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신사 최시형 선생 동상 해월 최시형 선생 동상은 포덕120년(1978년) 9월에 경주 황성공원에 천도교를 중심으로 동학관련 단체에서 세웠다. 해월 선생 동상 우측 부조물에는 보은 취회에서 수만의 도학도인들을 지휘하고 가르치는 선생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또한 수운 대신사 최제우 선생으로부터 동학의 2세 교주를 물려받는 장면과 해월 선생의 약력 등도 담겨있다.](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4/1126/IE003381800_STD.jpg)
▲해월신사 최시형 선생 동상해월 최시형 선생 동상은 포덕120년(1978년) 9월에 경주 황성공원에 천도교를 중심으로 동학관련 단체에서 세웠다. 해월 선생 동상 우측 부조물에는 보은 취회에서 수만의 도학도인들을 지휘하고 가르치는 선생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또한 수운 대신사 최제우 선생으로부터 동학의 2세 교주를 물려받는 장면과 해월 선생의 약력 등도 담겨있다. ⓒ 동학혁명기념관
보은 취회 1), 반봉건 반외세 구국운동
[수운 대선생 교조신원운동은 공주취회, 삼례취회, 서울취회(경성)로 연결되면서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에 내건 요구사항 및 참여 규모가 갈수록 확대된다. 앞으로 전개될 보은취회에 앞서 서울취회는 그 정신이 최근 촛불집회까지 계승되는 역사적 불멸의 정신으로 남아있다.
교조신원운동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역사적 의미가 넓었던 취회는 보은 장내리 집회였다. 동학지도부에서 발표한 통문과 방문의 내용에, 일본과 서양 세력을 배척하기 위한 '의병을 일으킨다'는 '척왜양창의'의 깃발이 본격 등장했다. 동학운동은 이제 동학 공인과 대선생 신원운동을 넘어 민중 운동, 정치운동에서 척양척왜운동으로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한양취회 해산 후, 동학도인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한 곳은 동학 대도소가 있는 충청도 보은이었다. 광화문 앞에서 전개한 상소취회는 해산하였으나 집이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도인들이 많았다. 3월 초순부터 보은 장내리와 전주 삼례에 동학도인 수백 명이 모이기 시작했다.
해월 선생과 동학지도부도 이러한 상황을 예사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또한 언제나 '신중하라'는 말을 앞세우던 해월 선생도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전환하였다.
해월 선생은 옥천 거포리에 있는 김연국 집에서 1893년 3월 10일(양4.25) 수운 대선생 순도 기념제례를 올렸다. 이때 해월 선생을 비롯하여 손병희, 김연국, 권병덕, 권재조, 이관영, 이원팔, 임정준 등이 참여했다. 제례를 마치고 해월 선생은 동학이 심각하게 탄압받는 정황을 전해 들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의하라고 지시했다.
해월 선생이 감수하고 손천민이 작성한 통문(通文)이 발송되었다.
"최근에 정치하는 사람들이 미련하고 어리석어 밖으로는 침략 세력들에게 거침없는 위협을 당하고, 안으로는 관리들과 세도가들이 사납고 악독하게 백성들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으며 각각 파벌을 달리하고 있다. 백성들은 꼼짝 없이 당하기만 하고 어찌할 방도가 없으니 가슴을 치며 통탄할 일이로다.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들이 평안하도록 보국안민 하자는 데 뜻이 있으니, 3월 11일까지 보은 장내리에 일제히 모이라."
동학도인들은 3월 10일(음) 제29주기 수운 선생 순도일을 맞이하여, 보은(報恩) 대취회(大聚會)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보은 장내리 취회 장소에 돌로 된 성(城)을 쌓았으며, 척왜양창의의 큰 기(旗)와 다섯 가지 색의 깃발을 5방에 세웠다.
또 각 지방의 포(包)와 접(接)마다 기(旗)를 세웠으며, 참여 숫자가 무려 2만에서 3만에 육박하였다. 보은 장내리는 많은 인원이 모이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영남의 상주와 호서의 청주를 연결하는 지리적으로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암산(梨巖山) 아래 삼가천(三街川)의 천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동학지도부는 3월 11일 이른 아침 보은 삼문 밖에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방문(榜文)을 붙였다.
"지금 왜인(일본인)과 양인(서양인) 도둑들이 조선의 중심부까지 들어와 재산을 맘대로 부수고 난잡한 행동을 일삼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한양의 모습은 미개한 오랑캐들의 소굴이 되어 버렸다. 지난 일을 생각해 보면 임진왜란 때의 원수와 병인 때의 치욕을 어찌 참으며 잊으랴! 최근 조선의 삼천리 땅은 날짐승이나 길짐승 같은 저들에게 짓밟혀 몹시 위태롭게 되었다.
