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씨와 같은 진충갈력 용맹의 기상이 2천만인 있었더라면 오늘의 국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고관은 자기 생각만 있고 나라 있음은 모르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므로 고관 중에 충신이라 할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심문과정에서 왕산 허위에 대해 남긴 말이다.
허위(許蔿, 1855~1908)는 경북 선산시 임은동에서 아버지 허조와 어머니 진성이씨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왕산(旺山)이고 본관은 김해이다. 소싯적에 부모를 여위고 정복주의 강회에 참석하여 학문을 읽혔다. 1890년경 고향을 떠나 진보의 신한으로 이사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군을 피하여 맏형과 함께 청송군 진보면 흥구리로 이거하여, 1896년 맏형이 의병에 참여하고 자신은 김산에서 의병을 준비하였다. 3월 29일 김산의진이 결성되자 그는 참모가 되었다. 전후 관군과 32회 교전을 치르다. 고종의 '의병해산' 봉서를 받고 부대를 해산하였다. 이후 맏형이 은거하고 있던 흥구리로 들어가 학문을 하며 지냈다. 1898년 초 상경하여 정치개혁과 일본 등 열강의 국권침탈에 반대하는 상소운동에 참여하고, 45세이던 1899년 2월 신기선의 추천으로 늦은 관직에 나아갔다. 원구단 참봉, 영희전 참봉, 성균관 박사, 승훈량, 중추원 의관, 주차일본공사관수원, 정3품 통정대부, 평리원 재판장, 의정부 참찬, 관제이정소 의정관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관직에 있을 때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되었다. 1903년 초 관직을 버리고 배일운동 단체인 공제소·대한협동회·정우회·충우사 등에 참여하고, 윤이병·송수만·이상천 등과 연명하여 친러파의 두목 이용익과 친일파의 수괴 이근택을 주살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조정은 이미 그들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고, 우국지사들의 상소는 수납되지 않았다.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고 친일단체 일진회가 매국행위에 앞장서자 이준·윤효정 등과 반 일진회 투쟁에 나섰다. 그는 <성토일진회>를 발표하여 그들의 매국행위를 규탄하였다.
성토일진회
명색 일진회란 것도 또한 대한에 태어난 것들이면서 저 사람들(일본인)의 앞잡이로 됨을 즐거이 여기며, 방자하게 보호하는 말을 전국에 선언하여 저 사람들의 핑계거리를 준비하고 있다.
저들도 사람의 낯짝이고 사람의 마음이면서 어찌해 이런 극도에 이르렀는가. 진실로 그들의 심보를 따져보면 역적의 형적이 이에 싹 텄으니 절대로 우리 대한의 신자(臣子)가 아니다. <춘추>에 "난신적자는 사람마다 죽일 권리가 있다했다."
지금 공법에 "역당은 타국의 간예(干預)를 칭한 것"이라는 것도 또한 합리하지 못함이 있다. (주석 1)
조정은 그의 활동을 제어하고자 1905년 3월 비서원승에 임명했다. 일종의 '입틀막'이었다. 그는 벼슬에 연연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배일격문>을 지어 <황성신문>에 게재되었다. 일본 헌병대장이 최익현·김학진과 그를 구속하여 일본군병참사령부로 압송했다. 여론이 비등하자 4개월 뒤 풀려났다.
을사늑약이 강제 되자 그는 다시 행동에 나섰다. 전국 각지를 돌며 의병을 조직했다. 1906년 3월 영천에서 산남의진을 결성했다. 1907년 고종의 퇴위, 정미7조약, 군대해산 등 나라는 점차 국망의 위기로 치달았다. 이 해 9월 경기도 연천에서 거의하여 경기·강원지역 의병을 연합하여 300명 규모의 의병대를 조직하고 총대장에 선임되었다.
다시 전국 의병부대의 연합에 나서 각지에서 모인 48개 의병부대 1만여 명이 경기도 양주에서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여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그는 군사장을 맡았다. 1908년 1월 초 서울을 탈환하는 진군령을 내렸다. 이 작전은 출격 직전 총대장 이인영 부친의 별세로 서울 진공은 일단 중지되었다. 각 의병부대들은 본래의 장소로 복귀하고, 그의 직할 부대는 임진강 유역에 새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허위는 일본군과 유격전을 계속하면서 다시 서울탈환작전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이강년 등과 의병 재개의 통문을 각지에 돌리는 등 대책을 세웠다. 한편 측근을 서울에 보내 고종의 복위·통감부 철거 등 32개 조의 요구 조건을 통감부에 제출하였다.
통감부는 그를 붙잡는 데 혈안이 되었다. 1908년 6월 11일 연평군 서면 유동 박정연의 집에 은신하고 있던 중 유산헌병분견소와 철원헌병분견소 헌병들에게 붙잡혔다. 서울 헌병대로 이송되고 재판소 평리원으로 넘겨졌다. 9월 18일 사형이 선고되고, 1908년 10월 21일 오전 사형이 집행되었다. 54세였다.
형이 집행되기 전 일본 승려가 그의 명복을 빌고자 불경을 읽으려 하자 왕산 지사는, "충의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서 복을 얻으랴." (주석 2)라며 완강히 거절하였다.
유학자 곽종석은 왕산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애도하였다.
온 휘에는 정성스런 신하의 피요
천 줄기는 지사의 눈물이네
뿌리는 저 눈물이 통한의 비가 되어
음산한 날씨가 개이질 않네
조용히 의대에서 소를 꺼내 올렸고
격렬하게 정기가를 불렀다네
누가 문천상이 죽었다고 말했는가
북두성은 우뚝 솟아 푸르게 빛나도다. (주석 3)
독립운동사 연구자는 왕산 지사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논찬하였다.
몇 백 몇 천의 의병장 가운데서도 열력(閱歷)과 성망이 뛰어나고 한학에 조예가 깊으며, 특히 역학(易學)에 밝아 중민(衆民)의 섬기는 바 되어 이르기를 선생(先生)의 경칭으로 대한 사람이다. (주석 4)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주석
1 > <국역 왕산전서>, 74쪽.
2> <왕산 허위선생 거의 사실 대략>, 245쪽.
3> <국역 왕산 전서>권2, 부록.
4> 박성수, <허위의 사상과 투쟁>, 7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