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평집회는 혁명전야로 불타오르고
[보은 취회와 함께 원평 취회도 비슷한 시기에 전개되었다. 전봉준은 원평취회 초기에 적극 동참하다가 보은취회로 향했다. 봉준은 고부와 원평 부근의 곡식을 보은 장내리로 옮기는 특별한 임무의 식량운반 책임자로 나섰다.
보은취회에는 훗날 동학농민군 총대장 전봉준 장군과 일제강점기 때 상해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황해도 해주접주(18세의 소년접주) 백범 김구(본명 창수)도 참여하였다. 보은 취회에 비해 금구 원평 취회에서는 김덕명과 전봉준의 의견에 따라 갑오동학혁명으로 연결되는 정치적인 급진적 집회로 거듭나고 있었다.]
수운 대선생 신원운동인 동학 취회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 대한 원한과 서양세력과 일본세력을 축출해야 된다는 결의 속에 이제 혁명전야로 치닫고 있었다. 동학 취회의 끝장은 보은과 원평이라는 두 곳으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양쪽 취회의 인원수를 점검해보면, 보은 장내리 취회 참여자가 3만여 명을 웃돌았고, 금구 원평 취회는 1만여 명이 넘어서고 있었다.
보은 취회가 처음부터 끝까지 비폭력 평화집회였다면, 원평 취회는 처음부터 무력기포에 방점이 찍혀있었다. 원평 취회 현장의 분위기는 동학도인들의 기세가 드높아진 것은 물론 참여자가 점점 많아져 그야말로 폭풍 전야처럼 긴장감이 감돌았다.
동학남접 지도부는 원평 취회의 장소를 결정하는 데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였다. 취회 현장의 뒤에는 귀미산이 있고, 앞에는 원평천이 흘렀다. 나름대로 병법의 방어 수단을 고려하여 지형을 이용해 진지를 구축한 것이다. 원평에 모인 동학도인은 관군의 급습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한편 금구 원평취회의 도소에 보은의 소식이 당도했다. 김덕명 대접주를 중심으로 남접 지도부는 보은취회 해산이라는 결정에 원평취회도 해산을 결심했다. 남접 지도부 일원들이 다들 굳게 다문 입을 좀처럼 열지 않자, 김덕명이 기분전환을 위해 한마디 했다. "우리 기분도 풀 겸 혀서, 최경선의 칼춤이나 한번 구경하더라고. 판소리의 고향 남원 유태홍이가 칼노래를 부르고 말이여!"
최경선은 목검이 아닌 진검을 들고 나왔다. 유태홍은 북을 들고 나와 창(唱, 판소리)를 준비했다. 원평천 둔치를 가득 메우고 귀미산 자락까지 늘어앉아 있던 동학도인들도 양발을 교대로 구르고, 양손으로 박수를 치며 한바탕 어울림을 준비했다. 원평 취회는 남접의 거물들이 다 모여있었다. 김덕명 대접주, 서장옥 대접주, 김개남 대접주, 손화중 대접주는 물론 전봉준 접주를 중심으로 수많은 접주들이 참여했다.
김덕명 대접주가 원평천 둔치와 산야를 한번 휙 돌아보더니, "수운 대선생께서 남원 은적암에 계실 때, 달밤에 홀로 지리산을 바라보며 칼 노래와 함께 칼춤을 추셨지. 그 모습을 보던 호남 도인들이 은밀하게 전수한 칼춤이야!"
최경선은 경건하게 인사드리고, 옆구리에 찬 검을 천천히 뺐다.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성이 터져 멀리 들녘까지 울려 퍼졌다. 때를 맞추어 유태홍의 입에서 칼노래가 흘러나오며, 작은 북으로 장단을 맞추기 시작했다. 최경선의 칼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검결(劍訣, 칼노래)
"시호시호 이내시호 부재래시 시호로다
만세일지 장부로서 오만년지 시호로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 떨쳐 입고 이칼저칼 넌즛 들어
호호망망 넓은 천지 일신으로 비껴서서
칼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여 있네
만고명장 어데 있나 장부당전 무장사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
조선 정부는 동학 지도부와 한 약속을 며칠 만에 번복했다. 관군은 4월 3일부터 해산하기 시작한 남접 본부를 서서히 포위하면서, 7일에는 전봉준·서장옥·서병학 등을 체포하라는 긴급 명령을 내렸다.
관군이 원평도소와 귀미산 아래 천변 들판을 들이쳤을 때, 아무도 없는 쓸쓸한 들녘과 빈집만이 남아있었다. 관군이 생각보다 느리게 움직인 것은 동학당의 세력에 겁을 먹고 잘못하다간 자신들이 먼저 황천에 갈 수 있다는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보은취회와 원평취회는 비슷한 시기에 시작과 끝을 같이했다. 1893년 3월 20일 국왕 고종은 김문현을 전라감사로 제수(除授)할 때, 어전(御前_임금의 앞)에서 전라도의 동학이 번져가는 이야기를 주로 나눴다. 특히 고종은 금구원평(金溝院坪)에 대해 몹시 걱정하였다.