왜적들(일본의 적들)은 당장 독기를 뿜어내려 하니 나라의 위태로움이 급하게 되었다. 옛말에 '큰 집이 기울어질 때 나무 하나로 지탱하기 어렵고, 큰 물결이 밀려올 때 갈대 한 묶음으로 막을 수 없다'고했다. 우리 동학도인 수만 명은 힘을 합쳐 일본인과 서양인들을 쓸어버리는 데 죽기로 맹세하고 나라와 백성들에게 보답하고자 한다. 합하(충청감사)도 뜻을 같이하여 충의로운 선비와 관리들을 모아 나라를 바로 돕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는 데 함께 나서 주기 바란다."
동학은 이제 동학 공인과 대선생 신원운동을 넘어 민중 운동, 정치운동에서 척양척왜운동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보은군수 이종익은 3월 12일에 동학도인들이 내건 방문의 내용을 충청감영에 즉시 보고하였다. 이종익은 13일부터 관리와 첩자들을 보내어 동학도인들의 움직임을 탐지하면서 충청감사에게 그 상황을 보고했다.
보은취회는 크게 세 갈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첫째는 신앙자유화 차원의 대선생 신원과 동학 공인 운동이었다. 둘째는 민생 차원에서 백성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과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로부터 해방하는 것, 그리고 곡물 유통을 원활하게 하여 시장을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셋째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한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세운 강력한 정치운동이었다. 보은취회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반봉건, 반외세의 동시다발적인 구국운동이라는 것이다.
보은군수 이종익은 조병식 충청감사에게 급히 보고서를 올렸다.
"13일부터 각처의 동학도들이 모여들어 낮에는 장내리 위쪽 천변에 나갔다가 밤이 되면 본동 민가와 그 부근에 묵는다. 오고 가는 교통이 편리하여 이곳에 모인다고 하는데, 그 수가 계속 늘어 이미 골짜기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인원이 운집했다..."
![보은 장내리 전경 동학도인들은 보은 장내리 취회 장소에 돌로 된 성(城)을 쌓았으며, 척왜양창의의 큰 기(旗)와 다섯 가지 색의 깃발을 5방에 세웠다. 또 각 지방의 포(包)와 접(接)마다 기(旗)를 세웠으며, 참여 숫자가 무려 2만에서 3만에 육박하였다. 보은 장내리는 영남의 상주와 호서의 청주를 연결하는 지리적으로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암산(梨巖山) 아래 삼가천(三街川)의 천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본 사진은 동학혁명 100주년 이전 삼암 표영삼 선생께서 직접 촬영한 것으로,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하고 있다.](https://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24/1126/IE003381821_STD.jpg)
▲보은 장내리 전경동학도인들은 보은 장내리 취회 장소에 돌로 된 성(城)을 쌓았으며, 척왜양창의의 큰 기(旗)와 다섯 가지 색의 깃발을 5방에 세웠다. 또 각 지방의 포(包)와 접(接)마다 기(旗)를 세웠으며, 참여 숫자가 무려 2만에서 3만에 육박하였다. 보은 장내리는 영남의 상주와 호서의 청주를 연결하는 지리적으로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암산(梨巖山) 아래 삼가천(三街川)의 천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본 사진은 동학혁명 100주년 이전 삼암 표영삼 선생께서 직접 촬영한 것으로,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하고 있다. ⓒ 동학혁명기념관
동학의 보은대도소에서는 많은 도인들을 동원하여 정부에 동학의 세력과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각 포에 재차 통유문을 발송했다.
"대저 우리나라는 중년부터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기강이 무너져 법이 문란해졌다. 이에 오랑캐들이 중국을 능멸하고 조선에도 멋대로 침범하여 돌아다니고 있다. 이를 생각 없이 듣거나 평범하게 본다면, 그 결과가 나라에 어떤 화를 미치게 할지 알 수 없다. 하물며 왜적(倭敵_일본적)들과 어찌 일월(日月_해와 달)을 함께하며 한 하늘 아래 같이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나라의 형편은 쓰러질 듯 위급한 상태에 놓여 있다. 우리는 비록 초야의 백성들이지만, 어찌 뜻을 같이하여 죽음의 의리를 맹세하지 않으랴! 바라건대 여러 도인들은 한마음으로 뜻을 같이하여 요사스러움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종묘사직을 되살려 다시금 나라를 일월처럼 밝히는 것이 선비와 군자가 행할 충효의 도리이다. 여러 도인 군자들은 힘써 본연의 의기를 가다듬어 나라에 다시 없는 충성과 공로를 세우면 고맙겠다."
충청 보은 민회(民會)에 대한 심각한 사태의 급보를 받은 조정(朝廷, 조선 정부)은 우선 1893년 3월 16일(음)까지 해산하라는 내용으로 동학도에게 내리는 명령서인 동학인령(東學人令)을 황급히 보냈다.
