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육아삼쩜영'은 웹3.0에서 착안한 것으로, 아이들을 미래에도 지속가능한 가치로 길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서울, 경기도 가평, 부산, 제주, 미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보호자 여섯 명이 함께 육아 이야기를 씁니다.[기자말] |
"2006년에서 2007년에 굉장히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가 <거침없이 하이킥>이에요. 여기서 가장 대표적인 캐릭터가 바로 '야동순재'죠. 배우 이순재씨가 연기한 건데요, 할아버지도 야동을 보는 구나, 하고 재미있게 보신 분들이 많을 거예요. 그런데 이 드라마 2024년에는 방영할 수 있을까요?"
얼마 전 아이 학교에서 보호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디지털성범죄 예방교육에서 강사는 의외의 발언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거침없이 하이킥>을 보지는 않았지만 야동순재 캐릭터는 워낙 인기를 끌어 잘 알고 있었다. 흔히 야동이라고 불리는 영상은 드라마에서 재미의 요소로 사용할 정도로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강사는 일침했다.
"야동은 더 이상 그렇게 불려서는 안 됩니다. 야동은 불법성착취동영상입니다."
윤리의 기준도 세월을 따라 변한다. 17년이 흐르는 동안 야동은 불법성착취동영상이 되었다. 이제는 법이 바뀌어 영상을 봐도 소지해도 공유해도 모두 처벌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여전히 불법성착취동영상 보는 걸 취미로 여기는 분위기가 존재한다. 누구나 그런 영상을 적어도 한두 번은 본다고 인식한다. 단지 어른들 뿐만 아니라 청소년 남자 아이들의 경우도 그런 영상 보는 걸 당연시 여긴다. 이 아이들의 인식은 어디에서부터 왔을까.
<거침없이 하이킥>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다 시청할 수 있는 저녁 8시 20분에 MBC에서 방영됐다. 가족과 함께 당시 그 프로그램을 시청한 어린이라면 성인이 되고 법이 바뀌어도 야동을 불법성착취동영상이라고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누구나 볼 수 있고 소지할 수 있는 한 콘텐츠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다면 딥페이크와 같은 영상을 보고 만드는데 죄책감을 못 느끼지 않을까.
고정관념은 쉽게 대물림 된다. 세상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어른은 아이들에게 자칫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그대로 물려주는 전달자가 될 수 있다. 이들이 가장 먼저 익혀야 하는 건 무엇일까. 강사는 어른들이 성인지 감수성부터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성인지 감수성은 성별 간의 불균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갖춰 일상생활 속에서의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해 내는 민감성을 말한다.
성인지 감수성이 떨어지면 성별 고정관념을 많이 지니게 되고, 성 차별을 차별로 인식하지 못한다. 성적 권리와 책임에 대해서도 무지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성범죄가 발생해도 범죄라는 걸 알지 못해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다. 가해자는 자신이 한 일이 가해라는 걸 모르고, 피해자는 자신이 당한 게 피해라는 걸 모를 수 있다.
"여자는 예뻐야지 얌전해야지." "남자는 힘이 세야지 씩씩해야지." 이런 발언부터 "여자가 행실이 그러니까." "남자들은 원래 다 밝혀." 이런 발언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말들이 내재화되면 처벌의 대상이 바뀌거나 범죄를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강사는 강연 내내 디지털성범죄는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공간이 바뀌었을 뿐, 우리 사회가 지닌 계급의 문제, 산업 구조의 문제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고 강조했다.
단순히 몇몇 사람들이 호기심에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내재된 관습이 범죄화 됐다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수동적인 존재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언행을 할 것 같지만, 사실 드러나는 언행은 내재된 생각과 관습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편견을 지우고 새로운 시대의 관점을 흡수하려면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려 노력해야만 간신히 가능하다.
불법성착취동영상을 보고 만들고 소지하는 것을 단순한 놀이와 장난으로 취급할 때, 딥페이크를 '친구끼리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안일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 신체를 비평하고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는 '왜곡된 성문화'를 문제 의식 없이 남자들의 놀이 정도로 받아들일 때, 누구라도 범죄자가 될 수 있다. 아이를 기르는 보호자가,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가 먼저 그런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버려야만 아이 역시 새로운 시대의 관점을 내면화 하지 않을까.
딥페이크 사건이 일파만파로 퍼질 때, 한 고등학교에서는 여자 아이들만 따로 불러 모아 SNS를 모두 비공개로 전환하거나 사진을 지우라고 압박했다고 한다. 그 시각 남자 아이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여자 아이들이 SNS에 사진만 올리지 않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자신의 SNS에 사진 한 장 올리지 못하는 사회는 얼마나 각박한가.
나만, 내 아이만 피해를 입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은 너무나 무책임하다. 돌고 돌아 누군가는 결국 타깃이 된다. 자신만 피하면 된다는, 내 아이는 상관 없을 거라는 생각이 계속 피해자를 양산하는 씨앗이 된다. 남녀를 가르고 피해자만 생기지 않으면 된다는 근시안적인 처리방식은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보호자나 교사도 그렇지만 법을 만드는 사람도, 법을 집행하는 사람도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인식을 길러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 구시대적인 생각에 갇혀 있으면 있을수록 법은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그 법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은 늘어난다. 법은 늘 세상의 변화보다 한 발 늦다. 법도 결국 사람이 만든다. 사람이 바뀌어야, 사람이 배워야, 법도 세상의 변화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
디지털성범죄 예방을 위해 성인지 감수성부터 익혀야 하는 건,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이 성범죄를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원래 밝히고, 남자들은 원래 다 그렇다는 시선 역시 성인지 감수성이 낮아서 생겨난 반응이 아닌가. 쉬운 일반화의 오류에 선량한 남성들이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고, 여성들에게는 여전히 행실을 따지고 옷차림을 점검하라 한다.
남자 아이 둘을 키우는 부모로서 딥페이크 같은 사건이 터지면 책임감을 느낄 때가 많다. 아직은 아이들이 어리지만, 아이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빨리 자라고 이 세상의 온갖 것들을 습득할 것이다. 나라도, 우리 가정에서라도 더 올바른 인식을 키울 수 있도록 언어를 점검해야겠다. 애초부터 사람이 사람의 생김을 가지고 평가하는 건 나쁜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야동은 놀이의 대상이 아니라 불법성착취동영상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못박아야겠다.
책임감을 느끼는 어른이 늘어날수록, 자신을 돌아보고 변화하는 세상을 인지하는 어른이 많아질수록, 쉽게 범죄로 내몰리는 아이들이 줄어들 것이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