 친족 관계이며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의 조카로 그의 뒷배경은 가히 따를 자가 없었다.

조병갑은 임진년(1892) 5월 고부군수로 부임하였다. 그해 겨울,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농민들을 동원하여 만석보(萬石洑)을 쌓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농민들은 강제 노역에 시달렸고, 조병갑은 보(洑_저수지 둑) 공사를 한다면서 조상의 묘지가 있는 선산이든 뭐든 가리지 않고 남의 산에서 수백 년 된 거목을 마구잡이로 베어다 사용했다. 산주들과 농민들은 심하게 반발했으나 조병갑은 막무가내였다.

조병갑은 처음에 만석보가 완성되면 그 물을 대는 논에는 수세를 부과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이를 어기고 1000여 석을 물세로 징수하여 농민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또 새 보를 높이 쌓아 장마철에 비가 쏟아지면 물이 범람해서 큰 피해를 당해 그 원성은 높아만 갔다.

조병갑의 탐학은 이에서 그치지 않았다. 균전법(均田法)에 의해 농민들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면, 5년 동안 세금을 물리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병갑을 위시하여 전라도 균전사 김창석 등은 토지 분배 및 조세 징수 제도인 균전법을 어기고 그해 가을 수확이 없는 땅에 불법으로 세금을 물리는 백지징세(白地徵稅)라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른다. 다행히 농사라도 잘되면 버텨 보겠지만, 계속된 흉년으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농민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대동법에 의해 공물 대신 쌀을 거둬들이는 대동미(大同米)를 둘러싼 농단이었다. 조병갑과 결탁한 전운사 조필영은 대동미를 한양으로 운송하는 책임을 맡았다.

조필영은 여러 고을의 관료들과 짜고 쌀을 이리저리 빼돌려 착복하면서 부족한 양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미를 징수하였다. 이들은 농민들에게 거둔 좋은 쌀인 상미는 팔아 챙기고, 좋지 않은 하미를 채워 넣어 한양으로 보냈으며, 심지어는 쌀 대신 모래나 지푸라기로 채워 국가 창고에 쌓아 두는 기가 막힌 일들을 저질렀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돈깨나 있는 부자들에게는 부모에게 불효한다는 불효죄, 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내지 않는다는 불화죄, 투전과 잡기 따위를 하면서 선하게 살지 않는다는 불선죄 등의 온갖 구실을 붙여 2만 냥을 강제로 뜯어냈다. 게다가 현감을 지낸 아버지 조규순의 공적을 찬양하는 비각을 태인에 세우면서 1천 냥을 거둬들이는 등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이때, 삼정(三政_전정·군정·환정) 문란을 비롯하여 백성들을 등쳐먹는 탐관오리들의 횡포는 전국에서 자행되었다. 그중에서도 전라도가 심했으며, 전라도에서도 고부가 가장 심했다.

조병갑은 조선 최고의 권력을 배경으로 군수에 부임하자 온갖 악행을 끊임없이 자행했다. 걸핏하면 동진강 배들평(배가 들어오는 평야)이 한눈에 보이는 만석보(萬石洑)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마도 거둬갈 것들을 속으로 셈하였는지도 모른다.
만고 탐관 조병갑과 만고 영웅 전봉준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전봉준은 돈벌이나 관료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청빈한 선비였으므로 속된 말로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였다.

아침에는 꽁보리밥에 저녁에는 죽으로 때울 정도였으니, 하루 한두 끼로 연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봉준은 개인의 출세나 안락 따위엔 관심이 없고, 백성들의 고달픈 삶에 대한 연민이 더 많았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이 받는 부당한 처사, 그것을 단단히 얽고 있는 사회제도에 회의가 컸다.

이런저런 회의와 고뇌와 이상을 품고 살면서 전봉준은 어느덧 대장부(大丈夫)의 길을 가고 있었다. 맹자가 말했던가,

"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 데서 살아가고, 이 세상에서 가장 바른 자리에 서며,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도를 행하라. 뜻을 얻으면 다른 이들과 함께하고, 뜻을 얻지 못해도 혼자서 옳은 길을 가야 한다. 부귀와 음탕함에 빠지지 않으며, 가난하고 천해도 마음을 바꾸지 아니하고, 부당한 힘 앞에서도 굴복하지 아니하면, 이것이 바로 대장부 아닌가."

