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끝은 정해져 있는데, 고단한 나날을 언제까지 버텨내야 할까?'
인생이 쉽지 않을 때 내면에 피어오르는 우울감은 먹고사는 게 버거운 어른들만의 감정이 아니다. 제법 긴 학교 생활과 꿈을 향한 도전을 견뎌내는 10대 청소년들도 삶에 물음표를 달곤 한다.

▲책 <7일 사이에> 앞표지 ⓒ 베틀북
<7일 사이에>는 사는 게 시시한 어느 고등학교 2학년이 죽음의 문턱에서 7일이란 시간을 보내며 깨닫게 되는 생의 의미를 그려낸 청소년 소설이다.
주인공인 아룡은 어딘가에 있을 법한 18살 여학생의 모습 그대로다. 2년 후면 성인이 되지만 딱히 꿈이 없다. 가고 싶은 대학이나 학과가 떠오르지 않는다. 공부나 교우관계에도 흥미가 없어 교실에선 어떻게든 '투명인간'처럼 눈에 안 띄려 노력한다. 초등학생 때부터 가깝게 지낸 '남사친' 시윤이 유일한 말벗이다.
"넌, 대학 안 가? 안 가면 뭐 할 건데?"
아룡은 대답 없이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윤은 이번에도 아룡이 답하지 않을 걸 알았다는 듯이, 자기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딱히 할 게 없으니까 가는 거야, 성적 맞춰서. 가능하면 가까운 데로."
시윤이 딱 부러지게 답하자, 왠지 뿔이 난 아룡이 질문을 이어 갔다.
"대학 가면?"
"취직 해야지."
"취직하면?"
"연애도 하고."
"연애하면?"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핑퐁 탁구 치듯 질문에 답을 이어 가던 시윤이 괜히 혼자 얼굴이 붉어져서 말끝을 흐렸다.
"시시하잖아. 그러다 죽나 지금 죽나 뭐가 달라?"
키는 안 크고 옆으로만 퍼져가는 자기 몸도, '한부모 가정'으로 불리는 가족도 지긋지긋하다. 아빠는 삶의 이유를 찾겠다며 6살 때 부인과 딸을 떠나 '법산'이라는 법명의 스님이 됐다. 엄마 명선은 남편을 잃은 뒤로 '새아빠를 찾아오겠다'며 연애에 몰두한다.
여느 날처럼 곧장 데이트 나갈 차림을 하고 밥을 차려주는 명선의 모습에 아룡은 부아가 치민다. 단 하나 남은 식구가 엄마인데, 자식보다 남자가 우선인 것처럼 보여서다. "이럴 거면 대체 난 왜 낳은 거야?"라는 절규에선 부모를 향한 서운함과 상실감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고립감마저 느껴진다.
추억, 사랑, 친구

▲세계 자살 예방의 날인 2023년 9월 10일 오전 서울 마포대교에 설치된 ‘한 번만 더’ 동상 모습. ⓒ 연합뉴스
이야기는 엄마와 티격태격하던 중 집을 뛰쳐나가 한강 다리 위에 선 아룡이 예상치 못한 사고 때문에 뇌사에 빠지며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몸에서 분리된 그의 영혼은 일주일간 관찰자의 시선으로 일상을 돌아보며 자신이 놓치고 있던 것들을 발견한다.
하나는 추억이다. 가족을 떠난 아빠가 원망스럽지만 사실 아룡에겐 소중한 기억이 있다. 아빠와 어렸을 적에 자주 가던 낡은 떡볶이집은 6살 꼬마 아룡이 자신을 향한 아빠의 사랑을 확인하던 곳이었다.
쓸쓸함에 잠식돼 기운이 없어질 때마다 아룡은 포크로 떡볶이를 하나 찍어 입에 넣어주던 다정한 아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면 조금은 버틸 힘이 났다.
"아룡은 자신이 배의 허기는 떡볶이로, 마음의 허기는 아빠와의 추억으로 채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음식에도 감정이 새겨 있고, 추억이 묻어 있었다. 엄마가 출근 준비로 바쁜 아침에도 아룡의 밥상에 꼭 올려주는, 파를 종종 썰어 넣은 계란국은 엄마의 정성이었다. 아빠가 호호 불어 입에 넣어 주던 떡볶이는 아룡을 향한 아빠의 사랑이었다."
또 하나는 사랑이다. 그가 태어나던 날, 엄마 명선은 온몸이 퉁퉁 붓고 산소호흡기를 껴야 할 정도로 출산이 힘겨웠지만 끝까지 아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빠 법산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 꾸러미를 받듯 조심스럽게 아기를 안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나 줘서 고마워" 하고 인사했다. 아룡은 부모님이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지 다시금 느끼고 깨달았다.
마지막은 친구다. 남사친이자 베프인 시윤은 언제나 옆에 있어줬다. 아룡이 사고를 당했을 때도 가장 먼저 달려와 응급침대 옆에서 울먹이던 아이였다. 중환자실에 옮겨진 뒤에는 매일 같이 찾아와 말을 걸어주고, 학교에서 같이 먹던 아이스크림을 사오며 친구가 깨어날 날을 간절히 기다렸다.
시윤은 잠시 이승을 떠나 있는 아룡에게 간절히 부탁한다.
"돌아와. (...) 나, 너랑 대학 가서도 취직해서도 같이 놀 거야. 사는 거 시시하지... 하지만 너랑 함께면 안 시시해."
내일이 오지 않길 바라던 아룡은 어느 순간 내일이 오길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시들었던 생명에 삶을 다시 불어넣은 것들을 결국 '관계'다. 넌 혼자가 아니고, 사랑받고 있고,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들이 한 아이를 구한 것이다.
그래도 인생, 살 만하네
소설이 주는 메시지는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고의적 자해인 한국사회에 시사점을 준다. 청소년 개인 내면의 정신건강도 돌봐야 하지만, 동시에 외부환경인 관계와 커뮤니티가 안정감을 제공하면 아이들에게 '살 만하다'는 의지를 일깨워줄 수 있지 않을까.
<7일 사이에>는 원래 단막 드라마 대본으로 쓰였다. 작품을 만든 김영혜 작가가 생명 존중 공모전에 낼 요량으로 쓴 대본에서 출발했다. 비록 공모전에서 당선되지 못했지만 청소년 소설로 나오게 됐다. 그는 "지금 일어나는 일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을 실감했다"면서 다음과 같은 소망을 전했다.
"여전히 삶은 버겁고 예측할 수 없는 일들로 구성되지만 주어진 삶에서 행복할지 말지를 선택하는 건, 나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의 뜻처럼 삶이 시시한 누군가 이 책을 만나 '그래도 인생, 살 만하네'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