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취회 2), 척왜양창의를 선포하다
한편 원평취회 초기에 적극 동참했던 전봉준은 식량운반 책임자의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고 보은으로 향했다. 보은취회에는 훗날 일제강점기 때 상해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황해도 해주접주 백범 김구(본명 창수, 18세의 소년접주)도 참여했다.
보은취회 지도부는 도인들에게 재차 참여를 독려하는 통유문을 발송하였다. 전국에서 밀려오는 도인들의 행렬은 끊일 줄을 몰랐다. 질서가 있음은 물론 위엄을 갖춘 모습이었다. 각 포의 지도부 앞에는 동학의 이념을 상징하는 깃발을 내걸었는데 깃발에는 '시천주, 인즉천, 사인여천,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제폭구민, 척양척왜, 후천개벽, 대선생신원, 오만년지운수' 등이 적혀 있었다.
보은 장내리 주변의 산야에는 떠들썩한 세상과는 달리 개나리 진달래 등 온갖 꽃들이 만발하여 화려한 꽃대궐을 만들고 있었다. 논밭을 가로지르는 냇물에는 물고기들이 헤엄치며, 만물이 소생하는 완연한 봄기운에 세상천지가 생명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동학도인의 행렬 앞에는 각 포의 이름이 새겨진 크고 높은 오색 깃발들이 펄럭였다. 중간 곳곳에는 키 작은 수많은 깃발들이 각 접의 이름과 함께 바람에 휘날렸다. 도인들의 가슴이나 등, 어깨에는 동학의 영부인 궁을부적이 붙어 있었다. 또 어떤 포에서는 꽹과리·징·장구·북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신나는 춤판을 벌이기도 하고, 발걸음 장단에 맞추어 힘차게 걷기도 하였다.
보은취회에 집결한 동학도인의 수는 보은에 3만 명, 원평에 2만 명을 웃돌았다. 보
은과 원평에 모인 동학도인과 농민들 수가 5만 명을 넘어서자, 조정과 지방관청의 관리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전국의 관군 첩보 전령들은, 동학도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는 급보를 연이어 올렸다.
한편 조정에서 고종에게 실상을 보고하자, 고종은 3월 25일(음)에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 고종은 '동학도들이 한양으로 올라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홍수전의 난 때 중국도 영국군의 힘을 빌리지 않았는가. 우리도 청나라의 군대를 불러 동비들을 진압해야 된다' 등의 청군 차병론을 강하게 주장했다.
고종의 청군 차병론에 대해 영의정 심순택과 우의정 정범조가 반대하였다. '만일 군대를 빌려 오면 우리가 그 수발을 모두 해야 한다. 지금 나라의 사정이 그럴 수 없으니 전하의 뜻을 거둬야 한다' 등의 의견이었다. 영의정과 우의정을 비롯하여 대신들의 '차병론은 더 큰 화를 자초하는 것'이라는 반대 의견이 많아 고종은 차병론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고종은 차병론을 완전 접지 못하고 차병론을 제일 먼저 제안한 민왕후와 다시 논의했다. 중전인 민왕후는 '동학당들과 대원군이 밀통하고 있다. 전라도 동비 두령인 전봉준과 자주 내통한다. 대원군이 동학당 세력을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하려한다. 장손 이준용을 왕으로 옹립해 섭정을 할 것이다' 등의 의견으로 청군차병론에 굽히지 않았다. 결국 민왕후의 제안으로 고종은 호조참판 박제순을 통해 원세개에게 청군 파병을 청원하기로 하였다.
고종은 박제순을 밀사로 보내 원세개에게 차병을 청원하고 협의하게 하였다. 원세개는 청군 출병을 거부하면서 차선책을 내놓았다. 원세개는 이홍장을 불러, 북양 해군 제독 정여창에게 해군 함정을 출동시켜 강력한 위력 시위를 통하여 동학당을 해산시켜 진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보은 장내리에 모인 동학도인들은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만일을 대비하고 있었다. 바람막이로 임시로 쌓았던 돌담을 더 높이고 확장하여 어엿한 석성을 구축해서 경계를 강화했다.
또한 집회장 주변 여러 곳에 많은 인원이 사용할 뒷간도 마련하였다. 제일 큰 문제는 먹고 자는 것이었다. 숙박은 인근 마을의 집들을 최대한 이용하고, 돌성 안팎에 임시 초옥을 천여 개 정도 세웠다. 식사는 주로 주먹밥으로 했고, 밥을 지을 때는 커다란 소가죽과 가마솥을 이용했다. 봄햇살이 따사로워 다행히 단체 생활에 큰 고통은 없었다.