전봉준은 과히 호연지기(浩然之氣)의 대장부로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1893년 11월(음), 배들평 농민들을 중심으로 고부 지역 농민 50여 명은 만석보 물세를 줄여 달라는 진정을 하러 고부관아로 몰려갔다. 이때 소장의 첫머리에 서명한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을 필두로 김도삼과 정일서 등이 앞장섰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부당한 (만석보)보세의 강제 징수를 강행했다. 고부 농민들은 사실상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을 더 힘들어했다. 물세뿐만이 아니라, 막 태어난 갓난아기와 죽은 사람한테도 군복무 대신 납부하던 삼베나 무명옷감인 군포(軍布)를 물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별의별 명목과 이유를 붙여 어찌나 뜯어 가는지 다들 죽을 지경이었다.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으면 5년간 세금을 없이 한다 하고서, 첫해에는 농사가 잘 안 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싸악 쓸어갔다. 그러니 원성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창혁 등 주동자들을 난민을 선동한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배들평 농민들은 발로 채이고 육모방망이로 머리가 터지게 두들겨 맞고 쫓겨났으며, 전창혁 등 장두 세 명은 심하게 매질을 당한 후 옥에 갇혔다. 그리고 엉터리 보고서와 함께 전라감영으로 넘겨졌다. 전창혁 등 장두들을 넘겨받은 전라감사 김문현은 제법 엄한 소리로 꾸짖었다.

"난동의 대표자들은 백성들을 충동질시켜 난을 일으켰다."

그 후 김문현은 엄한 형벌로 다스리라는 판결과 함께 이들을 고부 감옥으로 되돌려 보냈다. 조병갑은 절대 굽히지 않는 전창혁의 의지와 고집에 권력과 오기로 맞섰다. 결국 연일 계속되는 곤장 형벌로 전창혁은 옥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전봉준은 피눈물을 삼키며 조용히 부친상을 치렀다. 이때부터 전봉준은 일상에 상복(喪服)을 입고 생활했다. 고부 농민들은 자신들을 위해 앞장서다가 비참하게 죽은 전창혁의 희생정신을 쉽게 잊을 수 없었다. 농민 70여 명이 고부관아에 몰려가 몇 차례에 걸쳐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매를 맞고 쫓겨났다.

결국 전봉준이 직접 소장을 준비하여 고부관아와 전라감영에 진정했으나 그마저도 외면당하고 말았다. 봉준은 굳은 결심으로 재혼한 이씨 부인과 2남 2녀의 가족과 비장한 각오로 마주했다. 봉준은 부인에게 큰절을 하고 아들딸들과 의지하며 살기를 당부하면서 이별의 인사를 한다.

"의(義)를 위해 바칠 목숨이요."

계사년(1893) 11월(음력)말, 전봉준은 태인의 최경선 집, 정읍의 손여옥 집, 죽산의 송두호 집 등을 동학도소로 정하고, 거사 계획을 연일 논의했다. 또한 조병갑 군수에게 등소한 농민들 수십 명도 죽산리 대뫼마을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봉준은 그간 논의한 '군수의 목을 벤다. 탐관오리들을 척결한다. 전주성을 점령한다. 한양을 접수한다' 등의 내용을 담은 격문(檄文)을 거사에 동참할 만한 접주와 농민들에게 비밀리에 전했다.

거사 계획의 소식을 접한 동학도인과 농민들은 손꼽아 그날만을 기다렸다. 그날 밤 눈이 퍼붓고 인적이 끊긴 으슥한 밤길을 귀신도 모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봉준, 송대화, 김도삼, 손여옥, 최경선 등 20여 명이 고부 죽산리 송두호집 동학도소에 모였다.

전봉준이 번득이는 눈빛으로 말문을 열었다.

"우리가 계획한 통문(通文)의 내용으로, 사발을 엎어 놓고 주모자가 누군지 모르게, 또 모두 주모자가 되게 뺑 둘러앉아 서명들 합시다."

송두호가 미리 준비한 백지와 사발, 필기도구를 내놓았다. 전봉준은 그동안 논의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리하여 말하고, 전봉준의 비서 정백현은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붓을 잡았다.

