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이며 사학자인 백암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최익현은 국가의 원로요 유림의 태두(泰斗)였다."고 평가했다.
국적 제1호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루쉰 감옥에 갇힌 안중근은 일경의 <옥중 취조문>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최 면암은 고명한 사인(士人), 격렬한 상소를 올리기 수 회, 도끼(斧)를 지니고 대궐에 엎드려 신(臣)의 목을 베라고 박(迫)한 것과 같은 일은 참으로 국가를 걱정하는 선비였다.
또 5조약에 반대하여 상소하고 뜻대로 되지 못하자 의병을 일으킴에 이르렀다.
왜군이 이를 체포하였어도, 나라의 의사(義士)라 하여 대마도에 보내어 구수(拘囚)하였다. 그러자 그는 백이·숙제 이상의 인물이다. 주곡(周穀)을 불식(不食)한다 하였으나, 최 선생은 물도 불음(不飮)한다 하였으니 만고에 얻기 어려운 고금 제일의 인물이다.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포천 출신이며 아버지는 최대이다. 호는 면암(勉庵), 22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간 이후로 세 번이나 임금에게 간언을 하여 귀양을 갔다.
면암은 36세에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오늘로 치면 대검찰청 차장쯤 되는 자리였다. 첫 작업이 그동안 지켜봐온 대원군의 대표적 패악 4가지를 들어 탄핵하는 상소였다. 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 그의 권세는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막강했다. 탄핵은 대원군 뿐 아니라 고종까지 겨냥하고 있었다. 신출내기 사헌부 장령이 목숨 내걸고 상소를 한 것이다. 궐 내외에서 아첨배들이 들고 일어났다. 최익현을 역적으로 모는 상소가 이어졌다. 임금을 폭군의 대명사인 걸(桀)과 주(紂)·진시황에 견주었으니 역적이라는 것이다.
파면당한 면암은 겁먹지 않고 또 다시 폭탄 상소를 올렸다. 삭탈관직, 유배령이 내리고 관계에서는 역도처럼 취급당했다.
을사늑약은 매국노·친일파들에게는 '새로운 주인'의 탄생이지만, 백성과 올곧은 선비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참변이었다. 누대에 걸쳐 국가의 녹봉을 많이 받은 자들일수록 국가 위난시에는 매국에 앞장서거나 동족을 배신하는 데 헌신적이었다.
포식동물이 사냥을 할 때이면 어김없이 사냥감을 무리로부터 떼어내고 목줄을 사나운 이빨로 끊듯이,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함으로써 조선을 고립무원의 상태로 만들었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면서 외교권부터 박탈한 것은 우선 얼룩말을 무리에서 떼어내고 공격하는 수법 그대로였다. 그리고 을사늑약으로 목줄을 끊었다.
을사늑약 소식이 알려지면서 조약체결에 대한 반대운동과 반일항쟁이 전국에서 일어나고 순절자들이 속출하였다. 시종무관장 민영환을 비롯하여 특진관 조병세, 법부주사 송병찬·전 참정 홍만식, 참찬 이상상, 주영공사 이한응, 학부주사 이상철, 병정(兵丁) 김봉학·윤두병·송병선 등이 자결 순국하였다.
때를 같이 하여 충청도에서는 전 참판 민종식, 전라도에서는 전 참찬 최익현, 경상도에서는 신돌석, 강원도에서는 유인석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을사오적인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외부대신 박제순 등을 척살하려는 운동이 몇 갈래로 전개되었다.
면암은 국세가 날로 어려워져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의병에 나설 것을 작심하였다. 그리고 황실에 <창의토적소>를 올려 거사의 뜻을 밝히고, 일제에 대해 신의를 배반하는 죄악상을 열거하는 <문죄서(問罪書)>를 통감부에 발송했다.
면암은 일본의 죄상을 열거하고 조선의 참상을 설명하면서, 일제의 반성이 없을 때 무력적인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문죄서>를 공개했다.
면암은 이어서 열 여섯 가지의 죄악상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였다.