전국 팔도에서 계속 밀려오는 도인들을 바라보면서 동학 지도부와 관군 지도부에는 동시에 큰 걱정거리가 생겼다. 동학 지도부의 걱정거리는 숙식 문제였고, 관군 지도부의 걱정거리는 진압 문제였다. 이대로 가면 보은과 원평에 운집한 동학도인들이 혁명의 깃발을 올릴 수도 있었다. 또한 관군 지도부는 이들이 만약 무기라도 들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염려하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보은 장내리의 취회 장소는 옥녀봉을 뒤에 두고 강을 앞에 둔 넓은 평야 지대다. 옥녀봉을 중심으로 남산과 북산 봉우리에서 깃발을 흔드는 방법으로 관군의 접근을 알려 취회의 움직임을 통제하였다. 보은취회에서는 동학의 13자 주문(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접주들이 동학 경전을 읽는 소리가 이어졌다.
보은집회에서 결정적으로 멋진 광경은 야간 시위 현장이었다. 관솔불과 횃불 수천 개를 이용한 파도타기는 천지가 무너질 듯한 함성과 함께 군중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취회 동향을 탐지하려는 관군의 첩자들이 몰래 산봉우리에 잠입하여 그 광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매! 횃불과 관솔불, 등불들이 마치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 같네!, 그려, 꽃불들이 들녘을 덮어 버렸구먼! 완전 동학세상이 되어버렸어!!"
해월 최시형 선생은 옥녀봉 아래 바위 언덕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면서 설법과 당부의 말씀을 했다. '이렇게 질서를 지켜 주시고 주문 수행과 경전 공부까지 하시는 모습에 감탄하였다. 하늘을 공경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며 공경해야 한다. 또 사람을 공경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자연만물까지 공경해야 한다. 천지만물이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게 없다. 땅을 함부로 하지 말고 어머니 살처럼 대하라. 걸을 때도 조심하시고, 가신 물도 멀리 버리지 마시고, 가래침을 뱉으면 반드시 흙으로 덮으라. 집회를 마쳤을 때 여러분들이 여기에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걸 누가 모르게 깨끗이 마무리하라. 절대로 민가에 피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등의 말씀을 하였다.
보은 취회, 언제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어느 곳이나 사람이 많이 모이면 으레 그렇듯 엿장수들이 가위 치는 소리를 내며 몰려들고 장꾼들도 대목을 찾아 모여들었다. "엿 사시오, 엿이요!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는 호박엿이 왔어요. 말만 잘하면 공짜! 외상은 안 됩니다."
엿장수들의 가위 소리와 노랫소리를 듣다가 어느 도인은 '엿판 통째로 주시오! 한 가닥씩 팔아서 언제 다 팔 거요!'하면서 '껄껄껄' 웃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접주인가 도인인가 몇 명이 우르르 달려들어 집회 군중들 머리 위로 "엿판 받아라!" 하며 엿판을 통째로 던졌다. 엿장수들이 엿을 도둑맞았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엿값이 그대로 계산되어 담긴 엿판이 한 바퀴 휙 돌아왔다. 엿장수들은 그 후부터는 엿판을 가져와 통째로 넘겨주곤 했다.
한편 동학 대표단과 정부 대표단은 협상을 개시했다. 다급해진 어윤중은 대표단을 이끌고 동학 지도부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3월 26일(음) 왕명을 받은 양호도어사 어윤중 등은 보은군 속리면 장내리 앞 개천에 도착했다. 동학 대표단에는 해월 선생을 대신하여 강시원과 김연국, 손천민, 손병희 등이 나섰다.
어윤중은 '빨리 해산하지 않으면 군사를 동원하여 강제 진압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시원과 대표단은 '우리의 요구 조건을 들어준다는 임금님의 비답(批答, 상소에 대한 임금의 대답)이 있어야 해산을 결정하고, 취회를 마무리할 것'이라고 했다. 어윤중은 '먼저 해산하면 윤음(綸音, 임금의 말씀)을 받아 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윤중과 강시원은 서로 밀고 댕기는 협상을 거듭하였다.
동학 대표단은 '수운 대선생을 신원하고 동학을 공인할 것. 도인들의 체포와 탄압을 중지할 것. 일본과 서양 세력을 물리칠 것. 외세를 끌어들이는 민비(민왕후)를 쫓아낼 것. 집집마다 무리하게 거두는 세금을 없앨 것. 조정에서 임의로 찍어 낸 화폐를 없앨 것. 각 지방에서 세금을 쌀로 가져가는 것을 그만 둘 것. 무명 솜옷을 입고 외국과 물산을 거래하지 말 것' 등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강시원의 요구 사항을 들은 어윤중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윤중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강시원이 제의한 요구를 임금에게 전한다고 하면서 동학당의 해산을 거듭 반복적으로 요구하였다.