"일본과 서양을 배척하여 의리로 충의를 다하려는 선비 백성들을 누가 감히 막으랴. 그러나 충의는 같지만 도인과 속인이 다르므로 난잡하게 뒤섞여 있는 것은 옳지 않다. 각기 잘 의논하여 앉을 자리를 가려야 한다.
원래 밭을 가는 사람은 우매하고 몰지각하여 농사에 부지런해야 한다. 멋대로 욕심을 부려 농사짓는 대업을 포기할 것인가! 이 명령으로 경계한 후에도 백성들이 계속 따르지 않으면 응당 군율로 다스릴 것이다. 이에 많은 동학도들이 볼 수 있도록 내다 붙일 것이니, 잘 살펴서 범하지 않도록 하라."
조정은 지난 공주 민회와 진행 중인 보은 민회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충청감사 조병식을 파직하였다. 그리고 호조참판 어윤중에게 양호도어사(兩湖都御使)로 임명하고 사태수습의 전권을 위임하였다. 이어 양호도어사 어윤중을 3월 17일 호남(전라)과 호서(충청) 지역을 평안케 하라는 임무를 주어 급파했다. 어윤중은 18일 남문을 나서면서 임금의 칙유문(勅諭文)을 펴 보았다.
"최근에 동학도들이 무리를 지어 선동으로 민심을 현혹하고 있다. 지난번에도 자리를 펴고 경거망동하며 대궐 앞에서 부르짖었다. 각 지방에 장관과 방백이 있으니 소원이 있으면 거쳐서 올려야 하는데 그리하지 않고 작당해서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경을(어윤중) 양호도어사로 보내니 동학도들이 모인 곳에 가 잘 효유하여 그들이 생업에 힘쓰도록 하라. 그들이 뉘우치지 않으면 경이 스스로 처리할 방도를 마련하라. 경에게 어사 마패 하나를 주노니 이는 사태를 마음대로 처리하라는 뜻이다."
양호도어사 어윤중은 무예가 뛰어난 종자 한 명을 데리고 한양을 떠났다. 충청도 보은으로 향하면서 이곳저곳의 민심도 살펴보았다. 어윤중은 3월 25일쯤 보은에 도착하여 그동안 입수한 첩보들과 현 상황에 대해 자세한 보고를 들었다. 또한 충청도와 전라도의 관리들은 3월 23일과 24일 직접 민회(民會) 장소에 들어가 조정의 명령대로 해산하라고 촉구하였다.
어윤중은 평민 옷으로 변장하고 호위무사 몇 명과 부관 한 명을 데리고 직접 시찰에 나섰다. 보은 장내리에 모인 동학도인들은 경상도 밀양에서 모여 합류한 인원까지 합쳐 2만 명이 웃도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또한 호남 관리들에게 전주 삼례에 동학도인 수천 명이 민회를 시작했으며, 특히 금구 원평에 모인 동학도들은 1만여 명이 운집하여 강력한 민회를 시작했다고 보고를 받았다. 충청과 전라의 상황을 파악한 어윤중은 심장이 터질 듯한 충격을 받았다.
어윤중은 임금에게 모인 사람의 성분이 매우 다양하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렸다.
"지략과 재기가 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 탐관(貪官)들의 횡포를 막아 보려는 사람, 미개한 종족인 오랑캐들이 빼앗는 것을 통절히 여긴 사람, 오리(汚吏, 부패한 관리)들에게 침탈당하고 학대받으나 호소할 데 없는 사람, 나라의 여러 곳에서 억누름을 피할 길이 없는 사람, 죄를 짓고 도망한 사람, 속리(屬吏, 하급관리)에게 쫓겨난 사람, 곡식이 떨어진 농민과 손해 본 장사꾼, 민회 운동에 들어가면 살 수 있다는 풍문을 들은 사람, 빚 독촉을 참지 못한 사람, 상민과 천민 신분에서 벗어나려는 사람..."
한편 전라감사 이경직은 재차 대선생 신원운동인 삼례취회 등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면직되고, 김문현이 새 감사로 임명되었다. 김문현은 3월 27일경 전라감사 부임차 먼저 삼례에 도착하여, 동학도인 수천 명에게 해산을 강권하였고, 동학도인들은 삼례에서 철수하여 원평에 합류했다.
어윤중을 양호도어사로 내려보낸 후 조정에서는 지방 관장들에게 동학도들을 빨리 해산시키라고 독촉하는 전교를 잇따라 하달했다. 그러나 도인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정부의 경고를 거부하였다. 동학도인들은 '보국안민, 척양척왜'의 구호를 외치며 주문'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를 산천이 울리도록 합송하였다. 동학도인들의 이러한 취회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장엄하면서 위력적이었다.
"동학도인들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도덕적인 섬김에 머물지 않았다. 모두가 하늘이라는 스스로의 존엄과 인권에 의한 자유와 평등의 세상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랬다 그때는 모두가 하늘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