사발통문 원본사진 -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목 베어 죽일 것. -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 군수에게 아첨하여 백성(인민)을 괴롭힌 탐관오리를 엄하게 징벌할 것. - 전주성을 함락하고 경사(서울)로 직행할 것.
사발통문 원본사진-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목 베어 죽일 것. -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 군수에게 아첨하여 백성(인민)을 괴롭힌 탐관오리를 엄하게 징벌할 것. - 전주성을 함락하고 경사(서울)로 직행할 것. ⓒ 동학혁명기념관

각리 리집강 좌하(座下)
우(右)와 같이 격문을 사방에 빠르게 전하니 여론이 물 끓듯 하였다.
매일같이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부르던 민중들은 곳곳에 모여서 말하되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나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라도 어디 남아 있겠냐"하며 그날이 오기만 기다리더라.

이때 도인들은 먼저 할 것과 나중에 할 것의 대책을 논의 결정하기 위하여,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 집에 도소를 정하고 매일 구름같이 모여 순서를 정하니 그 결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목 베어 죽일 것
-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 군수에게 아첨하여 백성(인민)을 괴롭힌 탐관오리를 엄하게 징벌할 것
- 전주성을 함락하고 경사(서울)로 직행할 것
- 우(右)와 같이 결의가 되고 따라서 군략에 능하고 세상에 민활한 영도자가 될…

『전봉준, 송두호, 정종혁, 송대화, 김도삼, 송주옥, 송주성, 황흥모, 최흥열, 이봉근, 황찬오, 김응칠, 황채오, 이문형, 송국섭, 이성하, 손여옥, 최경선, 임노흥, 송인호』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곧 인편으로 각리 집강에게 돌리려는 찰나, 고부군수 조병갑이 11월 30일 갑자기 익산군수로 전임 발령되었고, 신임 고부군수로는 안주목사 이은용이 임명됐다. 조병갑이 전임된 것은 동학도들의 움직임을 파악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배들평 농민들과 전봉준의 진정 사건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익산에서도 고부와 마찬가지로 김택수 군수의 학정 때문에 집단 소요 사태가 일어났다. 동학 접주 오지영을 중심으로 익산관아에 몰려가 항의하다가 탄압이 심해지자, 전라감영으로 몰려가 민원을 제기하였다. 소요 원인 제공자인 김택수는 파면되었고, 동학도와 농민들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어디 고부와 익산뿐이랴! 전국에서 동학도 탄압은 갈수록 심해졌으며, 농민들 또한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고부군수 자리에 어느 누구도 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조병갑이 여기저기 힘을 써서 농간을 부렸고, 이은용·신재묵·이규백·하긍일·강인철 등이 연속으로 고부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몸이 아프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조병갑 역시 익산군수로 발령이 났으나 부임하지 않고, 고부군수직을 유지하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조병갑은 여러 상납할 곳과 나랏돈도 탕진해서 사실 돈이 많이 필요했다. 그런 돈과 재물을 긁어모으려면 고부만 한 곳이 없어서 김문현을 꼬드겼던 것이다. 이러는 사이 조선왕조 역사 이래 참으로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고부와 익산에 한 달 동안 군정을 책임지는 군수의 자리가 비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김문현은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전 고부군수 조병갑은 군민이 내지 않은 미납 세금이 많아 책임지고 걷어야 하며, 그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군으로 옮기게 되면 착오가 생기오니 다시 고부군수로 부임시켜야 마땅하리다.』

김문현은 고부 군민의 상황을 정반대의 논리로 조정에 올린 것이다. 거사의 명분이었던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발령이 나 고부에 없게 되자 기포를 추진하던 전봉준을 비롯한 접주들과 농민 대표 20여 명은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대뫼마을 도소에 모인 지도자들은 일단 거사를 연기하고, 다시 한 번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사발통문, 비밀스런 문건 하나, 주모자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사발 하나 엎어놓고 둥그렇게 서명한 동학기포격문이다. 갑오동학혁명의 사발통문과 기미3·1혁명의 독립선언서는 그 주모자에 있어 대비되는 비교 견줄만한 모양새이다. 사발통문은 주모자 전봉준이 드러나지 않지만, 독립선언서는 손병희가 서명 첫머리에 분명 주모자로 드러나게 서명하였다. 동학농민혁명에서 남·북접을 상징했던 두 동학지도자는 구국항일혁명의 영웅으로 민족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 계속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동학#천도교#동학혁명#사발통문거사계획#수운최제우선생탄신2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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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장」, 동학민족통일회 공동의장, 평화민족통일원탁회의 공동의장,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공동대표, 전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또 현(現)천도교선도사·직접도훈, 전(前)전주녹색연합 공동대표, 전(前)전주민예총 고문, 전(前)세계종교평화협의회 이사 등 종교·환경단체에서 임원을 엮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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