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5일부터 12월 1일까지 국제 플라스틱 협약을 만드는 ‘제5차 정부간협상위원회(INC-5)’가 부산 백스코에서 진행됩니다. 이번 INC-5는 국제 플라스틱 협약 성안을 위한 마지막 회의입니다. 과연 국제 플라스틱 협약에 ‘플라스틱 생산감축’이 포함될 수 있을지, 협약안을 만들기 위한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어떠한 일들이 펼쳐지는지 서울환경연합 박정음,고은솔 활동가가 INC-5 현장에서 짚어봤습니다.[기자말] |
"END PLASTIC(플라스틱 종식)"
부산 해운대 바다에 거대한 글씨가 나타났다. 그것은 '플라스틱 종식'이라는 글자였다. 1950년대 중반 200만 톤가량이던 플라스틱은 2019년 기준 230배로 폭발적인 증가 폭을 보이며 연간 4.6억 톤이 생산되고 있다. 이제 우리의 삶은 플라스틱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토록 플라스틱에 의존하고 있는 지금, 왜 갑자기 부산 해운대 바다에는 '플라스틱 종식'이라는 글자가 나타나게 된 것일까.
11월 25일부터 12월 1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는 국제 플라스틱 협약안을 만드는 협상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 국제 플라스틱 협약의 본이름은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위한 법적 구속력 있는 국제협약'으로 석유를 시추하는 영역부터 플라스틱 원료와 제품의 생산, 이후의 재활용과 재사용, 그리고 폐기까지 전 주기를 규제하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 국제 플라스틱 협약의 주 쟁점은 바로 '플라스틱 생산감축'이다. 폭발적인 증가 폭을 보이고 있는 플라스틱 생산량을 줄이지 않으면 플라스틱 오염을 종식할 수 없으므로 시민사회는 이번 협약에 플라스틱 생산감축 조항과 목표치가 포함되길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산유국 등 몇몇 국가들의 '재활용을 포함한 폐기물 처리에 중점을 두자'는 주장이 대립하며 협약안에 과연 '플라스틱 생산감축'이 포함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인 상태이다.
"지금 멈추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란 없다"
협상의 시작을 앞두고 부산 벡스코 주변은 다양한 플라스틱 오염을 알리는 광고들이 게재되기 시작했다. 그 한가운데 포스트잇으로 가득 찬 광고가 하나 나타났다. 바로 '플라스틱 해방 특급 열차' 광고이다. 지난 11월부터 게재된 이 광고판에는 이번 협약에 참여하고 싶은 시민들이 남겨준 한 마디가 티켓처럼 생긴 포스트잇으로 제작되어 부착되어 있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바로 지금! 지구를 위해 강력한 결단을 보여주십시오! - 조혜정"
"오늘 버린 플라스틱, 내일 나에게 돌아옵니다. 플라스틱 생산, 지금 멈춰야 합니다. - 쓰레기왕국"
"개인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국제적인 개입이 필수적이다. -김민지"
이 광고는 벡스코 바로 옆, 협약에 참여하는 정부 대표단들이 오고 가는 센텀시티역에 있다. 지난 9월부터 모인 시민들의 한 마디가 600개가 넘는 포스트잇이 되어 광고를 가득 채웠다. 이번에 논의되는 '플라스틱 생산감축'이 결코 세계정부 대표단들에게만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플라스틱으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을 시민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No More Plastic!! No More Plastic!! No More Plastic!!"
(플라스틱, 이제 그만!! 플라스틱, 이제 그만!! 플라스틱, 이제 그만!!)
부산을 가득 채운 것은 광고뿐만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협상회의의 시작을 앞둔 주말, 1000명이 넘는 전 세계의 시민들이 부산에 모여 벡스코를 둘러싸는 행진이 진행되었다. 인도네시아, 호주, 일본 등 세계 곳곳에서 모인 시민들이 강력한 국제 플라스틱 협약이 만들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 구호를 외쳤다. 행진 속에는 재미있는 코스튬을 준비한 시민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환자복과 의사복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기후우울을 넘어 플라스틱 피로까지
이들이 이렇게 환자복과 의사복을 입은 이유는 바로 '플라스틱 피로'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플라스틱 피로'는 '기후 우울'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이후로 시민들은 기후변화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 무력감을 인지하고 언어화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끝없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플라스틱, 그러나 개인이 이를 해결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무력감 등을 모두 모아 표현한 것이다.
행진에 참여한 서울환경연합은 '플라스틱 피로도' 퍼포먼스를 통해 플라스틱에 대한 문제 해결이 시민의 몫으로 돌려지고, 이에 대한 피로도가 개인의 예민함으로 가볍게 여겨지는 것이 아닌 정부와 기업이 주목해야 할 중요한 문제라고 전하고자 했다.
행진은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이번에는 환경운동연합이 시민들과 함께 벡스코 주변에서 해운대까지 행진한 것이었다. 행진이 진행되는 동안 시민들은 앞에 나와 '우리에게 왜 강력한 플라스틱 협약이 필요한지', '플라스틱 생산 감축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 이유들'을 이야기했다.
행진에 참여한 심예진 환경운동연합 회원은 "일상에서 플라스틱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정부가 플라스틱 생산 자체를 감축할 계획을 내놓지 않는다면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행진이 끝나고 해운대에 도착한 전국환경운동연합과 500명의 시민들은 음악에 맞춰 "플라스틱 이제 그만"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플라스틱 오염이 도달하는 종착지인 바다 앞에서 거대한 'END PLASTIC(플라스틱 종식)' 글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25일, 국제 플라스틱 협약안을 만들기 위한 협상위원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시민사회가 플라스틱 생산을 줄이고 인류의 건강과 환경을 보호하고자 다양한 활동을 펼친 것에 비해, 협약 체결 과정은 순탄치 못한 상태다.
이번 INC-5를 통해 협약안을 마무리 지어야 하지만 이전의 4차 정부간협상위원회의 결과 협약안이 79쪽 42개 조항에 달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에 첫날 의장이 18쪽 31개 조항으로 대폭 간소화한 문서(Non-paper)를 협상 기반으로 하자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이를 반대했고, 이 외에도 인도,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집트, 우간다 등 일부 대표단은 협약의 의사결정이 만장일치로 이루어져야 한다며 협상안의 거부권을 부여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25일 저녁,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된 이후에도 상황은 좋지 못하게 흘러갔다. 인터넷이 잘 터지지 않거나 공간이 너무나 협소해 시민 사회의 참여가 제한되는 등의 문제가 첫날에 이어 둘째날까지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협상회의에 참여하는 옵저버(observer)는 시민의 눈과 귀를 대신하는 감시자로서, 전문 지식, 지역별 경험 등 다양한 입장을 전달하며 협약의 과정에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관점이 포함되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협약의 주요 이해관계자인 선주민(Indegenous people)이나 비공식 폐기물 수거자(Informal waste pickers)는 인도, 캐나다 등에서 비용 및 생계 부담을 안고 이번 회의에 참석했으나 정작 회의장 내 참석하지 못 해 큰 좌절을 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오늘도 협상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 본격적인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협상 속에서 어떤 논의가 이루어지는지, '플라스틱 생산감축'은 협약안에 담길 수 있을지 함께 지켜볼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