첫째, 갑신년(1884)에 죽첨진일랑이 황제를 협박하고 재상들을 죽였으며
둘째, 갑오년(1894)에 대조규개의 난으로 궁궐을 태우고 재물을 약탈하고 제도와 문물을 폐기하였으며
셋째, 을미년(1895)에 삼포오루가 국모를 시해케 하여 천만고에 없는 대역죄를 범하였으며
넷째, 임권조 및 장곡천 호도가 협박과 약탈을 일삼고 철도·어장·산림·광산·항해 등의 이권을 빼앗았으며
다섯째, 군사상 필요하다는 명목 하에 토지를 강점하고 인민을 침해하고 묘지를 파내고 가옥을 파손하였으며 뇌물이 횡행하고
여섯째, 전쟁이 종결됐는데도 철도·토지를 환송치 않고
일곱째, 역적 이지용을 꼬여 의정서를 만들어 우리 국권을 줄게 하였으며
여덟째, 제신들의 상소는 조선의 군주와 국가에 충성한 것인데 포박을 가하고 구금하여 충신의 입을 막고 공론을 억압하였고
아홉째, 일진회를 앞잡이로 삼아 선언서를 만들게 하고 보안회와 유약소를 치안상 방해라 하여 백방으로 탄압하였고
열째, 역부를 징집하여 혹사케 하고 우매한 백성을 꼬여 멕시코에 팔았으며
열한째, 전신 우편을 강탈하고 통신기관을 장악하였으며
열둘째, 고문관을 두어 후대하고 군경에 대한 감액과 재정에 대해 약탈을 하였고
열셋째, 강제에 의한 차관과 화폐제도를 개악하여 재정을 강도질 하여 정혈을 빨아먹었고
열넷째, 이등박문·임권조·장곡천호도 등의 위협으로 조약을 체결하며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두어 조선의 자주독립권을 상실케 하였으며
열다섯째, 처음에는 다만 외교를 감독한다 하더니 종국에는 정치·법률을 전관하고 소속 관리를 많이 두어 걸핏하면 공갈을 일삼으며
열여섯째, 이민 조례를 만들어 인종을 바꾸어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이땅에 하나도 남아 있지 못하게 하고 있다.(<면암집>)
면암은 의병투쟁에 나섰다. 74세의 노구이지만 나라가 망하는 꼴을 지켜보면서 나이 탓이나 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말(글)로서 이루지 못한 일을 이제 행동으로 나섰다. 면암의 의병투쟁은 1906년 초부터 구체화되어 그 해 3월 전라도 태인으로 내려가서 임병찬을 만나 그와 함께 동지 규합과 군사활동을 준비하였다.
의병전은 현대식 병기로 무장한 왜군을 정신력으로 싸우기는 역부족이었다. 대마도로 끌려갔다. 대마도로 끌려간 면암은 당당했다. 대마도 경비 보병대대장 소에지마가 감금소를 찾아왔다.
경비대장은 일행에게 모자를 벗고 일어나 경례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통역의 말을 듣고 면암은 격노하여 그를 꾸짖고 모자를 벗지 않았다. 소에지마가 "일본이 주는 밥을 먹었으니 너희들은 관을 벗고 머리를 깎으라면 깎아서 명령대로 시행할 일이지 어찌 거역한다 말하냐"라 하면서 억지로 면암의 관과 건을 벗기려 할 뿐만 아니라 총검을 들이대고 위협까지 했다.
면암이 가슴을 풀어헤치며 "이놈, 어서 찔러라"라고 대성일갈하니, 왜인들은 차마 볼 수 없는 행패를 부렸다. 74세의 노구에게 가해지는 참을 수 없는 수모였다.
면암은 이런 처지에서 굶을 결심을 하고 주위를 돌아보며 비장한 각오로 단식을 선언하였다.
내가 왜와 30년 동안 싸웠으니, 저들이 나를 해치는 것은 조금도 괴이하지 않다. 또한 나는 나라가 위태해도 부지하지 못하고 임금이 욕을 당해도 죽지 못하였으니, 내 죄는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오늘까지 살아 있는 것은 헛되이 죽는 것은 국가에 무익하니 대의를 천하에 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일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의병을 일으키던 날 이미 알았으니, 오늘의 흉액은 오히려 늦다고 할 것이다.
지금 이미 이 지경에 이르러 그들의 음식을 먹고 그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도 의가 아니니, 지금부터는 단식하고 먹지 않을 것이다. 전쟁에서 죽지 않고 단식으로 굶어 죽는 것도 또한 운명이다.(<면암집>)
면암은 단식을 선언하고 일본의 물 한 잔, 밥 한 술도 거부하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다음 날 일본 위관이 달려와 만류했지만 허사였다.
그의 단식이 길어지면서 건강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러자 식사비용이 조선정부에서 지불하는 것이라고 의병들이 설득하였다. 10월 달에 병이 나서 11월 17일 대마도 경비대에 감금된 지 4개월 남짓만에 세상을 떠났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자주독립 의열사 열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