"전라감영으로부터 30리 밖에 있는 금구 원평에서, 동학하는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나쁜 일을 마구 저지르는 횡행천지(橫行天地)한다고 하니 먼저 그 소굴을 없애 근절하라."
이처럼 임금과 조정에서도 동학에 대한 심히 우려를 나타내고 있었으며, 특히 금구 원평에서 동학당의 세력을 정부에서 과히 우려를 넘어 반란의 조짐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충청도 보은 취회는 비폭력 평화집회였다면, 전라도 원평 취회는 평화집회를 뛰어넘은 무력시위에 가까웠다.
1893년 금구 원평취회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연결되는 전쟁의 도화선으로 작용하게 된다. 금구 원평 취회는 다른 말 필요 없고, 세상을 한 번 뒤집어 엎어버리자는 혁명전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동학 취회. 공주 집회, 삼례 집회, 한양 집회, 보은 집회, 원평 집회, 그들은 모두가 꽃들이었다. 꽃처럼 아름다운 그들에게 누가 칼을 겨누었는가. 그들은 모두가 하늘이었다.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는 그들에게 누가 총을 겨누었는가.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척양척왜, 하늘보다 귀한 그들의 이상이었고 실현할 수 있는 세상이었건만.」
교조신원운동과 음양오행의 동양사상
동학 취회, 교조 신원운동. 그 다섯 번에 걸친 집회를 동양철학의 진수인 음양오행(陰陽五行)에 견주어 설명해 본다.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은 양(陽)에 해당되고, 동학사상을 실천에 옮긴 해월 최시형 선생은 음(陰)에 해당된다. 다시 설명하면 수운 선생은 천(天) 즉 하늘에 해당되고, 해월 선생은 지(地) 즉 땅에 해당된다.
동학 천도교에서는 수운 선생을 천황씨(天皇氏), 해월 선생은 지황씨(地皇氏)라 한다. 천황씨는 태양(太陽) 즉 '해'이고, 지황씨는 태음(太陰) 즉 '달'이다. 동학에서 수운 선생과 해월 선생의 역할을 나뉜다면 음양(陰陽) 즉 수운 선생은 양(陽)이고, 해월 선생은 음(陰)이다.
수운 선생이 지은 경전, 도덕가에 '천지음양 시판후에 백천만물 화해나서 지우자 금수요 최령자 사람이라'는 말씀이 있다. 또 논학문 즉 동학론에서 '하늘은 오행(五行)의 벼리가 되고 땅은 오행의 바탕이 되고 사람은 오행의 기운이 되었으니,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_하늘·땅·사람)의 수(數)를 여기서 볼 수 있다'라고 말씀했다.
그럼 동학 취회에 대해 설명하겠다. 앞서 수운 선생과 해월 선생은 음양사상으로 설명했다. 1892~1893년에 있었던 교조신원운동의 동학 취회는 모두 다섯 번에 걸쳐 일어났다. 5차에 걸쳐 일어났던 교조신원운동을 오행사상에 견주어 설명을 해도 그 이치가 가능하다.
오행(五行)은 음양오행(陰陽五行)중 오행을 뜻하며, 우주만물의 변화를 목(木_나무)·화(火_불)·토(土_흙)·금(金_쇠)·수(水_물)의 다섯 가지 기운으로 압축해 설명한다. 또 불교에서는 지(地_땅)·수(水_물)·화(火_불)·풍(風_바람)·공(空_비움)의 오대(五大)로 설명 한다. 그럼 음양오행에 있어 수운선생과 해월선생은 양·음(陽·陰)에 해당되며, 다섯 번에 걸쳐 일어났던 교조신원운동 즉 동학 취회는 오행(五行)에 해당된다.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음양오행은 우주만물의 변화를 뜻하기 때문에 동학에서 말하는 다시개벽 즉 후천개벽(後天開闢)에 해당된다. 첫 번째 신원운동 즉 공주 취회는 오행에 있어 목(木) 나무를 듯하고, 두 번째 삼례 취회는 화(火) 불을 듯하고, 세 번째 한양 취회는 토(土) 흙을 뜻하고, 네 번째 보은 취회는 금(金) 쇠를 뜻하고, 다섯 번째 원평 취회는 수(水) 물을 뜻한다. 그래서 동학사상과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천지우주가 새로 시판되는 엄청난 사건이다.
동학창도는 대개벽이요, 교조신원운동은 대변화요, 동학농민혁명은 대혁명이요, 2차 동학농민혁명 즉 동학의병전쟁은 대전쟁을 뜻한다. 동학 취회 즉 교조신원운동은 음양오행에 있어서 오행에 해당되는 우주만물의 변화와 인간만사의 변혁에 그 중심자리를 뜻한다는 것으로 설명을 마치겠다.
- 계속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