어윤중은 임금에게 올리는 장계를 쓰면서 몸서리를 쳤다. '사람이 하늘이라… 임금을 하늘처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임금과 관료들이 백성을 하늘같이 섬겨야 한다니, 이건 반란이고 역적이다!'라고 중얼거렸다.
어윤중의 장계는 조정에 보고되었고, 임금은 친위군 장위영 정령관 홍계훈에게 군사 600명과 기관포 3대로 무장하고 동학당을 진압하도록 어명을 내렸다. 관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동학도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강시원 등 지도부는 3월 30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질척거리는 날에도, 해월 선생의 명을 받들어 수칙을 정해 동학도인을 지휘했다.
'첫째, 도인들은 각 포와 접의 소속을 이탈하지 말 것이며, 경전과 주문 공부에 치중할 것. 둘째, 도인들은 구호를 외치지 말 것이며, 각 포와 접의 깃발은 모두 내려 보이지 않게 숨길 것. 셋째, 돌 성문의 중앙에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대형 깃발 하나만 높이 게양할 것이며, 반란의 오해 소지가 있는 행동을 삼갈 것' 등이다.
어윤중은 4월 1일 이른 아침에 공주영장, 보은군수, 군관 등과 병사들을 이끌고 보은 장내리를 다시 방문했다. 동학 지도부와 만난 어윤중은 먼저 임금의 윤음을 이중익 군수에게 봉독하게 했다. '임금의 훈유를 듣고 해산하면, 동학을 인정해 주고 생업 또한 보장해 주겠다.'
어윤중은 어명을 전하면서 3일 안에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해월 선생을 비롯한 동학 지도부는 긴급회의를 열어 논의했다. 결국 '집회를 시작한 지 이십 일이 다 되어,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해 모두가 지쳐 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도인들의 식량이 떨어져 간다. 더구나 정부군 600명이 완전무장을 하고 청주에서 대기하고 있으며, 보은에도 청주 군사 100명이 명령만 기다리고 있다. 임금의 훈유문도 내려왔고, 여러 상황을 고려할 때 해산하는 것이 좋겠다'로 의견이 모아졌다.
동학 지도부는 해산 기간이 3일은 너무 짧다면서, 어윤중에게 기한을 5일간의 여유를 요구했다. 어윤중은 왕명이라며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어윤중은 사실 동학도인들의 취회를 지켜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민회 군중의 복장은 거의 하나로 통일되었으며, 주문 수련과 경전 공부는 물론 엄격히 질서를 지키는 모습은 지금까지 민란에서 보지 못한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어윤중은 동학도인들이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한몸처럼 움직이는 것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았다. 동학 조직의 민회가 만약 반란으로 이어진다면 걷잡을 수 없는 무서운 세력이 될 거라고 판단했다. 어윤중은 징계를 당할 각오로, 가능한 관군과 동학당의 충돌을 피할 수 있도록 장계를 작성하여 임금에게 올렸다. 그 속에는 동학당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인용한 대목도 있었다.
'민회는 작은 병기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다른 나라에도 민회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국가의 정책이나 법령이 백성들에게 불편함을 끼치면 마땅히 회의를 열어 논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타당한데 어찌 관료와 양반들을 해치거나 재물을 빼앗는 비류로만 보겠습니까!'
보은 취회는 동학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4월 2일에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지도부는 4월 2일, 청수를 봉전하고 해산 의식을 간단하게 치렀다. 관군의 기습과 공격에 대비하여 포와 접별로 각각 길을 따로 정해 귀향길에 올랐으며, 반격에 유리한 지형과 눈에 띄지 않는 길을 골라 조직적으로 흩어졌다.
보은 장내리 취회의 의의는 '척왜양창의'와 '민비 축출'이라는 정치 구호에서 볼 수 있듯이, 민중이 자각하여 나라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열어나간다는 뜻을 재확인한 데 있었다. 그렇지만 장장 20일간의 대규모 취회에서도 지난 취회들처럼 충분히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동학도인들이 각자 고향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관군의 추격과 탄압이 시시각각 다가오면서, 임금의 약속은 또다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한 번 속고, 두 번 속고, 세 번 속고 연이은 속임에 이젠 임금이나 정부의 말을 믿는 동학도인과 농민들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폭풍전야, 거대한 태풍이 온대지를 휩쓸 듯이 혁명, 전쟁이라는 것이 민중의 가슴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